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함께 사는 100만명…이들도 ‘가족’입니다
남남끼리 함께 사는 ‘비친족가구’
인구로 따지면 ‘특례시’급 규모
이들은 옆집의 ‘별난 가족’이 아닌
젊고 일하며 고학력인 경우 많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100만명의 사람이 ‘남’과 삽니다. 부인과 남편 사이도, 자식과 부모 관계도 아니지만 사랑하니까, 같이 있으면 편하니까, 혹은 그냥 어쩌다 함께하기를 택한 이들입니다. 통계에선 이들을 ‘비친족가구’로 규정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남남끼리 혈연도, 법적 혼인 관계도 아닌데 집을 이루고 사는 이들을 뜻합니다.
이 같은 비친족가구의 증가세는 멈출 기미가 없습니다. 지금 추세라면 오히려 가속도가 붙을 수도 있겠습니다. 2000년 39만명으로 중소형 도시 인구 규모이던 비친족가구원은 20년 만에 101만5100명이 됐습니다. 만약 남남끼리 사는 사람들을 모아 도시를 만든다면, 그 크기가 경기 고양시·용인시, 경남 창원시 같은 인구 100만명 이상의 ‘특례시’ 규모가 될 겁니다. 이 추세면 ‘내가 살고 싶은 사람과,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사는’ 가구가 미래의 대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100만명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혈연·혼인 등 제도가 관리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혹은 ‘남남끼리 사는 데는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편견 때문에, 또는 모진 손가락질이나 험한 입길에 오르기 싫어 스스로 쉬쉬했던 탓에 이들은 보호받지도 관찰되지도 않았습니다. 100만명이 훌쩍 넘도록, 그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진지한 접근을 대신한 것은 ‘별난 사람들’이란 편견과 차별, 국가의 방치였습니다.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는 한국도시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마이크로데이터(20% 표본조사)를 분석했습니다. 데이터로 ‘가장 잘 맞는 사람과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엿봤습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비친족가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① 남남끼리 사는 사람들은 별난가요
‘1001호는 이사 온 지 몇 년짼데 아직 혼인신고도 안 했대’ ‘앞집에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 남자(여자)끼리 산대’ ‘1층 집은 들락거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데?’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본(또는 해봤을) ‘남의 집’ 얘기는 대부분 ‘우리와 다른 저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기에 이상하거나 별난 사람들이라고 치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데이터에서 나타난 비친족가구는 그런 ‘별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다른 방식의 관계를 맺고 살아갈 뿐,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젊은’, ‘일하는’, ‘고학력’ 가구입니다. 구체적으로 볼까요. 친족가구는 50~60대 가구주가 가장 많지만 비친족가구는 30세 미만 가구주가 가장 많습니다. 경제활동 상태에 ‘주로 일하였음’이라 응답한 비율은 71.7%(친족가구 70.6%)였고, 가구주 학력이 ‘대학+대학원졸’인 비율은 58.7%로 친족가구(49.7%)보다 높습니다.
비친족가구 10집 중 8~9집은 둘이 삽니다. 이 중 절반은 남녀(50.1%)가, 나머지 절반은 남자끼리(29.8%), 또는 여자끼리(20.1%) 살고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둘이 사는 가구의 절반은 이성, 나머지 절반은 동성이란 뜻입니다. 다만 이들이 로맨틱한 관계인지, 우정으로 뭉쳤는지, 또는 실리로 이어졌는지 여부는 데이터에서 알 수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비친족가구의 대세인 것 같지만, 분석 기간을 넓히면 또 다른 사실이 확인됩니다. 바로 ‘황혼 동거’인데요. 어르신들의 동거는 더 빠르게 느는 중입니다. 연령대별 구성을 보면 20대 비친족가구원은 2010년 44%에서 2021년 20%로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50대는 8%에서 16%로, 60대는 4%에서 14%로 늘었습니다. 동거를 두고 ‘멋모르는 젊은 애들의 일탈’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좀 흘러간 시절의 얘기겠습니다.
참고: 그래픽① 비친족가구 가구원 수별 비중, 2인 비친족가구 성별 구성. 그래픽② 비친족가구원 연령대별 비중
② 남남끼리 사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비친족가구가 충분히 연구된 바 없기에 아직 정확한 동기나 배경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부족하나마 답을 모색한 연구가 있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21년 내놓은 ‘비혼동거 실태 분석 연구’입니다. 혼인하지 않고 동거 중(또는 경험이 있는) 남녀 3007명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서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자연스럽게’(17.3%) 동거를 택했다고 합니다. 별 이유 없이 선택했다니 조금 김이 빠질 수도 있겠는데요, 전문가들은 동거가 이미 자연스러운 선택이 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지는 질문에도 실마리가 있습니다. 요약하면 비혼동거 가구는 ‘더 행복하고 더 평등하다’일 겁니다. 파트너와의 관계 만족도를 묻자 비혼동거 응답자 63%가 ‘만족한다’(약간+매우)고 답했는데, 이는 전체 가구의 배우자 관계 만족도(57%)보다 높은 응답률이었습니다.
