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다른 연기 달인들 예술 넘어 인생을 논하다

이강은 2023. 1. 2.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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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레드’서 화가 마크 로스코 役 맡은 유동근·정보석
30여년 만에 무대 서는 유동근
“이번 연극은 첫아이 탄생 같은 작품
대사 좋고, 대본 자체가 고전 미술사
정보석씨 로스코 연기 멋지고 부러워”
세 번째 무대 오르는 정보석
“처음엔 로스코 예술적 고민에 애먹어
허점 용납 않고 철저한 예술가로 접근
처음 본 선배 연기에 감탄… 명불허전”
마크 로스코(1903∼1970).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0살 때 부모를 따라 이주한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다. 거대한 캔버스에 몇 가지 단순한 색채를 모호한 경계로 그려 인간 본연의 복잡한 감정이나 비극을 표현한 작품 세계가 특징이다. 1958년, 뉴욕 시그램 빌딩 내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에 걸릴 벽화를 의뢰받아 40여점 작품을 완성한 뒤 돌연 계약을 파기하고 계약금을 돌려준 일화도 유명하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의 설문조사에서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 있다는 관람객 중 70%가 ‘마크 로스코의 그림들 때문이었다’고 답할 만큼 감동적인 걸작을 많이 남긴 그는 작업실에서 스스로 비극적인 죽음을 택했다. 이야기꾼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스토리를 가진 인물인 셈이다.
연극 ‘레드’는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마크 로스코가 가상의 조수 켄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예술과 인간 삶의 본질 등을 짚는다. 로스코 역을 맡아 30여년 만에 무대에 서는 유동근(오른쪽)과 같은 역할로 세 번째 출연하는 정보석의 공연 모습. 신시컴퍼니 제공
미국 극작가 존 로건이 이 위대한 화가를 무대에서 되살린 게 연극 ‘레드’다. ‘시그램 빌딩 벽화’ 일화를 재구성한 연극으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작업실에서 로스코가 가상 인물인 조수 ‘켄’과 벽화 작업을 하면서 논쟁하는 2인극이다. 도도한 자의식에 사로잡혀 새로운 흐름을 거부하는 로스코와 그의 편협함과 닫힌 사상을 당돌하게 꼬집는 켄은 각각 구세대와 신세대를 상징한다. 신구 세대의 가치관 차이에 따른 불통과 대립이 빚는 치열한 논쟁 속에서 예술과 인간 삶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작품이다. 200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뒤 이듬해 미국 브로드웨이로 건너가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으며 최고 권위의 토니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휩쓸었다.
국내에서도 2011년 초연 이후 줄곧 95% 안팎의 높은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지난달 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여섯 번째 시즌 공연이 시작됐다. 이번 공연에선 30여년 만에 무대에 서는 유동근(66)과 2015·2019년에 이어 세 번째 출연하는 정보석(61)이 보여주는 로스코가 어떨지 특히 관심을 끈다. 유동근은 지난달 28일 언론을 대상으로 일부 장면 시연 후 열린 간담회에서 “너무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만큼 사실 모든 게 첫 경험”이라며 “이번 연극은 제게 첫아이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어, 굉장히 의미 있고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1980년대 민중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해 엘칸토 소극장에서 성장 발판을 다진 그는 이후 무대를 떠나 30년 넘게 TV 드라마를 중심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만큼 어색하고 긴장할 수도 있는 무대라 다른 배우들보다 3주 먼저 연습에 들어갔다고 한 유동근은 2019년 정보석이 나온 ‘레드’를 관람한 게 출연 계기가 됐다고. “정보석씨가 너무 멋있었어요. 마크 로스코가 객석에 던져준 그 매력에 흠뻑 취했죠. 대사가 참 좋았고, 호기심이 생겼어요.” 이날 켄 역의 연준석과 호흡을 맞춰 시연한 그는 “이 연극은 대본 자체가 하나의 고전 미술사(史)와도 같다. 개인적으로 제겐 큰 산맥 같은 작품”이라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연극 ‘레드’에서 로스코 역할로 출연하는 정보석이 켄 역의 연준석과 공연하는 모습. 신시컴퍼니 제공
켄 역의 강승호와 시연한 정보석도 “배우로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깨우치게 하고 자극하는 작품”이라고 애정을 내비쳤다. 이어 “처음 작품을 했을 땐 이 사람(로스코)의 예술적 고민을 따라갈 수 없어 너무 힘들었는데 이젠 (연기할 때) ‘로스코가 이런 고민을 했겠구나’ 하는 마음을 느끼며 무대에 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으로 ‘예술을 소재로 인생을 이야기하는 점’을 꼽았다. “우리는 살면서 내 진리가 영원할 거라는 착각에 빠지곤 해요. 과거를 통해 새로운 걸 만들어냈다면 나 역시 과거가 될 거라는 각오가 서야 하는데, 이를 망각한다는 걸 (‘레드’가) 보여주죠.”
두 사람은 그동안 역할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연습도 겹치지 않게 하느라 서로의 연기를 시연회 전까지 못 봤을 정도다. 정보석이 “오늘 처음 형님의 연기를 봤는데 묘하게 빠져들었다”며 “‘그사이 자기 객관화를 통해 이런 로스코를 만들어냈구나’ 감탄하며 봤다. 역시 명불허전”이라고 치켜세우자 유동근은 “정보석씨가 하는 로스코는 참 멋스럽고 부럽다”고 화답했다.
어떤 역할도 맞춤옷을 입은 듯 소화해내는 연기 달인들답게 각자만의 로스코를 빚었다. 유동근의 로스코는 거칠면서도 ‘인간적’이다. “삶의 희로애락이 큰데, 비극에 너무 치우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보석의 로스코는 치밀하면서도 ‘신경질적’이다. “조금의 허점도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철저한 예술가로 접근했습니다.” 다음달 19일까지 공연.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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