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 위에 놓여 있는 대한민국의 ‘사법적 정책 결정’
한국의 사법부가 정책행위자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기초적인 양태에 관한 분석부터 미진하다. 여기에 국가의 주요 정책 결정이나 사회적 현안에 최종 판단이 사법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사법적 개입의 확대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에 대해 과연 어느 선까지 사법적 판단에 맡길 수 있는가도 짚어봐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라도 합법성을 결여해서는 존속할 수도, 성공할 수도 없다.”(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
국가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의 삶에 촘촘히 개입하는 현대 복지국가에서 많은 법은 정책의 산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정책은 그 법이 부여하는 합법성의 틀에 구속된다. 그렇다면 정책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통제하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사법부다. 정책이 법에 근거해 적법하게 제대로 실행되는지, 기본권 보호라는 헌법 정신에 부합하는지 등의 여부를 가리고 판단하는 결정자가 사법부인 셈이다.
대법원과 각급 법원, 헌법재판소의 ‘사법적 정책 결정’은 정부와 공공기관의 행정행위를 통제하거나 구속하며, 때로는 정부의 정책방향을 바꾸거나 새롭게 세운다. 사법부는 판결이나 심판 등을 통해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에서 ‘정책행위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사법의 역할은 세간의 통념과는 다른 모습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법원은 도둑질하거나 끔찍한 일을 저지른 범죄자에게 죗값을 내리는 심판자로서 이미지가 크다. 따라서 정책과는 무관한 곳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법부는 한때 검찰과 경찰처럼 ‘권력의 시녀’였던 흑역사가 있지만, 민주화 이후 위상과 의미가 확연히 달라졌다. 법원으로 넘어오는 사건을 처리하는 소극적인 역할을 넘어 입헌 민주국가의 핵심기관으로서 정치와 정책과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극적인 ‘최종심판자’로서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다.
여기엔 몇가지 배경이 두루 작용한다.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지를 심사하는 사법심사(위헌심사)제 도입과 민주화 이후 사법부의 독립성 확대, 각종 시민단체의 공익소송 및 고소·고발 증대 등이 대표적이다. 디지털 전환에 따른 플랫폼 노동의 증가 등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정책적 성격의 법률 입법이 늘어난 데다, 시민권의 기본권 의식이 확산한 데 따른 관련 소송이 많아진 까닭도 클 것이다. 근래 들어서는 특히 “굵직한 정치적 사회적 갈등 사안들이 종국엔 법원으로 넘어가 해결되는 경향이 부쩍 늘어나는”(박은정 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사법권력의 부상과 확대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정치의 사법화는 사법지배주의를 낳거나 ‘민주주의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우려를 낳지만, 사실 그 뿌리는 사법보다 의회의 비효율과 정당정치의 지리멸렬 그리고 정치적 양극화 등 정치 문제에 기인한다. 정부의 책임능력 감퇴와 불투명한 의사결정 절차 등도 이를 부채질했다.
명백한 것은 이런 배경 속에서 사법부는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한민국 정치과정과 정책생태계에서 정책을 조정하고 심판하고, 때로는 형성케 하는 중요한 정책행위자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사법의 이런 역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대통령 탄핵 심판과 행정수도 이전 사건, 토지공개념 입법 위헌 결정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는 국민의힘 내분 과정에서 주호영 전 비대위원장의 직무정지 결정을 내리는 등 정치 분쟁에서도 최종결정자로서 존재감을 선보였다.
