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조선 500년 마지막 궁중 잔치의 허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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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음악적으로는 화려했지만
8년 뒤 국권 상실 상기하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반면교사’
조선 시대 국왕의 생일잔치는 어땠을까. 지난달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임인진연(壬寅進宴)’은 그 궁금증을 풀어준 무대였다. 임인은 임인년, 진연은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다. 실제로 이 공연은 1902년 고종(高宗) 즉위 40주년과 51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잔치를 100분 안팎으로 재구성했다. 이 때문에 임인진연은 조선 왕조 500년의 마지막 궁중 잔치라고도 부른다.
시각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이날 무대는 감탄을 자아내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특히 잔치 주인공인 고종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무대 맨 앞의 어좌(御座)를 비워둔 채 무대 방향을 거꾸로 돌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연출·무대 미술을 맡은 박동우 홍익대 교수의 말처럼 “관객들이 황제의 시선으로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국립국악원 정악단·무용단 등 140여 명을 총동원해서 궁중 무용과 음악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종합 예술 무대가 됐다. 특히 어부사를 노래하면서 배를 둘러싸고 춤을 추는 마지막 ‘선유락(船遊樂)’ 장면은 화려한 색채와 우아한 동선이 어우러져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120년 만에 재현한 궁중 잔치라고 하지만, 정작 공연이 끝날 무렵에는 반가움보다는 오히려 짙은 서글픔이 남았다. 한국 근현대사의 숨가쁜 연표가 떠오른 탓이다. 임인진연이 열렸던 1902년은 제1차 영일(英日) 동맹이 체결된 해다. 국경을 맞댈 일이 없는 영국과 일본이 의기투합한 이유는 분명했다.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 뒤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자가 되면서 조선 병합의 야욕을 본격화했다. 결국 1905년 조선은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1910년 국권마저 잃고 말았다. 국왕의 만수무강과 태평성대를 기원했지만,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공염불(空念佛)이 된 셈이다.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만큼 학계에서 첨예하게 엇갈리는 쟁점도 드물다. 한편에서는 근대화와 자주 국가를 염원한 명군(明君)으로 묘사한다. “대한제국은 무능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고종의 근대화 사업을 박멸하려는 일제의 계략에 희생된 것”(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망국의 책임이 있는 암군(暗君)이나 혼군(昏君)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고종은 왕정을 극복하려는 의식이 부족했다. 대한제국은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부패로 얼룩져 있었다”(김재호 전남대 교수) 같은 평가가 여기에 속한다.
명군인지 암군인지 가릴 만한 능력이나 처지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엔 슬픈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심지어 현재 정부 기관 내에서도 의견은 엇갈린다는 점이다. 이번 공연을 주최한 국립국악원에서는 “자주 국가를 염원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궁중 잔치”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반면 당시 궁중 연회의 절차와 의식을 기록한 진연의궤(進宴儀軌)를 소장한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는 이런 구절로 끝난다. “1902년 두 차례 치른 잔치에서 대한제국 1년 예산의 9%에 해당하는 비용이 쓰였다. 성대한 기념 잔치로 인한 업무 공백과 막대한 비용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됐고, 이후 근대화를 위한 개혁도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국운은 기울어 갔다.”
냉혹한 국제 질서를 도외시한 채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준 것이야말로 ‘임인진연’의 역사적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을 상기시킨 무대가 됐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은 120여 년 전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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