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생환 광부’ 박정하씨 “새해엔 대한민국 안전망 튼튼해지도록 뭘 고쳐야 할지 목소리 낼 것”
광산 사고 이어 이태원 참사
“안전망 강화해 반복 막아야
참사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
트라우마센터 도움 권하기도
“새해에는 대한민국의 안전망이 더욱더 촘촘해져 소중한 가족을 잃는 사고가 없어지기 바랍니다.”
경북 봉화 광산 매몰사고 생환 광부 박정하씨(63)의 신년소망이다. 지난 1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 폐광근로자협의회 사무실에서 ‘기적의 생환자’ 박씨를 만났다. 한 방송국 촬영 일정을 마친 직후였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그의 눈에는 생기가 서려 강인한 인상을 뿜어냈다. 지하 190m에서 지하수를 마시며 지옥과도 같았던 221시간을 버텨내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이 요행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박씨는 이곳에서 폐광으로 실직된 광부의 일자리를 찾아주고 있다. 2004년 국내 민영 탄광 가운데 생산 규모가 가장 큰 동원탄좌가 문을 닫을 당시 직장을 잃은 광부들을 돕기 위해 박씨 등이 폐광근로자협의회를 결성했다.
동원탄좌가 폐광되고 들어선 강원랜드에는 박씨 등의 도움을 받아 제설·제초, 도로 청소 등으로 일하는 광부만 220여명에 달한다. 박씨는 봉화 광산에서 4년 전부터 일을 시작했다가 지난해 매몰사고를 당했다.
기적처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순간, 그는 이태원 참사라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그가 신년소망으로 대한민국의 안전 시스템이 더욱 강화되기를 바라는 이유다.
박씨는 “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지만, 지난해 사고 현장에서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분들이 많다”며 “안전점검을 강화해 소중한 가족을 잃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다시는 반복되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광산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남은 시간을 쓰기로 했다. 그것이 자신을 구해준 동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박씨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는 지금도 광산은 1980년대 초반의 채굴 방식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며 “내가 겪은 사고도 안전조치가 충분히 이뤄졌다면 예방할 수 있었던 사고였다. 더는 이런 끔찍한 사고를 동료들이 겪지 않도록 (안전 관련) 목소리를 내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인한 성품의 박씨도 사고 당시 트라우마는 쉽게 벗어던지지 못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다. 그는 “자려고 눈을 감고 있으면 환청이 들린다”며 “잠을 자다가도 새벽 3시 전에는 깬다. 아직도 갱도 안에 갇혀 있는 악몽을 꾼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주치의가 언론 인터뷰 자제를 부탁했다고 한다. 사고 상황을 계속 떠올리는 것이 심리치료에 좋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그런데도 그는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는다.
박씨는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국민적 관심을 받는) 내가 말해야 조금이라도 개선되지 않겠느냐”며 “광산노동자 모두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라고 밝혔다.
트라우마를 직접 겪고 있는 그는 참사 현장에 남겨진 유가족이 겪는 고통을 누구보다 절절히 느낀다고 했다.
포항 지하주차장 참사 유가족 중 일부가 알코올의존증으로 병원 생활을 이어간다는 소식에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면서도 국내에 다양한 트라우마센터를 이용해볼 것을 권했다.
그는 “국립산림치유원에서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을 받았는데 매우 유익했다”며 “맨발로 숲길을 걷고 명상을 하면서 마음 속의 상처가 치유되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와 생일이 두 개라는 동료의 우스갯소리를 듣는 그는 올해 가족들과 2박3일 경북 울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안전모에 달린 랜턴 배터리가 소진돼 칠흑 같은 암흑이 찾아오면서 이제 정말 죽겠다는 생각이 들자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껴서다.
박씨는 “하느님도 안 믿고 절에는 어쩌다 한 번씩만 가지만, 그 사람들(신)이 있다면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 1~2분의 시간만 달라고 간절하게 빌게 되더라”며 멋쩍게 웃었다.
이어 “우리 나이대는 아버지들이 일이 바빠 가족과 여행 가는 걸 본 적이 없다보니 나도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 앞에 서보니 가족만큼 중요한 게 없더라”고 했다.
끝으로 그는 정부에 모든 노동자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작업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안전관리를 업체에 맡겨만 두지 말고, 실질적인 점검을 통해 실효성을 갖춰야 한다는 소리다.
박씨는 “산업부에서 안전실태조사를 나온다고 하면 막말로 갱도 내 청소만 해둔다”며 “안전과 관련해 실질적인 점검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적 점검이 어디 광산뿐이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위험해 보일 때는 일을 나가지 않고 안전상황을 점검했으면 한다”며 “너무 단순하고 상식적인 바람인데 이게 아직도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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