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새 질서]② 거슬 케임브리지대 교수 “미국에서 세계화·자유무역 끝나… 더 많은 트럼프 출현할 것”
“트럼프·샌더스가 함께 반대하는 부분 주목해야”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적 불안정 커질 것”
미국에서 보호무역 등 자국 우선주의 목소리가 강해지는 데에는 1980년대 형성된 정치질서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구조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자유무역과 세계화, 탈규제를 앞세운 신자유주의가 미국을 불행하게 했다는 인식이 확산됐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공화당뿐만 아니라 민주당도 같은 기조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같은 사람이 더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불확실성과 불안정성도 높아질 것입니다.
게리 거슬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앞으로 미국에서 자유무역 대신 ‘관리된 무역(managed trade)’이나 ‘공정 무역(fair)’이라는 슬로건을 쓰는 자국 이익 중심의 통상 정책이 힘을 얻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관리된 무역은 정부 개입을 상정(想定)한다. 공정 무역은 그 과정에서 무역 수지나 고용효과를 주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에서 시작되고 빌 클린턴 대통령이 완성한 신자유주의 질서(Neoliberal Order)가 무너졌다”고 말했다. 미국 정치와 미국이 주도한 국제 정치경제 시스템의 변화는 피할 수 없다는 게 거슬 교수의 진단이다.
거슬 교수는 미국사학자로 2022년 ‘신자유주의 질서의 성장과 몰락’이라는 책을 써 국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가 “출간 즉시 고전의 반열에 오른(instant classic) 드문 책”이라는 평가를 내렸을 정도다.
그는 미국 정치가 1940~1970년대 뉴딜 질서에 이어 1980~2010년대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작동했다고 분석했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인 ‘질서’는 정책, 이데올로기, 유권자 연합 등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오랫동안 정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는 “정치 질서의 핵심적인 특징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우위에 있는 정당이 반대 정당을 본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라며 “이 때문에 여야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영향력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일종의 제도적인 강제력을 갖는 정치적 사조(思潮)를 의미하는 셈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질서가 더 이상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과거 백인들의 일자리를 차지한 유색인종 때문에 백인들은 인종적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강해지는 데에는 미국 정치 지역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는 게 거슬 교수 주장이다.
자유무역과 세계화가 미국을 번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은 불평등이 확대되고,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 모두 1990년대부터 줄곧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뀐 건 그들의 목소리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대적 환경입니다.
거슬 교수는 신자유주의 질서의 붕괴가 “미국뿐만 아니라 브렉시트를 경험한 영국 등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보수와 진보할 것 없이 모두 터져 나오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며 “어떤 정치 세력도 주도권을 쥐지 못하면서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거슬 교수에 따르면 국제 정치와 경제 질서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정치·경제 체제가 무너지면서 3~4개의 강대국이 경합을 벌이는 형태로 바뀌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또한 그는 “19세기 후반과 비슷한 양상으로 국제 질서가 바뀌면서 대규모 충돌이 일어날 위험성도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나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로 바뀌는 과정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거슬 교수는 미국 브라운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메릴랜드 주립대와 밴더빌트대 교수를 거쳐 2014년 케임브리지대로 옮겼다. 미국 정치제도와 정치사상을 비롯해 이민, 인종, 노동계급 등을 주로 연구했다.
조선비즈는 지난달 케임브리지대에서 거슬 교수와 만났다. 다음은 거슬 교수와의 일문일답.
왜 신자유주의 질서는 무너지게 되었나.
“약속했던 것을 더는 줄 수 없다는 게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 뉴딜 질서는 완전 고용과 준수한 소득, 번영하는 경제라는 비전을 이행할 수 없다고 다수의 미국인이 생각하면서 허물어졌다. 2010년 이후 신자유주의 질서의 붕괴도 불평등 확대, 양질의 일자리 감소, 노동시장의 불안정성 심화 때문에 무너졌다. 이는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정치학자 찰스 머레이가 지난 2012년 펴낸 ‘커밍 어파트(Coming Apart)’에서 백인 노동계급의 거주지역으로 상정한 피시타운의 경우 남성 혼인율이 1960년 84%에서 2010년 48%로 급락했다. 미국의 백인 남성은 선진국에서 사망률이 증가하고 평균 수명이 감소한 거의 유일한 인구 집단이다. 알코올 중독과 자살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불행, 외로움, 고독, 기회 박탈 등에 의한 정신적인 문제도 많다. 이런 사람들이 극단주의나 정치적 음모론에 빠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선진국에서도 기존 정치 질서, 특히 ‘자유무역’과 ‘규제완화’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정치질서가 무너지는 건 비슷해 보인다.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집단은 크게 세 개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백인 노동 계급, 현재 진행형인 인종 차별 탓에 급격한 확대된 불평등의 피해자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리고 프레카리아트(IT기술의 발달로 급증한 불안정한 지위의 근로자) 비중이 높은 청년층이다.
