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꿈꾼 길가메시의 깨달음… 영원한 건 인간이 아닌 인간의 업적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2023. 1. 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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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82]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5.5m 높이의 ‘사자를 압도하는 영웅’(왼쪽) 조각상과 날개를 달고 인간의 머리를 한 황소의 조각상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기원전 8세기 작품이다. 사자를 압도하는 영웅의 주인공은 길가메시, 황소의 정체는 여신 이슈타르가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세계관이 응축된 길가메시 이야기는 계속 변화하면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됐고 풍부한 내용과 뚜렷한 메시지를 담게 됐다. /플리커

약 4500년 전에 기록된 길가메시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다. 석판 12개 위에 기록한 시구 3000행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왕국 우룩(Uruk)의 왕 길가메시의 영웅적 모험을 그린다. 처음에 시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룩의 성곽으로 올라가서 찬란한 도시를 보라. 그리고 삼나무 궤 안에 보관된 청람석 석판 위에 새겨진 길가메시 이야기를 보라.

길가메시는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이 인간인 특별한 존재지만 폭군 모습으로 등장한다. 젊은 남자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많은 처녀에게 몸을 바치도록 했다. 압제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하늘에 탄원하자 신들은 길가메시와 싸워서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인간 엔키두를 만들어 지상으로 보냈다. 두 영웅은 온종일 싸움을 벌였으나 끝내 승패를 가리지 못하자, 결국 싸움을 중단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인간의 숙명에 도전한 첫 영웅

어느 날, 길가메시는 엔키두에게 사막 너머 서쪽 세계 끝에 있는 신성한 삼나무 숲으로 가서 나무를 베어오는 모험을 제안했다. 이 숲에는 훔바바라는 괴물이 신들의 나무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훔바바를 죽이고 거대한 삼나무를 베어 왔다. 이런 용맹한 길가메시의 풍모를 보고 사랑에 빠진 여신 이슈타르가 구혼했으나 차갑게 거절당했다. 격분한 여신은 하늘의 황소를 땅으로 보내 이들을 공격하게 만들었지만, 두 주인공은 오히려 소를 죽이고 심지어 고기를 잘라 여신에게 던져 모욕했다. 이 오만방자한 행동이 결국 화를 불렀다. 신들이 모여 재판한 결과 둘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는데, 웬일인지 엔키두에게만 죄를 물어 목숨을 앗았다.

길가메시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영생불사의 비밀을 알아내겠다고 결심했다. 세계의 동쪽 끝에서 우트나피시팀이라는 노인이 죽음을 모르고 영생을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기에 그 노인을 찾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하늘에 닿는 산을 지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난 후 ‘죽음의 강’을 건너니 다시 가없는 바다가 앞을 가로막는다. 길가메시는 다시 용기를 내어 우르사나비라는 뱃사공의 배에 올라타고 힘겨운 항해를 한 끝에 드디어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가서 우트나피시팀과 아내를 만났다. 그렇지만 이 부부가 전해준 영생의 비밀은 길가메시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옛날 노인이 겪은 대홍수 이야기다.

옛날 언젠가 신들의 왕 엔릴은 수선스럽기만 하고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몰살하고자 대홍수를 일으켰다. 이때 에아 여신이 우트나피시팀에게만 홍수를 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여신이 시킨 대로 큰 방주를 만들어 아내와 온갖 가축을 실었다. 7일 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으나 우트나피시팀만은 재앙을 피했다. 7일째 되는 날 드디어 폭풍우가 멈추자 그는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은 전부 물에 잠겨 있고 사람들은 모두 진흙으로 변해 있었다. 방주 밖으로 나가도 될지 알아보기 위해 차례로 비둘기와 제비, 까마귀를 날려 보냈는데 앞의 두 새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해 돌아왔지만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성경에 나오는 대홍수 이야기와 비교하면 새의 종류와 순서가 다르다). 물이 마른 것을 알게 된 우트나피시팀은 아내와 가축을 데리고 땅에 내려와 신께 기도를 올렸다. 엔릴은 살아남은 우트나피시팀에게 세상 끝의 먼 섬에서 영생을 누리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러니 이들이 영생을 누리는 것은 오직 신들의 특별한 은총 덕분일 뿐, 다른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실망한 길가메시는 계속 영생의 비밀을 찾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자 우트나피시팀은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 만일 그가 ‘작은 죽음’, 곧 잠을 피할 수 있다면 진짜 죽음도 피할 수 있으니 해보라고 권했다. 그렇지만 먼 여행 때문에 피곤했던 길가메시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7일 동안이나 곯아떨어졌다. 잠에서 깬 길가메시가 실망하자 아내가 영생은 아니더라도 대신 다른 보상을 해주자고 제안했다. 젊음을 되찾을 수 있는 풀이 바닷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다. 길가메시는 회춘의 풀을 얻어 귀향길에 올랐다. 가는 도중 샘에서 목욕하는데 뱀 한 마리가 나타나 그 풀을 먹고 허물을 벗고는 젊음을 되찾았다. 길가메시는 영생도 회춘도 불가능하게 된 상태로 고향 우룩으로 돌아왔다.

