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균 “철학 없는 정권의 탄생…노동계, 울타리 밖과 손잡고 함께 뭉치자”
‘한상균’이라는 이름 위엔 여러 수식어들이 쌓여 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이끈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직선제로 선출된 첫 민주노총 위원장, 박근혜 정권을 끌어내린 주요 동력이었던 ‘민중총궐기’ 주도자, 현재는 영세·미조직노동자 노조 ‘권리찾기유니온(권유하다)’ 위원장···. 그러나 그가 가장 원한 이름은 언제나 ‘노동자 한상균’이었다.
“감옥에서도 차를 팔았다(경향신문 2020년 1월11일자 인터뷰)”던 한씨는 긴 복직투쟁 끝에 2020년 5월 쌍용차공장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생산혁신팀 기술수석 한상균’ 명찰을 작업복 오른쪽 가슴께에 단 노동자로서 2022년 연말로 정년을 맞았다. 정년퇴직 후 그의 첫 계획은 아내와의 부산 여행이다.
‘노동자 한상균’이라는 소박한 꿈은 계속 탄압받았다. 쌍용차부터 민중총궐기까지, ‘노동운동 탄압사(史)’의 주요 장면마다 그가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그를 잡아들이겠다며 수천 명의 경찰을 동원하고 수배령까지 내렸다. 서울 조계사에 피신했던 그는 2015년 12월10일 스스로 절을 나와 체포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상 유래없는 탄압을 한다 하더라도 노동개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계사 신도 200여명이 ‘인간띠’를 만들어 그가 나가는 길을 지켰다. 체포된 한씨는 징역 3년형을 받았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정권이 두 번 바뀌었다. 윤석열 정부는 화물파업을 힘으로 분쇄했고, 노조 전반을 적으로 규정한 듯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노동계에겐 내내 혹한이나 다름없었던 올해를 ‘노동 탄압’의 산증인인 한씨는 어떻게 봤을까. 2023년의 노동계는 어디로 가야 한다고 보고 있을까. 정년퇴직을 하루 앞뒀던 지난해 12월29일 경기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그를 만났다.
“시대정신·철학 없는 정권의 초조함”
“초조해 보인다.” 이번 정부 노동탄압의 배경이 무엇일지 질문하자 한씨는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정부의 ‘초조함’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한 축은 ‘정치적 위기’다. 그는 “지금까지 노동개악을 안 한 정권이 없지만 이번 정권은 조금 다르다”며 “다른 정부들은 재벌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한 중장기적 플랜이 있었다면 이번 정부는 당선 초반부터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고, 노동탄압을 그 돌파구로 삼았다”고 했다.
특히 지난해 말 화물파업에 대한 강경 탄압 이후 지지율이 오르자 정부가 탄압 전략을 더 분명히 했다고 봤다. 한씨는 “법은 머니 주먹질로 다스리겠다는 우격다짐이 일부 통하고 있어 뼈아프게 보고 있다”며 “2024년 총선까지 이 전략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또 다른 한 축은 ‘철학의 빈곤’이라고 했다. 한씨는 “시대정신과 역사발전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믿음이 없는 정권”이라며 “이 사회는 성장과 능력주의, 반공 이데올로기로 유지 발전돼 왔으니 ‘머리아프게 생각 말자’고 판단한 것”이라고 했다. 지지율 하락과 비전 부재가 맞물리면서 ‘정면돌파’를 택했다는 것이다.
“검사 시절 무소불위 권력으로 집행했던, 오만한 법치를 중심으로 컨트롤하면 된다는 거죠. ‘이럴 때는 무식이 상수’라는 식입니다.”
한씨는 “노동정책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야당이나 민주노총 위원장 등과 생방송 끝장토론을 하겠다는 배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정부는 전문가 등 대리인만 세워서 명분을 만들어 밀어붙이고 있다”며 “노조 탄압뿐 아니라 청년 일자리 창출문제, 임금과 노동시간 등에서 자신의 정책에 동의하는 이들만을 상대로 정치를 하면 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법과 질서’라는 논리에 우려도 내비쳤다. 한씨는 “여전히 우리 사회는 ‘법과 질서’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발전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인간존엄의 문제를 사회계약으로 상식화하는 단계고, 그 다음은 그것(존엄)이 규정 없이도 돌아가는 보편윤리 단계”라며 “국민소득 3만불에 인구 5000만 시대인데 아직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에 그친다”고 했다.
박근혜 정권 당시 민중총궐기로 ‘촛불’을 조직했던 한씨의 눈에는 이런 상황이 더 뼈아프다. 그는 “돌아보면 촛불은 박근혜 정권이 법을 안 지키는 것에 대한 분노였지, 권력이 이런 일을 자행할 수밖에 없는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점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며 “촛불로 권력은 바꿨지만 시스템은 바꾸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2022년,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인간 선언’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는 유난히 추운 한 해를 보냈다고 한씨는 평가했다. 그는 “노동조건의 핵심 축인 노동시간과 임금에 정부가 메스를 대고 좌지우지하겠다는 상황”이라며 “궁극적으로는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고 저임금 구조를 고착화하겠다는 자본과 권력의 입장들이 노골화하고 있다”고 했다.