사회정책 분야에서는 산업재해와 노동자로서 기본권 관련한 사법적 결정이 부쩍 증가해, 현대 복지국가의 적극적 정책행위자로서 사법부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출퇴근 재해 때 산재보상 범위를 둘러싼 논의가 대표적이다. 지난 2003년 3월 ㄱ씨는 자가용으로 출근 중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 근로복지공단은 ‘ㄱ씨 사망은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산재보상을 거부했고, 이에 그 부인이 공단을 상대로 처분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1심과 2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당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에는 업무상 재해를 정의할 뿐 구체적 규정이 없었고, 출퇴근 때 교통사고를 당했을 경우엔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다는 이 법의 시행규칙(35조) 때문이었다. 문제는 같은 사고 때도 공무원에게는 법 적용이 달랐다는 점이다.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제14조)에는 출퇴근 재해를 공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는데, 2007년 대법원은 법조문 문언 그대로 해석해 “특별한 규정을 따로 두고 있지 않은 이상, 근로자가 선택한 출퇴근 방법과 경로의 선택이 통상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출퇴근 중에 발생한 재해가 업무상 재해로 될 수는 없다”고 1, 2심과 마찬가지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에 김능환·김영란·김지형·박시환·전수안 대법관은 출퇴근 때 교통사고에 일반인은 보상이 안 되고, 공무원은 보상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 “출퇴근 행위는 노동자가 근로를 위해 주거지와 근무지를 왕복하는 필수적인 반복행위로서 사실상 사업주에 종속돼 있다”며 다수의견을 반박하는 소수의견을 냈다. 김지형 전 대법관(현 법무법인 지평)의 비유에 따르면, 대법원 판결(다수의견 ) 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공무원과 사기업체 직원이 출근길에 카풀해 한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공무원은 산재보상을 받고, 사기업체 직원은 못 받는다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말 그대로 소수의견에 머물러야 했다.
대법원 판결은 명백하게 차별을 정당화한 것이었다. 이 판결 뒤 국회와 행정부는 소수의견의 지적과 반대로 다수의견의 판결문을 인용해 산재보험법 제37조의 업무상 재해보상 범위를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 이용한 출퇴근 중 발생한 사고”로 명문화하는 퇴행적 행위를 벌인다. “사회보장 입법에 있어서 불평등 구조를 노골화한 것”(김복기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었다.
그 결과 2011년 11월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다가 넘어지면서 버스 뒷바퀴에 왼손이 깔려 왼손 둘째, 셋째 손가락이 부러지는 상처를 입은 ㄴ씨가 산재보험법의 요양급여를 신청했지만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지 못하는 등 과거와 비슷한 판결이 이어졌다.
ㄴ씨는 문제의 산재보험법 제37조(제1항 제1호 다목)에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며 사건을 헌재로 끌고 갔다. 헌재는 2016년 9월 문제의 조항이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이 사안과 관련한 법적인 논란은 일단락됐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적절한 개선 입법을 마련하지 못하며 주저하는 사이, 결국 이 논란은 헌법상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헌재의 결정으로 비로소 종식된 것”(허용창 선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이다.
결국 국회는 이듬해인 2017년 10월 자가용 등으로 출퇴근하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등 출퇴근 재해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하는 산재보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렇듯 사법부는 심판이나 판결을 통해 입법부의 입법 실패나 행정부의 행정 실패를 유지하게 하거나 교정함으로써 행정부 정책을 유지 또는 변경, 나아가 국회의 법 개정을 끌어내는 중요한 정책행위자로 기능한다.
문제는 정책행위자로서 사법부 역할은 나날이 커지지만, 그에 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논의 수준은 극히 빈약하고 저조하다는 점이다. 학계에선 관련 연구를 담은 논문과 논의를 보기가 쉽지 않고, 언론과 시민사회 또한 이를 구체적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사법부가 정책행위자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기초적인 양태에 관한 분석부터 미진하다. 여기에 국가의 주요 정책 결정이나 사회적 현안에 최종 판단이 사법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사법적 개입의 확대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에 대해 과연 어느 선까지 사법적 판단에 맡길 수 있는가도 짚어봐야 할 중요한 대목들이다.
사법부에 던질 원론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질문도 있다. 정책행위자로서 사법권력은 그 기능을 수행할 여건과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가 . 지금까지 사법적 정책 결정은 국민의 기본권 보호와 정의 실현에 얼마나 부합했는가.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한겨레> 편집국에서 팀장과 부장, 논설위원, 부국장 등을 거쳤고,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영국편>,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편저),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편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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