빈손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이제 길가메시는 지혜를 얻었고 폭군이 아니라 현명한 왕이 되었다. 그가 깨달은 바가 있으니, 비록 우리가 영원히 살 수는 없더라도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서 그 이야기가 후대에 전해지고 또 그것을 기리는 기념물이 만들어지면 불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길가메시는 높은 성벽을 쌓고 뱃사공 우르사나비를 불러서 성벽에 올라가 위대한 도시의 장관을 보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서사시는 원래 시작 지점인 도시 성벽으로 되돌아왔다. 굳건한 성벽이 인류가 이룩한 문명을 지켜주지 않는가. 우리 각자는 다 죽을 운명이지만, 인류 전체로 보면 신에게 영속성을 허락받았다. 이제 신들도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문명을 이루어낸 인간이 세계 질서의 영속성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길가메시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세계를 어떻게 그리는지 보여준다. 세상은 문명과 야만이 대립하고 있다. 우룩이라는 도시 국가를 둘러싼 곳은 사냥꾼과 유목민의 세계이자 괴물, 악마, 귀신, 환상적 동물의 세계다. 서쪽 끝에는 훔바바라는 괴물이 지키는 거대한 숲이 있고, 동쪽 끝에는 ‘전갈 인간’이 지키는 환상적이고도 황량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시간이 가면서 변방은 점차 더 먼 곳까지 확대되었다. 기원전 3000년대 중엽 판본에서는 동쪽 변경이 이란 산맥이었으나, 1000년 후 새 판본에서 세상의 끝은 이란의 산들을 지나고 큰 바다를 건넌 곳에 있다.

기원전 2000년대 중엽에 최종본 완성

길가메시 이야기는 계속 변화·발전하면서 주변 지역으로 확산했다. 특히 함무라비 대왕 시대(기원전 1792~기원전 1750)에 문예부흥기를 맞아 아카드어로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는데, 이때 다양한 요소가 더해져 더 풍성한 내러티브로 발전했다. 기원전 2000년 대 중엽 ‘최종 완성본’이 형성되었다. 놀랍게도 이 판본을 완성한 저자가 알려져 있다. 고대의 셰익스피어라 할 만한 위대한 지식인 ‘신-레케-운닌니’가 에피소드 순서를 정해 줄거리를 잡고, 서론과 결론 부분을 더해 전체 틀을 만들었다. 2000년에 이르는 기간을 거쳐 서사시의 편집 과정이 마무리되면서 내용이 더 풍성해지고, 보편적이고도 핵심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전에 길가메시 이야기는 단지 흥미진진한 모험담 정도였지만 그의 손을 거치면서 인간의 숙명에 관한 성찰로 승화했다.

고대 이집트 문명과 달리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사후 영혼의 재판이라는 개념이 없다. 사후 세계에 들어가는 죽은 자는 선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하는 점보다는 죽을 때 성년에 달했는가, 결혼했는가, 어떤 상태로 죽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후 세계에서 빛나는 영생을 누리리라는 식의 희망 같은 것도 없다. 불멸은 단지 후세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업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학자들은 이 서사시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이행하는 성숙 이야기로 해석한다. 어린이의 불가능한 꿈을 버리는 대신 현명함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해진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우리 사회가 한층 더 원숙하게 성장하기를 기원해 보자.

[루브르 박물관의 길가메시]

왕궁 지키는 수호신… 높이 5.5m로 보는 사람들 압도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거대한 신상 ‘사자를 압도하는 영웅’은 길가메시상이라고 추측한다. 설화석고(alabaster)로 만든 높이 5.5m의 거대한 상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명품이다. 원래 이 상은 신(新)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 시대(기원전 721~기원전 705)의 작품으로 왕궁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조각상처럼 정면을 보는 상은 아시리아에서 드문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런 형식은 마술적 힘으로 왕궁을 지키는 조각상에 한한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것은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의례용 무기다. 이 상은 그저 장식으로 있는 게 아니었다.

두상을 둥글게 만들었기에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신상의 눈과 마주칠 뿐 아니라, 사람이 움직여도 계속 쳐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지워졌으나 원래는 눈에 밝은 색이 칠해져 있어서 그 눈이 보는 사람에게 최면을 건다. 도시 전체를 굽어보는 위치에 우람한 자세로 서 있던 영웅상은 강력한 국왕권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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