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와 마틸다의 세상은…분명,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140년 전 동화 ‘삐노끼오의 모험’과 1980년대 발표된 ‘마틸다’ 이야기…영화·뮤지컬 등 다양하게 이어져 내려와
넷플릭스 ‘피노키오’, 동화 속 순종적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 찾는 어린이로…오늘날 변화된 시선으로 깊이 바라보게 해
영화 ‘마틸다’, 원작보다 ‘거센 분노와 저항’ 설득력 있게 표현…어린이에게 가해진 억압의 무게와 횡포에 공감하게 돼
오늘날 어린이의 손을 피노키오와 마틸다가 잡아준 건 다행…그 손 잡고 10년, 20년 후의 이야기를 또 기다려본다
한 해의 마지막과 시작에는 아무래도 밝은 이야기를 찾게 된다. 지난해 아무리 고단하고 위태로웠다 해도 새해는 좀 더 나으리라는 희망을 꿈꾸게 마련이니 마음속 희망을 북돋울 이야기가 어울린다. 이즈음은 비관주의자도 꿈꾸게 하는 신비로운 시간이다.
어린이가 있는 가족이라면 모처럼 여유 있게 한자리에 모여 다 함께 볼 영화도 한두 편 필요하다. 다가올 시간을 희망찬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고, 가족과 이웃의 소중함을 따뜻이 느끼게 해준다면 더 좋다. 지난해 12월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피노키오>(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와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매튜 워처스 감독)는 이 시기에 맞춰 나온 영화다. 어린이와 어른에게 동시에 안기는 산타의 선물 같은 두 편의 영화는 겨울방학의 ‘어린이 영화’로도, 연말연시의 ‘가족 영화’로도 흥미로웠다.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피노키오’ 이야기는 1940년 발표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이미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지난해 9월 디즈니에서 제작한 실사영화가 공개되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이어 12월에 공개되면서 또다시 주목받는 이야기가 됐다. <마틸다> 또한 1997년에 영화로 제작되고, 2010년에 뮤지컬로 창작되어 익숙한 이야기다.
영화나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꾸준히 재탄생한 두 콘텐츠의 원작은 동화다. <삐노끼오의 모험>(전 2권·까를로 꼴로디·창비·1998)과 <마틸다>(로알드 달·시공주니어·2000)는 각각 1881~1883년 이탈리아에서, 1988년 영국에서 발표된 후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는 아동문학의 고전이다. 무려 140여년 전 창작된 고전과 30여년 전 창작된 현대 아동문학의 정전을 영화와 뮤지컬로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두 동화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여러 장르 형식으로 이야기되는 힘은 뭘까. 2022년의 영화는 원작 동화와 무엇이 같고 다를까. 거기에서는 어린이를 향한 시선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책으로, 그것도 완역본으로 읽은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피노키오는 캐릭터로 더 유명하다. 1940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그렸듯 파란 리본이 달린 노란 셔츠에 빨간 멜빵바지를 입은 꼭두각시 나무 인형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사람이 아닌 나무 인형이니 피노키오의 셔츠와 바지는 나무토막과 관절이 한눈에 드러나게끔 반팔에 반바지다. 뭐니 뭐니 해도 피노키오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거다. 요즘에야 이런 공갈로 어린이를 위협하는 어른도, 이에 속는 어린이도 없겠지만 한때는 종종 사용되던 훈육 방식이었겠다 싶다.
동화 <삐노끼오의 모험>에도 어린이를 공포로 밀어 넣으며 위협하는 장면이 나온다. 학교에 가서 공부하기 싫다며 집을 떠나려는 피노키오에게 귀뚜라미는 “아이들이 자기 부모 말을 안 듣고 아버지 집을 떠나면 큰일 나!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행복할 수 없어. 집을 떠나자마자 곧 크게 후회하게 될 거야”(35면)라고 충고한다. 또 동화는 학교를 빼먹고 ‘장난감 마을’로 가는 어린이들이 당나귀로 변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반면 피노키오의 코가 길어지는 장면은 파란 요정에게 거짓말 했을 때 딱 한 번 나오는데, 이건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교훈을 전한다기보다는 파란 요정의 신비한 능력을 드러내는 데 가깝다.)
