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도 야당도 대통령도…‘우리 편’만 봤다[극단의 한국 정치]
‘실종된 정치’ 복원, 진영 밖으로 나와야
윤석열 정부 첫해 ‘협치’ 사라져
팬덤 넘어서야…선거제 개선도
“분열과 분노의 정치를 끝내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된 직후 이렇게 말했다. “정치 때문에 현실은 오히려 악화일로를 걷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대표가 되고 이렇게 말했다. “거울을 들여다봅시다. 저는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첫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치가 문제 해결의 도구가 아닌 ‘문제 자체’가 됐다는 자성에는 진영도 여야도 없었다. 정치가 회복돼야 한다는 다짐의 말도 넘쳤다. 문제는 그 이후다. ‘다짐과 자성’ 이후 정치가 뒤따라오지 않았다. 대통령의 국정 우선순위에선 통합과 협치가 빠졌고, 거대 양당은 극한 충돌을 이어갔다. 양 끝으로 내달린 극단의 정치는 ‘정치 실종’으로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 출범 첫해인 2022년 시민들은 정치 실종의 목격자였다.
정치 실종의 대가는 정책 다양성 훼손, 여론의 방지턱 실종으로 나타났다. 혐오의 정치가 국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차별금지법 등 혐오 극복을 위한 정책은 사라졌다. 극단적 정치가 광장의 극단적 언어를 부추기고, 수위를 높인 언어를 다시 제도권 정치가 받는 악순환이 강화됐다.
계묘년 새해를 맞아 현장 정치인들에게 다시 물었다. ‘극단적 정치는 누가 만들었나’, ‘왜 대결 정치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나’, ‘정치인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진단은 근본적인 데 미쳤고, 자성은 여야를 가리지 않았으며, 다짐은 명확했다. 강성 지지자를 바라보는 팬덤정치와 진영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 그 바닥에 깔린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문제 등이 고루 언급됐다. 누구는 “오래 정치한 사람으로서 죄송하다”고 했고, 다른 이는 대통령의 인사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했다. 자성과 함께 제도 변화에 힘을 보태겠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문제는 다짐과 자성 그 이후의 정치다. 윤석열 정부 집권 2년차인 올해는 3대 개혁 논쟁과 엄중해진 경제·안보 위기로 정국 뇌관이 곳곳에 도사린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게임의 룰’을 정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현안에 도사린 뇌관을 해체하고 진영 정치의 틀을 해체하는 답을 도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제 막 닻을 올린 2023년은 정치 회복의 해로 기억될 수 있을까. 극단을 걷는 한국 정치의 현실과 극복 가능성에 대해 3회에 걸쳐 진단한다.
① 실종된 협치
정치 실종, 양당 체제·팬덤정치보다
협치 잊은 대통령·정치권이 큰 영향
여소야대에 ‘타협이 답’ 진단하고도
“발목잡기” “큰 여당 돼야” 대결의 길
정치 실종의 원인은 하나로 말할 수 없다. 뿌리 깊은 양당 체제, 그로 인한 진영 대결, 일상화된 팬덤정치, 건강하지 않은 당정관계 등이 모두 현재 정치 실종을 설명하는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정치 복원의 돌파구가 막힌 것은 일차적으로 협치를 잊은 대통령과 정치권의 합작품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대결 정치를 반복하는 사이 정치 복원이라는 해묵은 과제는 한 해 더 묵은 과제, 한국 정치의 난제는 한 번 더 꼬인 난제가 됐다.
현장의 여야 정치인들이 내놓은 해법은 진영 정치의 변화와 함께 ‘판을 바꿔야 한다’는 데로 모아졌다. 대결 정치가 극한으로 치닫는 와중에 당사자로서 제동을 걸지 못했다는 자성과 변화의 다짐이 뒤따랐다. “몇 사람의 바람으로 되지 않는 일” “혼자 바꿀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도 토로했다. 수십 년간 한국 사회가 쌓아온 민주주의 운영원리를 재확인하고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만드는 일이 모두의 과제로 부상했다.
협치 잊은 대통령, 핑계가 된 여소야대
대통령의 정치는 크게 인사와 메시지, 일정으로 표면화한다. 국정운영 철학과 실현 전략은 결국 국정 파트너로 누구를 앉히고, 누구와 만나 무엇을 말하느냐로 표출된다. 세 가지 기준에 맞춰보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우선순위에 통합과 협치는 포함되지 않는 것이 명확해진다.
