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의 압도적 화려함 vs. 커리어우먼의 내적 성찰
한국 뮤지컬 시장이 지난해 티켓 판매액 기준 사상 최초로 4,000억 원을 돌파하며 다시 불붙고 있는 가운데 대극장 뮤지컬이 연말연시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 중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신작 라이선스 뮤지컬 두 편이 지난달 나란히 개막해 순항 중이다. ‘물랑루즈!’와 ‘이프덴’은 여배우들의 에너지가 돋보이는 작품들로, 번역과 한국어 가사 작업에 같은 번역가(김수빈)가 참여했다는 공통점도 지녔다.
전형적 브로드웨이 쇼뮤지컬 '물랑루즈!'
공연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관객은 2023년 서울에서 1899년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쇼가 펼쳐지는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의 클럽 '물랑루즈'로 순간 이동한다.
지난달 20일 서울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개막한 아시아 초연 뮤지컬 '물랑루즈!'는 엄청난 자본력이 동원된 전형적 브로드웨이 스타일의 쇼뮤지컬이다. 2019년 7월 브로드웨이 초연 개막 당시 사전 제작비만 2,800만 달러(약 356억 원)가 투입된 공연은 화려한 무대와 의상, 조명이 탄성을 자아낸다. 미국·영국·호주·독일에 이어 레플리카 프로덕션(오리지널 프로덕션을 그대로 재현)으로 선보인 한국 공연 역시 시각적으로 압도한다.
2001년 개봉 당시 뮤지컬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바즈 루어만 감독의 동명 영화가 원작이다. 수천 개의 전구로 장식된 하트 모양의 장식물이 눈에 띄는 무대와 코르셋 스타일의 관능미 넘치는 무대 의상은 호화스러운 영화의 비주얼을 닮았다. 물랑루즈 최고의 스타 사틴(김지우·아이비)과 가난한 작곡가 크리스티안(이충주·홍광호)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 역시 고전 캐릭터가 투영된 영화의 전개에서 따왔다. 크리스티안은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의 가난한 시인 로돌포를, 재정적 이유로 몬로스 공작(손준호·이창용)과 어울리는 사틴은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를 연상시킨다. 영화에서 영국 시인이자 작가였던 크리스티안이 미국 출신의 작곡가로, 사틴이 진취적 캐릭터로 설정된 정도가 영화와의 차별점이다.
'물랑루즈!'는 독일 태생으로 파리에서 활동한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의 음악부터 비욘세, 레이디가가, 아델이 부른 팝송 등 3개 대륙에서 160년 동안 사랑받아 온 음악 70여 곡을 '매시업(서로 다른 곡을 조합해 새로운 곡을 만들어내는 것)'한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1막 마지막 곡 '엘리펀트 러브 메들리'에만 20여 곡의 팝송이 쪼개어 담겼다. 다만 공들인 번역이 오히려 매시업에 양날의 검이 됐다. 매끄러운 번안 덕분에 주크박스 뮤지컬에 흔한 개연성 부족 문제는 노출되지 않았지만 히트곡 메들리인 매시업 넘버의 특징도 희석돼 버렸다.
서사적 완성도보다 볼거리를 선호하는 관객에게 권한다. 개막 10분 전 앙상블 배우들의 '프리쇼'부터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무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싶은 관객은 서둘러 입장하는 게 좋다. 공연은 3월 5일까지.
삶의 모든 선택이 소중한 뮤지컬 '이프덴'
벨 에포크 시대 클럽 '물랑루즈'의 사틴이 클럽의 존치와 사랑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뮤지컬 '이프덴(If/Then)'의 엘리자베스는 일과 사랑, 우정 등 일상 속 여러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지난달 8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이프덴'은 선택과 기회의 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위로를 전한다. '넥스트 투 노멀(2009년 브로드웨이 초연·2011년 한국 초연)'의 브라이언 요키(극작)와 톰 킷(작곡)이 다시 의기투합한 2014년 브로드웨이 초연 뮤지컬로, 이번 한국 공연은 북미를 벗어난 첫 라이선스 무대다.
이야기는 커리어를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했던 엘리자베스가 39세의 나이로 이혼 후 10년 만에 뉴욕으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된다. 뮤지컬은 사소한 선택으로 '리즈'와 '베스'로 나뉘는 엘리자베스의 두 가지 삶을 교차적 연출로 펼쳐 보인다. 운명적 사랑을 택한 '리즈'와 뉴욕시 도시계획국장으로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베스'의 삶은 완전히 다르지만 임신과 육아의 고충, 인간관계의 어려움 등 삶의 보편적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다.
뮤지컬은 뉴욕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플랫아이언 빌딩이 무대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고, 베스가 뉴욕의 낙후 지역을 개발한 '허드슨 야드 프로젝트'를 빗댄 듯한 '허드슨강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뉴욕이라는 지역적 배경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일과 육아 사이에서 힘겨워하는 중산층의 삶이나 젠트리피케이션 등 대도시의 동시대적 고민을 담고 있어 크게 이질감은 없다.
출산으로 1년 6개월 만에 엘리자베스 역으로 뮤지컬에 복귀한 정선아가 탁월한 가창력과 실감나는 워킹맘 연기로 큰 박수를 받았다. 박혜나, 유리아가 정선아와 엘리자베스를 번갈아 맡는다. 공연은 2월 26일까지.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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