140년 전 창작된 이 동화는 이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는 어린이가 되라는 교훈을 분명히 담고 있다. 그럼에도 서른여섯 개 꼭지로 구성된 길고 긴 이야기의 핵심은 <삐노끼오의 모험(Le Avventure di Pinocchio)>이라는 제목처럼 ‘모험’에 있다는 사실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집을 떠난 피노키오는 어른의 보호가 없는 상황에서 금화를 노리는 여우와 고양이에게 속고, 억울하게 감옥과 농장에 갇히고, 파란 요정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등 온갖 역경을 겪다가 결국 상어 배 속에서 만난 아버지와 집으로 돌아온다. ‘집-세계-집’으로 구성되는 모험과 회귀의 서사가 비록 ‘착한 아들’로 귀결된다 해도 ‘착하지 않은 피노키오’가 낯선 세계에서 겪는 모험만은 어린이 독자에게 해방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1886년 발표된 동화로 동시대에 나란히 인기를 끈 <사랑의 학교>(전 3권·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창비·1997)와 비교하면 더 명확해진다. ‘쿠오레(Cuore)’라는 원제로 잘 알려진 이 동화에서 어린이 인물은 근대 교육제도인 학교를 통해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육성될 뿐 피노키오와 같은 개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피노키오처럼 “정말 우리 같은 어린이들은 얼마나 불쌍해! 모두들 우리에게 소리치고 야단치고 훈계만 하잖아”(103면)라고 외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사랑의 학교>는 국민 양성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따라 유명한 작품이 됐지만 <삐노끼오의 모험>만큼 여전히 사랑받지는 못한다. <삐노끼오의 모험>에는 집을 떠나며 시작되는 의외로운 모험과, 모험의 풍랑을 파도타기 하듯 구르는 피노키오의 독특한 캐릭터가 있다. 바로 이것이 피노키오 이야기의 생명력이다.
<삐노끼오의 모험>은 어린이 독자가 흥미로워할 요소 외에 당시의 가난한 현실도 작품 곳곳에 담고 있다. 애초에 목수 제페토가 피노키오를 만든 이유는 생계를 위해서였다. “춤도 추고 칼싸움도 하고 재주넘기도 하는 놀라운 꼭두각시”를 만들어 돌아다니면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컵 정도는 손에 넣을 수 있”(<삐노끼오의 모험 1> 19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피노키오의 이름을 짓는 장면에서도 사회 현실이 풍자적으로 반영된다. “삐노끼오라고 부르면 좋겠군. 이 이름이 이 녀석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야. 예전에 내가 알던 사람들 중에 삐노끼오 가족이 있었어. (중략) 모두들 잘살았어. 그중 구걸을 하는 사람이 제일 잘살았지.”(<삐노끼오의 모험 1> 25면) 제페토는 피노키오가 학교에 갖고 갈 책을 사주지 못할 만큼 가난하고, 그걸 말하는 문장은 슬프다. “명랑한 아이이긴 했지만 삐노끼오 역시 슬퍼졌어요. 정말 가난할 때는 모두 가난이 어떤 건지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랍니다. 어린이들까지 말이에요.”(<삐노끼오의 모험 1> 60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는 이 동화를 어린이가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바꾸었다. 파시즘이 몰아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시간 배경을 옮긴 후 피노키오가 집을 떠나는 일탈과 반항의 여정에 부모, 학교, 국가가 요구하는 어린이상 어디에도 포섭되지 않은 채 스스로 삶을 탐색한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제페토가 전쟁 중 죽은 친아들 카를로를 그리워하며 피노키오에게 그 모습을 따르라고 종용하거나, 학교와 종교에 이르기까지 전 방위의 파시즘 체제가 어린이들을 억압하는 설정은 원작에 없지만 오늘날 시선으로 어린이 존재를 깊이 바라보며 존중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자기 희생으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며 부모와 결합하는 원작의 교훈에서 나아가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피노키오가 늙은 아버지를 돌보는 모습이 아주 잠깐 그려졌다 해도 마찬가지다. 원작 동화에서 푸른 요정은 피노키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며 “가난하고 병든 부모님을 진심으로 돌봐 드리는 아이는 비록 말 잘 듣고 착한 행동을 하는 모범적인 아이가 아니라 해도 항상 많은 칭찬과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거란다”(<삐노끼오의 모험> 168면)고 말한다. 영화와 동화 모두에서 피노키오의 성장은 마치 ‘영 케어러(Young Carer)’처럼 가난하고 늙고 병든 부모를 돌보는 행동으로 대표되고 인정받는다.
