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정지용의 실개천

2023. 1. 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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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鄭芝溶) 시인의 시 '향수(鄕愁)' 첫 부분이다. 박인수·이동원의 아름다운 듀엣으로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조용필 '그 겨울의 찻집' 등을 작곡한 김희갑 선생이 9개월여 걸려 완성한 곡이다.

월북 작가로 알려져 금지되었던 정지용의 시가 1988년에야 해금이 되었고 '이 아름다운 시를, 정지용이란 위대한 시인을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하고 필자를 비롯한 몇 사람이 뜻을 모았다. 노래로 불려야 빨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고, 당시 KBS 신광철 PD의 뛰어난 기획으로 이 아름다운 노래가 만들어졌다. 얼마 전 가수 이동원은 우리와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 덕분에 그의 목소리는 영원히 우리 곁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1986년에, 당시 금지되어 있던 '정지용 시 연구'로 석사 논문을 썼고, 일본근대문학관의 도움으로 그의 알려지지 않은 수필 등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지용시를 사랑하는 고 김수남(당시 소년한국일보 사장·색동회 회장), 김성우(당시 일간스포츠 사장) 등 우리 몇 사람은 드디어 기다리던 해금을 맞아, 지용회를 만들고 고향 옥천에 시비를 세우고 흉상을 건립하는 등 지용문학을 알리는 일에 사비를 들여가며 열정을 쏟았다. 지용제를 만들어 백일장, 시 낭송, 창, 무용 등으로 공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향 옥천은 지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정지용이 누군데, 정주영도 아니고 시가 밥을 먹여주는 것도, 정지용이 다리를 놓아준 것도 아닌데 타지 사람들이 왜 이리 야단들이냐'고 오히려 못마땅해하며 역정을 부리기도 하였다. 지용은 분명 그의 고향을 위해 쌀 한 가마니 내놓은 일도, 다리를 놓아준 일도 없다. 그러나 미래에는 분명 지용이 수백 개의 다리를 놓아주게 될 것이라 믿었다.

"이곳은 빈센트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던 화실입니다." "이곳은 작곡가 드뷔시가 악상을 떠올리며 차를 마시던 곳입니다." 이렇게 관광 안내원이 "이곳은 위대한 시인 정지용의 '향수'를 탄생시킨 바로 그 실개천입니다"라고 설명할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백일장으로 많은 시인들이 배출되었고, 바로 그 실개천가에서 주민들이 '향수 빈대떡'을 부쳐 관광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 모든 행사는 옥천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뤄지고 있고, 지용제의 향방으로 옥천군수 인기가 가늠될 정도의 절대적인 행사가 되었으며, '향수' 시를 모르는 옥천 군민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정지용 시인에 대한 자부심으로 뭉쳐 있었다.

지난해 가을, 제35회 지용제가 열리는 옥천으로 지용회 회원들과 사단법인 한국시인협회 회원들은 3대의 버스에 가득, 꿈도 가득 태우고 정지용을 만나러 갔다. 옛날 흔적은 없어져 거주자에게 겨우 허락을 얻어 담벼락에 '이곳은 정지용 시인이 태어난 곳입니다' 정도의 푯말을 붙이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생가는 옛날 지용 시인이 살던 모양으로 복원되어 설명하는 안내자의 자랑스러운 목소리가 지용 시인을 만난 것같이 기뻤다.

한 예술가가 그가 태어난 고장을 빛내기도 하고 그 나라의 정서적 수준을 높이기도 한다. 또한 그 이전에 그가 태어난 고향과 국가가 그 예술가를 아끼고 지원해야 됨은 우리 모두의 과제로 남는다.

[김성옥 갤러리서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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