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한일관계 다루는 새로운 생각과 접근법

2023. 1. 2.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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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이슬기기자 9904sul@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이라고 일컬어지던 한일관계가 점차로 개선되고 있는 느낌이다. 극한의 대결 상태로 치닫던 양국관계에 조금씩 협력의 기운이 찾아들고 있다. 열린 하늘길로 양국 국민들의 왕래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대일접근법이 변화한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일본도 한국 정부의 새로운 접근법을 높게 평가하고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사이에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어떻게 안보협력, 경제협력을 회복할 것인가, 양국 간 신뢰를 무너뜨린 과거사 관련 현안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양국 국민 사이에 앙금처럼 남아 있는 감정의 고리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쟁점들이 남아 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는 한일 협력의 접착제

긴박한 국제정세의 전개는 한일의 접근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만들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국제법 질서의 파괴, 북한의 유례없는 미사일 발사와 호전적 도발, 그리고 중국의 공세적 외교와 대만에 대한 현상변경 시도, 북한과 중국의 접근 등 이례적인 위협의 등장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외교 안보적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한국 혼자의 힘만으론 감당할 수 없고, 일본에게도 국제적 협력을 요구하는 부담스러운 도전들이다. 한일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서로에게 부담만 늘어나고 서로가 손해를 보는 게 불 보듯 뻔한 사태 전개들이다.

지난 정권에서는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북한과의 화해 협력과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에 매달렸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은 한국의 노력과 무관하게 핵과 미사일 능력을 향상시켰다. 2022년에 들어서는 공세적 위협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2022년 한해 만도 60여발에 이르는 탄도미사일 발사, 그 중에서도 극초음속 미사일, 저고도 순항미사일, ICBM발사를 거듭하는 것은 물론 공세적 핵독트린까지 발표한 것은 미증유의 안보 도전들이다.

북한의 안보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일 안보협력과 한일 안보협력은 우리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불가결하고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한일 협력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과제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한일 협력을 진전시켜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국제경제 질서의 전개도 한일의 접근을 종용하고 있다. 개방적 통상정책과 상호의존의 심화를 전제로 하는 글로벌화의 전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미-중 경쟁의 심화 속에서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첨단산업은 물론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퀸텀 컴퓨팅과 같은 미래성장동력 분야에서 점진적 디커플링(decoupling)과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이 일어나고 있다.

상호의존이 무기화될 수 있는 가운데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국가가 어디인지 선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코로나의 지속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가속화된 공급망의 교란과 왜곡, 핵심광물 수급의 불안정화 등도 믿을만한 거래 관계의 중요성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첨단 기술은 물론 지식 데이터의 보호에 있어 규범과 규칙에 따르는 행동을 하고 경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가도 성숙한 경제협력 파트너를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이같이 급변하는 국제경제 현실 속에서 장기간에 걸친 소재, 부품, 장비 면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고, 장기 안정 거래 관행에 익숙한 한일 간 경제 파트너십을 재확인하고 재구축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윤석열 정권의 한일관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국제사회 변동에 따른 외부적 압박만이 새로운 한일관계를 추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정권의 대(對)일 접근법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한일관계 전환의 중요한 요소다.

먼저 과거사를 중심에 두고 과거사 현안이 풀리지 않는 한 여타 협력을 방치하는 방식, 과거사 해결을 최우선 순위로 설정하여 다른 협력 사안과 연계하는 방식은 한일관계 전반을 과거사로 점철되게 만들었다. 더구나 피해자들 모두가 수용 가능한 안을 찾아야 한다는 이른바 '피해자 중심주의'는 정부의 재량 행위나 통치권자의 판단 영역을 극도로 축소시켰다. 자승자박으로 과거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직성이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윤석열 정권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접근법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사 현안은 중시하면서도 미래지향적 협력은 물론 상호 호혜적 협력 아젠다는 과거사와 무관하게 진전시키고 있다. 윤 대통령은 77주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한일관계가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구두선이 아닌 행동형 투트랙 접근법이다. 과거사 현안 해결을 위해서도 사법부의 판단에 종속되기보다는 대통령실과 행정부, 특히 외교부가 관여할 여지가 없는지 끊임없는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다. 행정부의 법적 대안 모색과 적극적 외교협상의 전개는 과거사 현안 방치로 인한 관계 악화의 부정적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인식에 기반해 있다.