<삐노끼오의 모험>으로부터 100년, 현대 동화인 <마틸다>에 등장하는 어린이와 어른의 관계는 다르다. 마틸다는 초능력을 이용해 트런치불 교장의 학대에 맞서며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어린이들, 학대 경험으로 채 어른이 되지 못한 하니 선생님까지 구출한다. 동화의 마지막 장면은 마틸다를 방임하던 부모가 훔친 차를 속여 판 일로 외국으로 도망치려 할 때 마틸다가 이를 거부하고 하니 선생님을 새 양육자로 삼는 데서 끝난다. 부모와 절연한 어린이가 등장하는 동화라니 읽을 때마다 여전히 놀랍다.
데니 드 비토 감독의 1997년작 영화 <마틸다>는 대체로 원작 동화의 서사를 따르면서 마틸다의 천재적인 지능과 초능력을 좀 더 풍성하게 보여주었다. 반면 2010년 제작된 뮤지컬 <마틸다>는 부모와 교장의 행위를 아동학대로 분명히 규정하고 마틸다와 어린이들의 강력한 저항을 노래에 담았다. 동화 <마틸다>가 아닌 뮤지컬 <마틸다>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는 뮤지컬의 해석을 더욱 충실히 강조하고 확장시킨다.
이렇듯 영화 <마틸다>(1997)와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2022)는 어른 대 어린이의 구도와 갈등 해결 방식이 다르기에 영화 곳곳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전자에서 마틸다의 방은 안락하게 꾸며진 공간인 데 비해 후자에서는 창고처럼 어두컴컴한 다락방이다. 방임에 더해 학대받는 마틸다의 삶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또 영화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에서는 뮤지컬 무대 장치로 제한됐던 학교의 공간이 더욱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띤다. 음산한 교실, 감옥 구조의 복도, CCTV 제어실 같은 교장실, 관 모양의 형틀인 ‘처키’까지.
이런 설정으로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에서 마틸다와 어린이들의 거센 저항은 설득력을 지닌다. 1997년 영화에서 마틸다 역할을 맡은 어린이 배우는 부모의 방임에 냉담하고 무표정한 연기로 대응하지만 2022년 영화에서 배우 알리사 위어는 ‘Naughty’(버릇 없는)를 부르며 부모의 학대에 강한 분노를 표출한다. “네 이야기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울 필요 없어. 소리칠 필요 없어. 자꾸 작다면서 물러서면 안 돼. 가만히 앉아 당해주다 보면 똑같을걸. 원래 그런 거라고 참기만 하면 익숙해지고 말걸. 이건 아니야. 바로잡아야 해. 하지만 누구도 대신해 주진 않아. 내 이야기는 내가 바꿔야 해.”(‘Naughty’의 가사 부분) 마틸다는 “똑같이 맞서면 너도 나쁜 사람이 돼”라고 말하는 소리에도 “둘 다 나빴지만 좋은 일로 끝난다면 그건 좋은 거”라는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뮤지컬 영화 초반에서 마틸다의 캐릭터와 연기는 어른 관객이 마틸다를 사랑스럽게 바라볼 여지를 일부러 남기지 않으려는 듯 냉정하고 전투적이다.
그러다가 가정과 학교에서의 학대가 점점 심해지고 교문을 나선 어린이들이 모터사이클과 버스와 비행기를 몰며 환하고 자유롭게 ‘When I Grow up(내가 어른이 되면)’을 부르는 장면에서는 어린이에게 가해진 억압의 무게와 횡포를 한없이 공감하게 된다. 트런치불 교장에게 대항하는 찰나, 폭발할 것 같던 마틸다가 갑자기 구름 위로 오르며 ‘Quiet(침묵)’를 노래하는 목소리에는 학대당한 어린이의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Revolting Children(반항하는 어린이)’을 선창하는 인물이 다름 아니라 ‘처키’에 갇혔던 부르스이기에 붉은 깃발을 흔들며 동상을 무너뜨리는 어린이들의 노래는 혁명이 된다.
예전 동화가 오늘날 새로운 장르로 만들어질 때 예전과는 다른 어린이상이 반영된다.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피노키오, 어린이의 연대로 학대에 단호히 맞서는 마틸다에게는 오늘의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변화된 시선이 담겨 있다. 눈앞의 세계는 약간의 변화도 허용하지 않으며 버티고 서 있는 듯하지만 조금 더 긴 시간에서 바라보면 분명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걸어온 길이 있다. 오늘날 어린이의 두 손을 피노키오와 마틸다가 붙잡아 준다는 건 얼마나 다행하고 복된 일인지. 그 손을 맞잡고 10년 후, 20년 후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또 기다려본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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