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칠 때 왜 떠나? 아무도 안 칠 때까지 하자” 수상소감 대상은
강기둥·공승연 “고 이힘찬 PD에 감사” 추모
삭발 이승기 “싸워서 당연한 권리 얻어낼 것”
이경규 ‘박수칠 때 떠나라’ 재해석도 화제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지상파 방송 3사 연말시상식 얘기다. 방송 3사가 저녁 황금시간대 시상식 편성에 할애한 시간만 최소 2시간부터 4시간 이상. 연기대상만 해도 <한국방송>(KBS) 236분, <문화방송>(MBC) 138분, <에스비에스>(SBS) 224분으로, 대략 10시간에 달했다. 연예대상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공재인 전파가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만의 송년회’, ‘쪼개기·나눠주기 수상’ 등 전과 다름없는 진부한 모습이 반복됐다.
다만, 형식이 구태의연한 와중에도 참여자들이 진심을 담아 시청자들과 교감한 순간은 빛이 났다. 데뷔 16년 만에 신인상을 받은 연기자의 눈물, 드라마가 담은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거나, 드라마 제작의 숨은 조력자들을 조명한 순간들이다. 감동과 위로, 웃음과 통쾌함이 가득한 수상소감들을 모아봤다.
김남길은 지난해 12월31일 열린 <2022 에스비에스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김남길은 국내 1호 프로파일러(범죄행동분석관) 권일용 교수와 프로파일러팀의 실화에 바탕한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서 권 교수가 모델인 주인공 송하영 역할을 맡았다. 김남길은 대상 수상소감을 시작하며 “이 드라마는 유난히 감사한 분들이 많았다. (참여를) 많이 망설이기도 했지만 박보람 감독 말씀처럼 (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들만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했다”고 말했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은 연쇄살인범을 쫓는 프로파일러들이 주인공인 범죄수사물이었지만, 범죄 피해자들을 대상화하지 않으려는 윤리적 재현으로 호평 받았다. 자극적인 범행 장면을 최소화하고, 범죄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품위 있게 담았다.
김남길은 수상소감을 통해 “항상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준 박보람 감독, 설이나 작가”, “살인의 합리화를 경계하자고 얘기해주신 권일용 교수님” 등이 주요한 역할을 했음을 짚었다. 김남길은 주연 배우로서 드라마가 가장 크게 빚지고 있는 “(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가장 먼저 언급했고, 이어 “우리나라에 과학수사가 없을 때 과학수사대를 만드는 데 일조하신 권 교수님, 윤외출 경감님, 두 분이 걸어온 길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덧붙이며 드라마의 메시지를 완성시켰다.
그는 또한 범죄자를 연기한 조연 배우들의 ‘활약’을 잊지 않았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는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 실제 범죄자를 모델로 한 구영춘(한준우), 남기태(김중희), 우호성(나철)을 비롯해 조현길(우정국), 조강무(오승훈), 양용철(고건한), 장득호(이종윤), 황대선(구성환) 등 여러 범죄자 조연들이 등장했다.
김남길은 “악역을 연기하는 게 쉽지 않다. 물론 연기적으로 잘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이기도 하지만 흉악범을 연기한다는 건 이미지적인 걸 생각하지 않고서 쉽지 않은 결정인데, 배우라는 이름으로 망설임 없이 선택해주고 정말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흉악범들 연기한 배우들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현장에서 그분들을 보면서 ‘연기는 유명세로 하는 게 아니구나. 우리나라에 정말 좋은 배우들이 많구나’라는 것을 느꼈고, ‘항상 연기는 늘 겸손해야겠다’라고 생각했던 현장이었다”고 덧붙였다.
드라마 <소방서 옆 경찰서>로 <2022 에스비에스 연기대상>에서 조연상을 받은 강기둥, 우수상을 받은 공승연은 수상소감을 통해 고 이힘찬 프로듀서를 추모했다. 이힘찬 프로듀서는 에스비에스 드라마 자회사 스튜디오에스 소속으로, <소방서 옆 경찰서> 시즌1 촬영이 시작된 지 20여일 만인 지난해 1월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노사는 이 프로듀서의 죽음이 현행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낸다고 봤고, 다양한 개선책을 찾아 나섰다.
강기둥은 수상소감 말미에 “상을 받게 되면 꼭 이분께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별이 된 이힘찬 피디님께 이 상을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공승연 역시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진 못했지만 드라마의 처음을 함께 해주신 힘찬 피디님께 감사 인사 드리고 싶다”고 소감을 마무리했다.