메시지가 집약되는 대통령 연설은 ‘협치 실종사’에 가까웠다. 국내 이슈를 다룬 ‘정치인 윤석열’의 10대 연설을 살펴보면 이 같은 경향이 뚜렷하다. 국내 이슈 10대 연설로는 2021년 6월 정치참여 선언부터 당 후보 수락 연설, 대통령 당선 연설, 취임사를 거쳐 두 차례의 국회 시정연설과 5·18민주화운동 기념사, 광복절 경축사와 취임 100일 회견 연설, 그리고 지난 1일 신년사를 꼽을 수 있다. 취임 전후 등장한 ‘통합과 협치’ 메시지는 취임 첫 달 이후 사실상 지워졌다. 지난해 5월16일 추경 시정연설에서 의회주의자를 자처하고, 5·18 기념사에서 “오월의 정신은 국민 통합의 주춧돌”이라며 야권과 거리를 좁혔으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자유와 함께 핵심 국정철학이 된 연대를 거듭 말했지만 그 대상과 범위는 한정됐다. 인사에선 요직의 검찰 편중, 편향 인사 등으로 다양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야당 지도부와의 만남은 취임 237일째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역대 정부에 비춰보면 이례적으로 늦다.
여소야대는 정치 활성화가 아닌 정치 실종의 구실로 작용했다. 정부 권력과 의회 권력이 엇갈린 현실을 두고 ‘타협과 협치 외 답이 없다’는 진단은 정부 초반부터 나왔다. 하지만 정치권은 대화와 타협의 길 대신 대결을 택했다. 대통령이 직접 “야당의 발목잡기”를 말했고, 여당 원내대표는 “빨리 다수 여당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국정운영에 무한책임을 지는 여권의 ‘협치 실패’ 고백에 가깝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대통령은 평소 국정에서 국회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많이 하는데 여야 경색 국면이 정리되면 협치 모델을 찾지 않겠나”라며 “대통령이 현재의 정치 제도와 시스템에 경험이 적은 것이 오히려 (정치 변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 오래 발 담은 다른 관계자는 대통령이 인사 부문에서 정치 복원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진영 내 비판적 세력에도 손을 내밀어야 하고 다음 개각에서 야당 추천을 받아서 2~3명 정도는 탕평 내각을 만들어야 한다”며 “(윤 대통령이) 기존 정치에서 홀가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아닌가”라고 말했다.
“지지자에게 욕먹더라도 양보 필요”
정파 매몰됐던 정치인들 자성 목소리
“선거제 개혁 등 판 자체도 바뀌어야”
여야 정치인들의 자성과 진단은
대결 정치의 한복판에 있었던 여야 정치인들의 진단은 외부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한 여당 중진 A의원은 “정치는 사법으로 회복하지 못하는 것을 치유하는 수단인데 정치가 불신받는 현실에 비애가 깊다”면서 “결국 정치인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대각성,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성 지지자를 바라보는 진영 정치, 팬덤정치에 대한 문제의식이 여야에서 고루 나왔다. 야당 재선 B의원은 2일 “여야 할 것 없이 팬덤정치에 휘몰린 게 제일 큰 문제”라며 “대의정치에서 중요한 대화와 타협이 실종되고 모든 것이 프레임 전쟁화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여당 중진 C의원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너무 지지층만 바라보고 정치를 한다”면서 “지지자에게 욕을 좀 먹더라도 바람직한 방향이면 양보하고 타협하고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극단적인 진영 정치가 전 세계적인 혐오 확산 흐름과 맞물려 강화됐다는 분석도 있었다. 야당 중진 D의원은 “합리적이던 여당 의원들도 막말 의원에 등극하는 모습을 봤다”면서 “진영논리에서는 막말이 다 용서가 되지 않나. 진영 사람들이 흡족할 때까지 말하니 (정치에서도) 혐오의 범위가 넓어졌다”고 말했다. 여당 재선 E의원은 “진영논리 구조에서는 진짜 훌륭한 사람들이 국회에 와도 한 달이면 (망가진다)”고 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차례로 전당대회에서 당심 반영 비율을 높인 점을 두고는 ‘민심과 당심의 괴리’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 양쪽에서 제기됐다. 한 여당 의원은 “대통령제와 양당 체제에서 정당은 모든 정치 수요자의 요구를 담아야 하는데 팬덤에 의존하면 어떻게든 정당을 지배할 수 있으니 소수 지분으로 당을 장악하고 그때부터는 그게 국민 목소리의 절반인 것처럼 한다”고 했다.
