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연하장에 쓰인 ‘칠곡할매글꼴’ 역사의 기록으로

김현수 기자 2023. 1. 2.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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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안자 할머니가 2020년 12월 자신의 집에서 ‘칠곡할매글꼴’ 제작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북 칠곡군 제공
‘권안자체’ 권안자 할머니
“꼬부랑 글씬데…깜짝 놀라”
칠곡군 선정한 5명의 글꼴
4개월간 종이 2000장 연습
한컴·MS 오피스 정식 탑재

“대통령이 내 글자로 연하장 썼다 캐가(그래서) 깜짝 놀랐지요. 내는 배운 거 하나 없는 할맨(할머니)데….”

경북 칠곡에 사는 권안자 할머니(79)는 윤석열 대통령이 새해를 맞아 각계 원로와 주요 인사 등에게 보낸 신년 연하장이 자신의 글씨체로 쓰였다는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권 할머니는 시골 할머니 5명의 손글씨로 만든 ‘칠곡할매글꼴’ 중 권안자체의 원작자다.

칠곡할매글꼴로 작성한 윤석열 대통령의 연하장. 경북 칠곡군 제공

윤 대통령의 연하장에는 새해 인사와 함께 ‘위 서체는 76세 늦은 나이에 경북 칠곡군 한글교실에서 글씨를 배우신 권안자 어르신의 서체로 제작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칠곡할매글꼴은 2020년 12월 제작됐다. 당시 칠곡군은 성인문해교실에서 공부한 할머니들의 글씨 400개 중 5개를 뽑았는데, 이때 선정된 사람이 권 할머니와 김영분(77)·이원순(86)·이종희(81)·추유을 할머니(89)다. 각 할머니 이름이 글꼴명이 됐다.

열 살이 되던 해에 부모를 잃었다는 권 할머니는 초등학교도 다닐 수 없었다고 했다. 남의 집을 돌아다니며 식모살이를 한 탓에 글을 배운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가 많이 아프셨는데, 철없이 학교를 보내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어 “글을 몰라 남들에게 무시도 많이 당했다”면서 “그럴 때마다 서러웠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렇게 배움이 한이 됐던 권 할머니는 2017년 칠곡군의 성인문해교실에서 한을 풀었다. 학교에서 내주는 편지쓰기와 시쓰기 등 숙제를 한 번도 미룬 적 없었다.

칠곡할매글꼴의 원작자들이 자신의 글씨체가 쓰인 손팻말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권안자·이원순·추유을·김영분·이종희 할머니. 경북 칠곡군 제공

할머니들의 글꼴은 지난해 한컴오피스와 MS오피스 프로그램에 정식 탑재됐다. 경주 황리단길은 칠곡할매글꼴로 제작한 대형 글판을 내걸었고, 국내 최초의 한글 전용 박물관은 칠곡할매글꼴로 제작한 표구를 상설 전시하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칠곡할매글꼴을 휴대용 저장장치(USB)에 담아 유물로 영구 보존했다.

할머니들은 이 글꼴을 만들기 위해 4개월간 각각 2000장에 이르는 종이에 손수 글씨를 써가며 연습했다. 특히 알파벳이 할머니들에게 익숙하지 않아 강사들의 손을 잡고 그림 그리듯 글자를 그려내면서 작업했다고 한다. 알파벳 하나를 쓰는 데 A4용지 10장을 빼곡하게 채웠고, 획의 굵기를 일정하게 하려 네임펜을 썼는데 7~8개씩 펜을 다 쓸 정도로 연습량이 많았다.

권 할머니는 “하도 꼬부랑 글씨라서 선생님 따라 그림 그린다 생각하고 그렸다”며 “글씨는 하나도 안 이쁜데 내가 왜 뽑혔나 모르겠다”고 멋쩍어했다. 그는 “날마다 내 생각을 글로 쓰니까 얼마나 좋아. 이자뿌지도(잊어버리지도) 않고”라며 뿌듯해했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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