플랫폼노동과 ‘5인 미만’ 영세사업장 등 근로기준법 바깥 노동자들에게 현실은 더 엄혹했다. ‘권유하다’ 활동을 하면서 한씨가 충격을 먹은 건 ‘가짜 5인 미만 사업장(직원과 근로계약을 맺는 대신 직원을 사업자로 등록해 인원 수를 위장하는 것)’이 만연한 것이었다. 그는 “반세기 전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온몸을 불살랐는데, 반세기 뒤에 보니 근로기준법을 합법적으로 빼앗는 나라가 됐다”며 “그 인원이 자그마치 1000만명 이상”이라고 했다.
힘겨운 2022년이었지만 한씨는 희망을 읽기도 했다. 가장 뚜렷한 인상을 남긴 건 지난해 여름 51일간 진행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중간착취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준 투쟁이었죠.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인간 존엄의 문제였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권리를 왜 지금까지 차별받고 배제당하며 살았냐는 자기 물음에서 시작한 ‘인간 선언’이기도 했죠.”
노동운동에서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작았던 하청·간접고용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운동)내부에 주는 메시지가 컸다”며 “그 투쟁이 화물파업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한씨는 봤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의 ‘쌍용자동차 국가손배’ 파기환송도 큰 위안이 됐다.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당시 노조 지부장으로서 한씨가 직접 겪었던 공권력의 폭력진압에 대한 저항이 ‘정당방위’로 인정된 판결이다. 그는 “정년 선물로 가장 뜻깊은 선물이자 지연된 정의이지만 큰 의미를 담은 판결이었고, 정의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경찰청의 판단까지 나오면, 이 판결도 못 받아보고 세상을 떠난 동지들의 영전에 더 이상 아파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울타리 밖과 손잡으며 희망의 대반격을”
혹독했던 한 해를 떠나보내며, 2023년의 노동계에는 “수세적 방어로부터 공세적 반격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한씨는 말했다. 불평등 해소와 최저임금 등 확실한 의제와 정치력을 가지고 밀어붙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윤 정부의 노동정책으로 내 삶이 어떻게 나아지느냐’는 질문 앞에 노동자들은 서게 됐다”며 “민주노총 등 노동운동은 그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한씨는 그 전환의 핵심을 ‘울타리 바깥으로의 연대’에서 찾았다. 상대적으로 덜 조직된 영세 사업장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등을 노동계가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감옥 안에서부터 한 생각이고, 이는 ‘권유하다’ 결성의 밑바탕이 됐다. 그는 “노조 밖 노동자들과의 계급적 연대는 선택이 아니라 상수이자 필수”라며 “중앙정치에서는 싸움이 불가피하지만, 각 마을과 동네마다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진심을 전하는 ‘농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빼앗긴 권리와 임금을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이야기를 해줘야 하죠. 적지 않은 물적토대가 들어가겠지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노동자들이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노동자 정치’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한씨는 “뽑아놓으면 다음날부터 후회하는 푸념을 벗어나기 위해 정확하게 노동자정치의 중심을 세우고, 한국 사회를 어떻게 끌고갈지 제시하는 내비게이션이 돼야 한다”며 “노동자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은 세상을 충분히 행복한 나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정치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려면 노동·진보·좌파세력들이 집결할 필요가 있다고 한씨는 제언했다. 그는 “작은 차이를 넘어 큰틀의 연대로 나아갈 마음의 준비를 빠르게 해야 한다”며 “늦었을 수도 있지만 당장의 총선만 보고 정치하는 게 아니지 않나. 지금의 보수양당 체제를 바꾸자는 분명한 목표를, 빠르고 늦음을 떠나 방향을 분명히 할 때”라고 했다.
의제의 확장성도 필수라고 했다. 한씨는 “노동의제를 넘어 기후위기, 여성인권 등 의제도 담아야 한다”며 “민주노동당에서 출발했던 진보정치의 시즌2”라고 했다. 당장의 현안인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는 “추악한 막말과 겁박, 고성으로 추모를 방해하는 자들로부터 유가족과 추모를 지켜내기 위해 힘을 모으자”고 했다.
“화물연대 동지들의 눈물을 보면서 가슴 안 미어진 민주노총 조합원이 없었겠지만, 마음만 아파서 될 문제일까요.” 한씨는 말했다. “다른 노동자들이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도 같이 눈물만 흘릴 것이냐, 아니면 나의 문제로, 우리의 문제로, 전체 노동자의 문제로 받아안고 민주노총답게 돌파해나갈 것이냐. 이 결정을 미루거나 책임전가할 시간은 없습니다. 단호히 준비해야죠.”
정년퇴직 이후에도 그는 계속 바쁠 것으로 보인다. 권유하다 활동에 더해 여러 노동현장을 발로 뛰어야 한다. 그가 만들고 싶은 새해는 어떤 모습일지 물었다.
“현장 노동자들도 이제는 누가 대신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해요. 모든 노동자들이 술자리에서 정치인 욕 대신, 우리 스스로 희망과 미래를 만들어가는 정치 이야기를 하며 잔잔한 파도를 거대하게 높여가는 2023년을 기대합니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001110600055?www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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