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물러나라고" 고위층 입김…흥국생명은 왜 단장·감독을 경질했나?
[마이데일리 = 박승환 기자] "아침에 갑자기 찾아와 물러나 달라고 하더라"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2일 권순찬 감독과 김여일 단장의 사퇴 소식을 공식 발표했다. "단장과 감독을 동시에 사퇴키로 결정했다"는 문구가 어색하게 보이는 만큼 자진해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흥국생명은 2021-2022시즌 10승 23패 승점 31점으로 리그 6위에 머물렀다. '막내구단' 페퍼저축은행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꼴찌'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 '배구여제' 김연경이 복귀하면서 흥국생명의 입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흥국생명은 올 시즌 14승 4패 승점 42점으로 리그 2위를 질주하고 있다. 1위 현대건설과 격차는 승점 3점에 불과하다.
소위 '잘나가는' 흥국생명이 감독, 단장과 동시에 결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임형준 구단주는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권순찬 감독과 헤어지기로 결정했으며, 단장도 동반 사퇴키로 결정했다"며 "핑크스파이더스를 사랑해 주시는 팬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 지금까지 팀을 이끌어온 권순찬 감독께는 감사드린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해할 수 없는 해명과 함께 납득하기 힘든 행동은 또 있다. 구단과 '방향성'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결별한 권순찬 감독에게는 '고문'의 역할을 맡긴다는 점이다. 흥국생명은 "이영수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 체제로 운영된다"면서도 "권순찬 감독은 고문 형태로 계속 조언 등을 해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마이데일리' 취재 결과 성적과 흥행까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손에 넣고 있는 흥국생명이 감독, 단장을 경질한 배경에는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의 입김이 작용했다. 배구계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평소 태광그룹 고위층에서 권순찬 감독의 선수 기용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밝혔다.
프로 무대에서 성적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좋은 성적을 내달라는 의미로 많은 연봉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입장료를 내고 배구장을 찾아 뜨거운 응원을 보내는 팬들에게 보답하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승리와 최선을 다하는 모습밖에 없다. 하지만 흥국생명의 모기업인 태광그룹의 입장은 조금 달랐던 모양새다.
태광그룹은 권순찬 감독이 어린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면서 '리빌딩' 방향으로 팀을 이끌기를 바랐다. 하지만 권순찬 감독이 성적을 위해 선수를 폭넓게 기용하지 않는다며 경질을 택했다. 해당 관계자는 "오너의 마음에 들지 않는 배구를 했다"며 "권순찬 감독이 자진해서 사퇴 의사를 밝힌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마이데일리'와 연락이 닿은 권순찬 감독의 입장도 비슷했다. 권순찬 감독은 "오늘 아침 사장, 단장님께서 갑작스럽게 찾아오셨다"며 "구단과 컬러가 맞지 않다고 2선으로 물러나 달라고 하더라. 그리고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권순찬 감독과 함께 경질된 김여일 단장이 사령탑을 찾은 것을 고려해 본다면, 단장 또한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리그 2위를 질주하는 상황에서 단장과 감독을 동시에 경질한 흥국생명의 행동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흥국생명의 모기업은 성적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권순찬 감독. 사진 = 마이데일리 DB]-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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