전 소속사와 법정 다툼 중인 가수 겸 배우 이승기는 지난해 12월31일 열린 <2022 한국방송 연기대상>에 삭발을 한 모습으로 나타나 눈길을 모았다. 그는 이날 드라마 <법대로 사랑하라>를 통해 베스트커플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베스트커플상 수상소감을 통해 “(머리를 짧게 깎은 이유는) 영화 <대가족>이라는 작품을 찍고 있는데 주지스님 역으로 촬영 중이다. 짠한 눈으로 보시는데 그렇게 안 보셔도 될 것 같다”며 유쾌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승기는 대상 수상소감 때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는 “사실 오늘 연기대상에 와야 하나, 아니면 양해를 구하고 불참해야 하나 수백 번 고민했던 것 같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제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이런 축제에 마냥 와서 웃고 있자니 그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상당히 변덕을 부린 것 같다. 제가 이 자리에 오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하나다. 드라마는 팀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제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서 이 드라마에 땀과 노력, 영혼을 갈아 넣은 우리 스태프 분들과 배우 분들의 노력이 외면당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
이승기는 또한 수상소감 말미에 “현재 우리나라 콘텐츠, 영화, 가요, 예능들이 세계적인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하는데 그 주축에는 여기 계신 동료 선후배 분들이 애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내년, 내후년, 그리고 10년, 20년 후에 이 자리에 앉아 있을 후배들을 위해서 당연한 권리를 찾기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고 싸워서 얻어내야 하는 이런 일은 물려주면 안 된다고 오늘 또 다짐을 한다”고 말했다.
이은샘은 1999년생으로 만 23살이지만, 연기자 데뷔는 2007년으로 16년차 배우다. 그는 드라마 <치얼업>에서 연기한 ‘주선자’ 역할로 <2022 에스비에스 연기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이은샘은 “데뷔한 지 16년이 됐기 때문에 신인상을 받을 줄 몰랐다. 상을 못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 자리에 저를 응원하러 온 할머니, 엄마, 언니에게 너무 미안해서 어쩌지 싶었다”며 수상 소감을 말하는 내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16년 동안 소중히 간직한 이야기를 꺼내놨다. 이은샘은 “제가 이 자리에 올라오면 그냥 저처럼 계속 꿈을 쫓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 같은 말을 해주고 싶어서 16년 동안 생각만 했던 말이 있다”며 “제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게 해준 말인데 그냥 무식하고 안 멋진 단어지만 “그냥 해”라는 말”이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이 길을 가는 게 맞나 포기해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 때 ‘왜?’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자, 내가 좋으니까 그냥 하자’ 이 마음으로 계속 버텼다”며 “그래서 지금 계속 꿈을 쫓아가시는 분들이 있다면 과거에 연연하거나 미래를 무서워하지 말고 지금 현재 하고 싶으면 그냥 하셨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방송 프로그램은 ‘보는 사람’, 즉 시청자들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작품이든 가장 큰 조력자면서도 가장 숨겨진 존재인 시청자들을 향한 진심 어린 감사도 눈길을 모았다. <왜 오수재인가>로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서현진은 수상소감 말미에 “가장 감사하고 싶은 분들은 시청자분들이다. 일면식 없는 배우들을 지지해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이렇게 많은 플랫폼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일주일에 한 시간 두 시간을 할애해주신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2022 엠비시 방송연예대상>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이경규의 수상소감도 의미심장하다. 이경규는 “제가 공로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해보니까, 공로상을 받을 자격이 있더라”며 “왜냐하면 제가 <일밤>(일요일 일요일 밤에) 1000회를 했고, 엠비시 축구 시청률이 좋은 건 2002년 <이경규가 간다>로 깔아놓은 것”이라고 말해 좌중을 웃게 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웃음을 유도했다. “많은 분들이 얘기합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 정신 나간 놈입니다. 박수 칠 때 왜 떠납니까? 한 사람이라도 박수 안 칠 때까지 그때까지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시청자가 이경규의 ‘박수 칠 때 떠나라 재해석’에 감탄했다. 그의 말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응원하는 시청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계속해서 활동한다는 의미 아닐까? 시상식에서도 판에 박힌 수상소감 대신, 웃음과 위안을 담은 장면을 시청자에게 선물한 그는 ‘예능 대부’가 맞다. 공로상 받을 만하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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