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재산 19배 늘때 세율은 23년째 그대로 … 100년 기업 못키워
상속·증여세는 세대 간의 부(富)가 이동하는 길목에 있는 세금이다. 세금 장벽이 너무 높으면 고령층 자산이 소비와 소득 재창출 능력이 왕성한 젊은층으로 흐르지 못해 경제 효율성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를 보이는 한국의 자산이 고령층에 묶여 있는데 상속·증여세 부담은 선진국 가운데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세제 개혁 1순위로 구시대적인 상속·증여세를 손꼽는 이유다. 강남규 법무법인 가온 대표 변호사는 "상속 세제 개편을 부자 감세로 보는 프레임은 1980년대 구시대적 발상"이라며 "우리 사회의 부를 젊은 층으로 옮긴다는 점에서 세제 개혁은 여야를 넘어선 시대적 요청"이라고 강조했다.
2일 매일경제가 통계청 가구별 순자산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베이비부머 등 60세 이상 고령층 순자산은 지난해 3658조원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률적인 통계가 있는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연령대별 자산 추이를 보면 고령층이 자산을 축적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전체 자산을 100%로 봤을 때 이 기간 2030세대가 보유한 순자산 비중은 15%에서 12%로 줄었다. 경제 주축인 4050세대 자산 비중은 57%에서 49%로 더 크게 감소했다. 반면 이 기간 60세 이상 고령층 자산은 1172조원에서 3600조원 이상으로 불며 자산 비중이 28%에서 39%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이처럼 막대한 자산 이동의 '물꼬'를 틀 상속·증여세율은 23년째 잠자고 있다. 2000년 최고세율이 45%에서 50%로 높아진 후 관련법이 개정되지 않아 고령층 자산이 생산적인 자금으로 활용되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자산은 늘었는데 23년 전 상황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며 일반 국민 세 부담이 크게 늘었다는 것도 문제다. 2000년 652조원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2179조원으로,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같은 기간 1377만원에서 4234만원으로 3배 뛰었다. 고령화 추세가 빨라지며 재산을 물려주는 피상속인이 1389명에서 1만4951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상속재산은 3조4134억원에서 65조9713억원으로 급증했다.
통상 상속세는 매매가 10억원을 넘어서는 재산에 매겨지는데 지난해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12억6421만원으로 과세 기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우병탁 신한은행 부동산팀장은 "상속세를 부담하는 최저 기준이 오랜 기간 자산 10억원 수준이었다"며 "이제 부동산 가격 등 자산 변동 추세를 고려해 최저 과세 기준을 20억~30억원으로 올리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높은 세율이 기업 경영권까지 위협하며 한국 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상속·증여세 최고세율(50%)은 미국(40%), 프랑스(45%), 독일(30%) 등 주요 5개국(G5)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평균 15%) 국가들에 비해서도 크게 높다. 명목상 일본의 최고세율이 55%로 더 높지만 실질 세율은 한국이 OECD 최고인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은 최고세율은 높아도 상속 재산을 공시가로 평가해 과세하기 때문에 전반적인 세 부담은 한국보다 낮다. 반면 한국은 상속 재산을 시가 수준으로 평가해 세금을 매기는 데다 대기업 최대주주에게는 할증까지 해 최고세율 60%를 적용하고 있다.
실제 기획재정부와 중소벤처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중소기업 경영자 중 60세 이상 비율은 30.7%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가업 상속분에 대해 일정 부분 세금을 빼주는 가업상속공제 제도는 아직도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는 최근 가업상속공제 대상이 되는 중견기업 기준을 매출액 4000억원에서 1조원 미만까지 확대하려 했지만 야당의 반발에 지난달 국회에서 5000억원 미만으로 소폭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런 가운데 일본은 단카이 세대(1947~1949년 태어난 일본 베이비붐 세대) 은퇴에 따른 후계자 부재 문제를 풀기 위해 2027년까지 세액공제 한도를 폐지하는 등 파격적인 세제 혜택에 나서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은 76만2000곳이 있지만 가업상속공제 이용 실적은 2021년 기준 110건에 불과하다. 가업승계 관련 세제 지원이 많은 일본(2918건), 독일(2만8482건) 등 중소기업의 뿌리를 키우고 있는 경쟁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 같은 차이는 장수기업 생존으로 이어진다. 업력 100년 이상 된 한국의 장수기업은 7곳에 불과하지만 일본은 3만3076곳, 독일은 4947곳을 보유하고 있다.
추광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상속·증여세 과표 상향과 세율 인하 등 전면적인 세제 손질이 불가피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기재부 관계자는 "올해 상속·증여세 등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세법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산취득세(전체 유산이 아닌 상속인 유산 취득분에만 매기는 세금) 전환과 자녀에 대한 증여세 인적 공제 한도를 1인당 5000만원에서 2억원까지 높이는 방안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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