이런 전향적 접근법의 시도는 한일관계의 주역을 과거사의 피해자에 한정시키지 않고, 국민 전체의 이익과 국익의 추구가 외교의 기본이라는 발상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한국을 피해자. 일본을 가해자로 보는 위계적·종속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양국을 대등한 행위자로 자리매김하는 사고의 전환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한일관계에 관한 신사고는 다양한 협력 분야의 동시적·병행적·중층적 추진을 가능하게 한다. 과거사에 사로잡혀 꼼짝달싹하지 못했던 폐쇄 회로에서 벗어나 개방적 협력을 유연하게 추구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안보, 경제통상은 물론, 사회문화, 과학기술협력 등으로 협력 분야를 확장하고, 과거사 해결 진척도와 분야별 협력 진도를 직접적 연계하지 않음으로써 협력의 문호를 열어 두는 효과도 있다.

아울러 한일 협력의 지평을 양자 간 또는 한반도에 국한된 협소한 지평에서 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아시아 태평양지역, 나아가 인도태평양 지역 및 글로벌한 영역으로 펼쳐 나가는 것도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에 들어 한일 협력의 무대는 한미일, 아세안, 동아시아, 인도태평양, 주요7개국(G7), 주요20개국(G20), 유엔 등 다양한 무대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과거사 현안에 대한 책임있는 해결책 모색

한일관계에 관한 신사고와 새로운 접근법이 과거사 현안에 대한 무시나 방치 또는 피해자의 경시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사를 방치한 상태에서의 양국 국민 간 신뢰 회복은 불완전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가해자의 책임과 피해자의 품격이 아우러지는 선택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윤석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강제징용 피해자 대책을 구상하는 이유는 피해자들의 권리보호를 무한정의 시간으로 연장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감, 한일관계를 무책임하게 최악의 결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는 책임 의식, 그리고 1965년 한일 청구권 조약의 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적 인식의 결합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65년 당시 한국 정부는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피해자 개별보상 방식이 아닌 정부 일괄 타결방식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을 받았고, 이 자금을 기반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소양강댐 건설. 포스코 설립, 농지개량사업 전개 등 수많은 국가 기간산업 시설 확충에 사용했다.

기간 산업의 성장이 국가경제 발전에 총체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강제징용 등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아 당사자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한국 정부는 개별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미진함을 자각하고, 1974년에 사망자 8552명에 대해 당시 금액으로 30만원씩 총 92억원을 보상하였고, 2007년에는 특별보상법을 만들어 7만7780명에 대해 300만원에서 2000만원까지 총 6334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에 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기인한 징용피해에 대한 정신적 피해를 개별적으로 보상하라는 게 2018년 대법원 판결이었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다시 제기하는 것은 1965년 한일 기본조약 합의의 근간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려는 것으로서 국제법 위반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한일 양국은 1965년 당시 식민지 지배는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데 합의하였고, 청구권 자금의 공여는 완전하고 최종적(complete and final)이라는 국가 간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사상 개인보상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인정되는 이상, 강제 징용 피해 판결에 승소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해결책이다. 정부가 직접 보상하지 않고 병존적 채무인수를 통해 정부 산하 합목적적 재단을 활용하여 승소한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적절한 보상을 시도하는 이유이다. 청구권자금 수혜기업들이 협력하는 것은 물론, 당해 일본기업들의 협력을 이끌어내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동시에, 한일관계를 다시 최악의 상태로 만들 여지가 있는 현금화를 막아보자는 것이다.

▶일본도 문제 해결에 동참해야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시점에 일본 기업의 전향적인 협력이 이루어져야 하고,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에 대한 겸허한 자세 표명도 동반되어야 바람직하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지난 11월 28일 한일친선협회 중앙회 세미나에서 "한국 정부의 진정성 있는 노력에 대해 일본 측도 성의 있게 호응해 오길 기대한다. 과거를 직시하고 상호이익에 기초해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일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본 기업들이 한국측 기금이나 재단에 자발적인 기부를 할 수 있는 행동의 여지를 열어 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역대 정부가 표명했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의 정신을 확인하고 이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이다.

물론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낮아진 가운데 이러한 정치적 결단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본 기업들도 주주들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점에서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놓칠 수 없는 황금같은 기회(golden opportunity)이자 두 번 다시 도래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역사적 모멘트라는 절실한 자각을 가지고 일본도 호응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이해당사자가 흔쾌히 수긍하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차선의 대안 모색은 가능할 것이다. 한일관계의 복원과 정상화가 우리의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 현안의 해결이 양국 정부에 안심감과 안정감을 줄 것이냐, 그리고 양국 국민 간 신뢰 회복이 가능하냐가 판단의 관건이 될 것이다.

한일 양자만 보지 말고 국제사회의 변화를 충분히 고려한 대국적인 판단이 필요한 때다. 정파적·정략적 이익보다는 국민 모두의 편익과 양국의 공동 이익을 우선하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본 기고의 원문 출처는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189호' 임을 밝히며, 원문의 저작권은 동아시아재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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