여성의 만족도는 두 유형의 격차(비혼동거 61.7% - 전체 50.6%)가 더 컸습니다. 비혼동거에서는 남녀 관계가 더 평등한 영향으로 보입니다. 장보기, 식사 준비, 청소, 자녀 양육·교육, 가족생활 계획 및 준비 등 가사 전반에서 ‘여성’이 대부분을 수행(70%)하는 전체 가구와 달리, 비혼동거 가구 대부분은 이를 ‘둘이 똑같이’(70.7%) 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동성 가구나 3인 이상 비친족가구를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비혼동거 응답자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스스로의 상황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수도, 또는 관계가 원만한 비혼동거 가구만 결국 유지되어 설문에 응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도로 보호되지 않기에, 또 헤어지려 복잡한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아도 되기에,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신뢰’만으로 유지되는 관계이기에 비친족가구의 행복은 더 큰 것일지도 모릅니다.
참고 : 그래픽③비혼동거/전체 가구 가사수행 분담. 그래픽④ 비혼동거/전체 가구 파트너/배우자 만족도 비교
절반은 남녀, 절반은 동성과 동거
20대 줄어든 반면 황혼 동거 늘어
비혼 동거인들, 평등·행복감 느껴
동거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져
③ 남남끼리 사는 것, 힘들지 않나요
시민들의 인식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남녀가 결혼하지 않더라도 함께 살 수 있다’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문장에 찬성한 응답자 비율은 14년째 이어진 통계청 조사(격년)에서 계속 늘었습니다.
참고 : 그래픽⑤ 2008~2022년 통계청 사회조사 ‘결혼문화에 대한 태도’ 등
그럼에도 비친족가구는 여전히 ‘제도가 외면하는 관계’입니다. 법적 부부가 아니라서 주택청약 특별공급을 받을 수 없고, 법정대리인이 아니라서 보호자로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지만 결혼하고 싶지 않은 이들, 결혼하고 싶지만 (법적) 결혼할 수 없는 이들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많은 사회보장제도나 공공서비스에서 배제되고 있습니다.
비친족가구의 주거 불안은 데이터에도 비칩니다. 비친족가구는 자가 거주 비율이 22%로 친족가구·1인 가구보다 낮았습니다. 반면 무상 거주 비율(15%)은 가장 높습니다. 거주 기간은 3년 미만 67.3%로 가장 짧았고 아파트 거주 비율(32.7%)도 친족가구(61%)의 절반입니다. 지하 거주 비율은 2.5%로 친족가구(1.0%)보다 높고, 1인 가구(2.5%)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제도적 지원에서 배제된 비친족가구의 주거 실태가 데이터에서도 확인된 결과입니다.
참고 : 그래픽⑥ 비친족가구 거주 형태(자가 거주/월세/무상) 비율. 그래픽⑦ 비친족가구 거처 종류 비교
해외선 ‘가족’ 형태로 인정하는데
윤석열 정부, 사실혼·동거 불인정
청약 특공·보호자 동의 서명 등
법적 제도에선 여전히 외면받아
④남남끼리 사는 삶, 해외는 어떤가요
혼인 이외의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는 해외의 많은 국가들에서 동거는 흔한 일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 대상 28개 국가에서 파트너·배우자가 있는 경우의 16.7%가 동거 커플입니다. 프랑스 시민연대협약(PACS), 영국 시빌파트너십 등 결혼하지 않은 이들의 법적 관계를 인정하는 제도도 선례가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는 중입니다. 최근 여성가족부는 사실혼이나 동거 가구를 법적 가족으로 인정하기로 한 기존 방침을 뒤집었습니다. 당초 정부는 ‘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가족을 좁게 정의하는 법 조항을 지우고 가족 형태에 따른 차별 방지 근거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새 정부 들어 입장을 뒤집고 ‘원래 하던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법의 보호·지원은 지금까지처럼 혼인·혈연·입양으로 형성된 가족에만 적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앞서 언급한 비혼동거 실태 연구도 처음이자 마지막인 조사가 될 것 같습니다.
변수정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10월 열린 한국가족학회 토론회 토론문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어렵게 전진해 이제 관련법 제정과 개정을 논의하던 과정에서, 다시 법적 가족에 얽매이는 것으로 순식간에 돌아가는 것은 지금까지의 노력을 허무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은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2023년 대한민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100만 대도시 규모의 사람들이 그 증거입니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의 이야기도 새겨들을 만합니다.
“한국 사회는 고립을 해소하려는 개인의 여러 노력을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문제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들을 문제적 집단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들이 유대를 맺는 다양한 방식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참고 : 그래픽⑧ OECD 국가 동거 비율
조형국 기자 situat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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