[르포]"진짜 위기는 이제부터" '넷제로' 향한 SK이노의 진심
[편집자주] 새해가 밝았지만 경제 상황은 어느때보다 어둡다. 퍼펙트스톰(복합 경제 위기) 앞에 소비, 투자, 생산, 수출 모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대한민국이다. 그 선봉에 기업들이 있다. 희망의 2023년, 산업 현장을 찾아 위기 극복의 해법을 모색한다.
"SK이노베이션은 '넷제로(탄소중립)'에 진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울산은 이미 택시를 타도 내연기관차보다 전기차 비중이 더 높습니다. 앞으로 2030~2035년엔 휘발유 수요가 절벽이 될 거라 봅니다. 이에 따라 SK이노베이션은 앞으로 정유공장을 석유화학공장으로 전환할 계획입니다. 특히 제품이 얼마나 '친환경'적인지가 앞으로 시장의 승자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탄소중립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을 겁니다."
지난달 16일 찾은 SK이노베이션 생산기지 SK 울산 콤플렉스(CLX)에선 '넷제로'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들렸다. 원유 수입과 석유제품 수출의 핵심기지인 울산항이 접안하는 선박들로 붐볐지만, SK이노베이션 직원들은 당장 석유제품이 잘 팔리는 것보다 그룹의 목표인 넷제로 달성에 관심이 많아보였다.
SK이노베이션의 최대 위기는 지난 2020년이었다. 코로나19(COVID-19)가 확산되면서 석유제품 수요가 급감했고 한 해에 2조4203억원의 적자를 냈다. 정유사업은 지난해부터 회복되기 시작하더니 올해에 역대 최고 수익을 냈다. 시장에선 SK이노베이션이 올해 총 6조원에 가까운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적만 보면 순탄하게 위기를 극복한 듯 보이지만, SK이노베이션 직원들은 아직 진짜 위기는 오지 않았다고 믿는 듯 했다. 공장을 안내한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20년 넘게 근무했지만, 이런 사례는 없었다"며 "경유와 항공유 등의 가격이 폭등하는 이상 현상 때문에 실적이 좋았지만 다시 안정되고 있고 앞으로 이런 상황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10년 뒤 위기를 내다보고 준비하고 있었다. 정일진 SK에너지 뉴테크기획 PL은 "앞으로 휘발유와 경유를 팔 데가 없으니까 공장을 개조해서 석유화학제품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며 "공장 원료도 친환경 원료를 사용한 제품을 만들어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SK이노베이션이 야심차게 준비한 사업이 '폐플라스틱 재활용 클러스터' 사업이다.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 SK지오센트릭은 울산 부곡용연지구 내 6만5000평(21만5000m²) 규모 부지에 클러스터 부지를 마련하고 땅을 고르게 하는 정지작업을 하는 중이다. 최대 1조7000억원이 투입되며 2023년 9월 공사에 착수한 뒤 2025년 말 가동하는 것이 목표다.
클러스터가 완공되면 연간 폐플라스틱 약 25만톤을 재활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순도 폴리프로필렌(PP) 추출 △해중합 △열분해 등 3대 화학적 재활용 공정을 모두 갖춘 곳을 건립하는 것은 글로벌 최초 시도다. 각 공장은 미국 퓨어사이클 테크놀로지, 캐나다 루프 인더스트리, 영국 플라스틱 에너지의 원천 기술을 확보, 협력해서 짓는다.
박천석 SK지오센트릭 GT1 Squad PL은 "부산·경남권에서 수거한 하루 600~700톤의 생활자재들을 받기로 계약했다"며 "아직 전처리 공장이 보완돼야 할 지점이 있지만, 매립되거나 소각되는 플라스틱 쓰레기 양이 많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기존 정유사업도 환경 친화적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연료가 많이 필요한 선박과 항공기는 기존 연료를 연료전지나 배터리로 전환하는 것이 쉽지 않다. SK이노베이션 울산공장 중 가장 최근 지어진 벙커C유 생산공장은 대기 오염을 유발하는 황함유량을 대폭 낮췄다. SK에너지 관계자는 "이 공장은 2020년 3월 가동을 시작했는데 IMO(국제해사기구) 온실가스 규제에 맞춰 황을 제거하고 친환경 선박유를 생산한다"고 설명했다.
SK이노베이션은 탄소배출량을 대폭 절감할 수 있는 지속가능항공연료(SAF) 생산도 검토 중이다. SAF는 바이오 대체연료를 사용해 생산한 항공유다. 폐식용유나 미세조류, 사탕수수와 옥수수 등을 원료로 활용할 수 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SAF 생산 플랜트를 어느 부지에 세울지 검토 중"이라며 "시장 진입 시점은 2027년 정도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의 제품들을 전시한 전시관에선 열분해유, 바이오연료, 친환경 기유와 더불어 중온 아스팔트도 친환경 제품으로 소개됐다. 중온 아스팔트는 SK이노베이션이 올해 환경부 인증을 받은 제품이다. 뜨거운 온도에서 시공하는 기존 아스팔트와 달리 더 낮은 온도에서도 시공할 수 있게 만들어 탄소배출량이 감축된다. 다양한 분야에서 넷제로를 위해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다.
사업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해저에 저장한다는 계획이다. 울산CLX는 울산 앞바다에 있는 동해가스전을 활용한 CCS 실증모델 개발 정부과제에 참여 중이다. 향후 국책 과제로 추진될 CCS 실증사업권을 확보할 계획이다.
정일진 PL은 "CCS 관련 스터디한 게 2년이 넘었지만 굉장히 어려운 과제"라며 "이산화탄소를 묻는 곳은 지질 검사와 탐색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를 개발하려면 적어도 7~8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해가스전은 이산화탄소 1200만 톤을 묻을 수 있는데 SK이노베이션이 배출하는 1년치 이산화탄소에 해당하는 양밖에 되지 않는다"며 "말레이시아 등 해외도 탄소저장 장소로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SK에너지와 SK어스온은 국내 다른 기업들과 함께 지난 8월 한국-말레이시아 간 CCS 프로젝트 개발 공동협력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SK이노베이션은 탄소배출량 자체를 줄이기 위해 기존 공장에 투입되는 연료도 저탄소 연료로 전환 중이다. 울산CLX는 동력보일러(전체 공정에 위치한 터빈에 시간당 500~1000톤의 스팀을 생산·공급하는 장치) 11기 중 9기의 연료를 벙커C에서 액화천연가스(LNG)로 교체해 지난해까지 누적 14만4000톤의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효과를 거뒀다. 남은 2기도 2023년까지 LNG 연료로 전환하면 연 4만톤의 탄소배출을 추가로 절감할 수 있다.
SK 울산CLX는 2019년 이산화탄소 배출량(1064만톤) 대비 2030년까지 탄소 50%(532만톤)를 감축할 방침이다. 2050년 넷제로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다. SK이노베이션은 2027년까지 폐플라스틱 클러스터 구축과 설비 전환 및 증설을 통한 친환경 제품 확대에 약 5조원 규모를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울산=최민경 기자 eyes00@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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