여야 정치인들은 대결 정치의 가까운 목격자이자 당사자다. 이 때문에 자신도 대결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성이 적지 않았다. 진영 정치가 의원들의 발언 범위를 제한하고, 현장 의원들의 침묵이 다시 진영 정치를 격화하는 악순환이다. B의원은 “후회되는 것 중 하나는 조국 법무부 장관이 될 때 잘못된 인사라고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것”이라며 “이 사건으로 민주당이 가졌던 공정의 가치가 깨졌는데 얘기를 못하면서 그 가치를 윤석열 후보가 가져가버렸다. 자성하는 정당이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E의원은 “(나도 대결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고 매번 그렇다”면서 “초선 때 상임위원회에서 야당이 (박근혜) 청와대를 공격할 때 엄청 방어했는데 그때는 청와대는 우리가 무조건 지켜야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제도 개편으로 모아지는 해법…“판 바꿔야”
해법은 결국 진영 정치를 깨는 정치개혁으로 모아졌다. 의원 개개인의 자성과 함께 권력을 분산하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현행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로 바꾸는 안을 두고는 의견이 갈렸지만, 현행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했다.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제는 양당 체제를 공고히 하고 다양한 민의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윤 대통령이 2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를 거론한 것도 총선을 앞두고 국회에서 관련 논의를 촉발할 요인으로 꼽힌다.
A의원은 “세모 틀에 빵을 찍으면 세모 빵이 나오고 둥근 틀에 빵을 찍으면 둥근 빵이 나오는 게 이치인데 현 선거제도는 정치인을 정당 공천에 매달리게 만든다”고 말했다. D의원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통합해내는 민주주의적 문화를 만들려면 정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선거제 개혁과 개헌이 큰 틀에서 필수적”이라고 했다. 선거제도에서 나아가 “대통령을 먹으면 다 먹는 구조를 없애야 한다”(E의원)는 권력구조 개편 이야기도 나왔다.
양당 체제와 소선거구제 개편은 총선 한 해 전이 되면 정치권에 등장하는 주요 화두다. 승자독식 제도의 승자가 거대 양당인 데다, 거대 양당이 제도 변화의 칼을 쥐고 있어 그간 논의가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이번에도 ‘당위’를 떠나 실현 가능성에는 물음표가 제기된다. 여야 의원들은 결국 국민적 압력이 개혁을 추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제도 개편과 별개로 대결 정치 한복판에 있는 정치인 스스로의 변화도 중요하다. 여야 정치인들은 “분열과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을 이뤄내기 위해 정치하면서 고민하고 노력하겠다” “나부터 상식과 합리에 기초해서 정치하겠다” “정파적 이해를 떠난 의제를 발굴하고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약속이 지켜질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여야 정치인들의 ‘정치 실종’에 대한 자성과 다짐
여당 중진 A의원
“정치가 극단화하고 정파적으로 흐르면서 발끝만 보고 걷는 형국이다. 세모 틀에 빵을 찍으면 세모 빵이 나오고 둥근 틀에 찍으면 둥근 빵이 나오는 게 자명한데 현 선거제는 정치인들이 정당 공천에 매달리게 만든다.”
야당 재선 B의원
“여야 없이 팬덤정치에 휘몰린 게 문제다. 모든 것이 프레임 전쟁화됐고 오랫동안 그래왔다. 당내 통합도 제대로 못하면서 여야 통합정치가 되겠나. 정당개혁 그리고 승자독식 선거제도 완화가 결국 중요하다.”
여당 중진 C의원
“우려스러울 만큼 사회가 양분됐다. 우리 당도, 민주당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측만 바라보고 정치한다. 당내서도 의견이 다르면 잘 만나지도 않는 것 같다. 조정하고 대화하고, 내가 가진 여건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보겠다.”
야당 중진 D의원
“합리적인 사람도 막말하는 의원이 된다. 정쟁 얘기를 하다보면 나도 그렇게 보이나 싶어 무서워진다. 정치가 극단으로 가고 사회도 갈등이 극단으로 가고 있다. 결국 개헌과 선거법, 정치관계법 개혁이 필수다.”
여당 재선 E의원
“진영 논리로 상대를 없어져야 할 존재로 보기 때문에 서로 상대방 진지를 파괴시킨다. 비아냥이 일상화됐다. 대통령을 먹으면 다 먹는 구조를 없애야 한다. 나부터 상식과 합리에 기초해서 국민 눈높이에서 정치하겠다.”
유정인·김윤나영·유설희·문광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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