불평등 확대와 불안정 노동, 질 좋은 일자리 감소는 산업화된 세계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Brexit)가 2016년에 각각 발생한 게 이를 잘 보여준다. 둘 다 소외되고 분노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했다. 이는 국제적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항한 반란이기도 했다.”
두 사건(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 모두 인종적인 요인도 강한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미국과 영국에서 안정되고 좋은 일자리를 갖고, 중산층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백인의 특권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사라진 일자리는 비백인 국가로 이동했다. 일부는 아시아로, 일부는 멕시코 같은 라틴아메리카로 갔다.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에서 비백인들에게 졌다는 인종적인 인식이 분노를 강화했다. 경제적 상처와 ‘상상된(imagined)’ 인종적 상처의 결합은 대단히 강력하고, 독성이 가득 찬 정치적 동원을 만들어냈다.
트럼프의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메시지나, 영국의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브렉시트 찬성파의 ‘우리는 지금과 같이 세계가 발전하는 양태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이민자에 대한 분노가 함께 터져 나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모두 기존 정치 질서가 무너지는 걸 보여주는 사례인가.
“이들은 모두 자유 무역,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 글로벌 단일 시장을 반대한다. 많은 미국인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 지위를 유지하려면 결국 자유무역이라는 강력한 질서를 없애야 한다는 게 공통된 인식이다. 질 좋은 제조업 일자리가 미국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샌더스가 각각 펜실베이니아주 서부의 철강 산업 단지를 방문해 노동자들에게 한 말은 상당히 유사하다. 두 사람은 1990년대부터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당시에는 아무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핵심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강력한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취하고 있다. 미국 정치와 정책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겪고 있다고 보아야 하나.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 중국에 부과한 관세를 없애지 않았다. 나아가 미국 내에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도록 각종 정책을 펴고 있다.
글로벌 자유 시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대신 ‘관리된 무역’ 또는 ‘공정 무역’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미국은 한국 같은 다른 나라들과의 통상 정책을 다시 짜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전환기라고 본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나 공화당의 고(故) 존 매케인 같은 중도 온건 성향의 정치인은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힐러리는 정치적 프로그램 면에서 남편인 빌 클린턴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빌 클린턴은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승리를 확고하게 만든 설계자(architect)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이끈 변화가 미국 사회에서 여러 큰 문제를 야기했고, 이게 기반한 정치적 프로그램도 구식이 됐다.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은 왜 인기가 있었는데, 자신은 인기가 없는지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공화당의 경우 매우 친기업적인 엘리트와 2010년 등장한 티파티 부류가 있다. 매케인은 전통적인 옛날식 공화당의 노선을 충실히 따른다. 트럼프가 그를 조롱하고 잔인하게 대한 것은 트럼프 부류의 사람들이 공화당을 접수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합리적이고 중도적이면서 인종적 민족주의 색채가 옅은 정치인이 공화당 내에서 주도권을 쥐는 건 당분간 어렵다.”
그렇다면 정치와 경제정책은 계속해서 불안정한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얘기인가.
“앞으로 더 많은 트럼프가 나올 것이다. 또 어떤 당도 우월한 입지를 차지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정치에서 변동성이 커질 것이다.
11월 미국 중간선거의 경우처럼 여론조사는 점차 신뢰도가 낮아졌다. 불안정성과 변동성이 커질 뿐만 아니라 중도층이 보기에 ‘미친 것 같은’ 극단적인 인물이나 사상의 정계 진입 등이 늘어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도 정권교체 주기가 짧아지는 등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보호무역주의 강화, 국내 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 도입과 같은 명확한 트렌드도 존재한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확산을 이끌었다. 결국 국제적인 정치, 경제 질서도 변화를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팍스 아메리카(미국에 의한 평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이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던 시대는 끝났다.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에서 3~4개의 강대국 중 하나로 위상이 하락할 것이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해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이 각축을 벌였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3~4개의 강대국으로 유지되는 세계는 바로 트럼프가 그렸던 세계다. 그는 미국이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을 갖기를 원했다. 또 중국에 그들의 세력권을 부여하려 했다. 러시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세계 질서가 무너지고 또 다른 세계 질서로 변화하는 과정은 아주 위험할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19세기 강대국들의 세력 균형은 1차 세계 대전이라는 파국을 맞이했다.”
[케임브리지=조귀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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