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첫차 시간
새벽 공기를 가르며 도시의 하루를 여는 사람들. 첫차 손님들은 대개 변두리에 살면서 도심으로 출근하는 청소·경비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이른 출근에 처음 주목한 사람은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다. 노 의원은 2012년 10월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 연설 때 서울 구로에서 강남까지 가는 6411번 버스 첫차에 탄 사람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진보 정치가 들어야 할 목소리, 지향해야 할 바를 분명히 한 명연설이었다.
당시 노 의원이 한 승객에게 “제일 힘드신 게 뭐예요?”라고 물었다. “힘든 거는 저기 아침에 버스 타는 게 힘들죠.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여기서 많이 시달리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꾸지만, 첫차를 이용해본 적 없던 많은 사람들이 ‘노회찬 정신’을 예찬하며 이 사례를 자주 인용했다.
뜻밖에도 이 대화를 한덕수 국무총리가 주목했던 모양이다. 한 총리는 2023년 첫 출근일인 2일 오전 4시5분 서울 상계에서 강남으로 가는 146번 버스 첫차에서 승객들을 만났다. 평소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 없는 고관대작이 현장에 나가 시민들의 삶을 체감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놀라운 것은 한 총리가 단 한번의 현장 방문에서 성과를 도출해냈다는 점이다. 승객들이 늘 시간에 쫓긴다며 첫차 시간을 10~15분 당겨달라고 하자, 한 총리는 “안 그래도 서울시와 협의했다”며 해결을 약속했다. 놀라운 반응성이요, 생산성과 효율을 강조해온 경제관료 출신답다. 총리실 설명을 보면, 민원에 대한 관계기관 논의를 마친 뒤 총리 현장 방문이 이뤄진 듯하다. 정부의 근로시간 확대 방침을 뒷받침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묻고 싶다. 첫차 시간을 앞당기게 되면 결국 더 많은 노동자가 과로하는 사회로 가게 된다는 점은 생각하지 않는가. 과연 더 일찍 출발하는 버스가 없어서 첫차 타는 시민들의 삶이 이토록 고달픈 것인가. 새벽 4시5분 차를 타고 출근해도 시간에 쫓겨 일해야 하는 사회는 건강한가. 진보 정치의 과제는 ‘첫차 시간 앞당기기’ 식으로만 작동하려는 관료적 상상력을 넘어서는 데 있을 것이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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