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사활 건 반도체 전쟁 중, 한국은 "세수 감소 때문에…"
[편집자주] 새해가 밝았지만 경제 상황은 어느때보다 어둡다. 퍼펙트스톰(복합 경제 위기) 앞에 소비, 투자, 생산, 수출 모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대한민국이다. 그 선봉에 기업들이 있다. 희망의 2023년, 산업 현장을 찾아 위기 극복의 해법을 모색한다.
'산업의 쌀' 반도체가 미중 패권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신냉전시대의 전략무기로 떠올랐다. 코로나19(COVID-19) 팬데믹으로 촉발된 반도체 공급 불안은 반도체 자국우선주의를 발현케 했다. 미국은 수십년간 지켜온 시장주의 원칙까지 깨면서 수천억원의 보조금, 세제 혜택 등을 무기로 반도체 생산 내재화에 나섰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起, 우뚝 일어섬)'를 제지하기 위해 WTO(세계무역기구) 체제까지 흔들며 수출규제까지 단행했다. 덕분에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인 생산기지 역할을 담당하는 '칩메이커(Chip-Maker)' 한국과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1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미국에 기반을 둔 반도체 생산공장은 세계 반도체 제조 능력의 12%에 불과하다. 1990년 37%에 달했던 것에 비하면 3분의 1수준으로 쪼그라 든 것이다. 대만이 22%로 가장 높고 한국이 21%로 뒤를 따르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15%, 기타 15% 순이다. 미국의 핵심역량 중 하나인 반도체 설계 능력의 경우에도 2015년 50%에서 2021년에는 46%로 줄었다.
대만, 한국, 중국 등이 정부차원의 지원을 통해 반도체 강국으로 발돋움한 사이 미국의 반도체 경쟁력은 뒷걸음질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며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이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더욱 고조됐다.
양국이 가장 첨예하게 맞붙은 분야가 반도체다. 미국은 중국으로 향하는 반도체 장비를 규제했다.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첨단 반도체 IP(지적재산권)를 무기로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대만, 한국 등 동아시아에 집중돼 있는 반도체 생산기지를 미국 내로 이전하려는 움직임도 거세졌다.
지난해엔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 기업 규모와 상관없이 25%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한 '반도체칩과 과학법(칩스법)'을 제정했다. 아울러 반도체 시설 신설·확장·현대화에 향후 5년간 520억달러(약 67조원)의 보조금도 투입키로 했다. 중국을 잡기 위해서라면 시장주의 원칙도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위치한 TSMC 공장에서 열린 장비반입식에 참석해 "미국의 제조업이 다시 돌아왔다"고 말했다. '칩메이커' 미국의 귀환 선언이다.
일본과 유럽도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인 생산기지를 내재화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일본은 구마모토현에 TSMC 반도체 공장 유치했다. 일본정부는 TSMC 공장 유치를 위해 2021년 '반도체산업 기반 긴급 강화 패키지'를 발표하고 건립비용(1조2000억엔)의 40%에 해당하는 4760억엔(4조6000억원)을 보고금으로 지원키로 했다. 독일은 지난해 3월 인텔과 반도체 공장 건설에 합의했다. 인텔은 독일 마그데부르크에 170억 유로(22조5000억원)을 들여 반도체 허브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독일은 최근 TSMC 공장 유치를 위한 협상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는 지난해 7월 미국과 스위스 반도체 기업으로부터 57억 유로(약 7조9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처럼 세계 각국이 칩메이커가 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는 이유는, 자국 기업들이 산업의 쌀인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들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흔들리자 자국 첨단산업의 가동이 멈추는 걸 직접 목격했다. AI(인공지능), 빅데이터, IoT(사물인터넷) 등 4차산업혁명 시대 산업경쟁력은 반도체 조달 능력에 달렸다. 싸고 빠르게 공급받을 수 있는 공급망이 최고이던 시절이 지났다. 이제는 조금 더 비싸더라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공급망이 우선인 시대다.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직접 조달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다. 산업화 시대 '효율 극대화'의 패러다임이 변한 것이다.
이러한 시장의 급격한 재편은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한국의 위상에도 영향을 끼친다. 당장 삼성전자만 해도 파운드리 시장에선 세계 1위인 TSMC와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보조금, 세액공제 등 정부차원의 지원도 차이가 크다. 한국의 경우 당장 지난 연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일명 '반도체 특별법'은 반도체 관련 투자 세액공제율이 8%에 불과하다. 세수 감소 우려 등으로 당초 정부안 25%에 비해 크게 후퇴했다. 세제혜택을 통해 미래산업 주도권을 확보하고 산업 및 기업의 성장이 이뤄진다면 지속적으로 세수를 늘릴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세계 최고수준인 법인세 부담도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2021년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법인세 유효세율은 각각 25.2%, 28.3%다. 유효세율이란 기업 재무제표상 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에서 법인세가 차지하는 비중을 말한다. 다른 주요 글로벌 업체들의 법인세 부담율은 10% 이하다. TSMC는 10.0%, 인텔는 8.5%, 마이크론은 7.1% 등이다.
전문가들은 마이크론 등 미국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한국 기업은 자국 지원에서부터 약점을 갖고 있는 셈이라며 발빠른 지원을 강조한다.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 기업들이 언제든 해외로 발길을 돌릴 수 있다는 우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해외 진출 규모가 커지면 기술 유출 가능성도 커진다.
김양팽 산업연구원(KIET) 전문연구원은 "세제혜택을 해외 국가들이 주는만큼은 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보조금 지원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며 "미국과 일본은 이미 보조금을 주고 있다. 반도체기업들이 국내에 있을 때 지금과 같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환익 전경련 산업본부장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면서 자국내 생산 능력을 확충하고 칩4를 통해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이유는 4차산업혁명 시대 산업의 핵심 경쟁력이 바로 반도체의 안정적인 조달, 생산능력에 달려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라며 "세계 각국이 반도체 등 첨단산업 경쟁력 강화 및 관련 기업 유치를 위해 파격적인 지원정책을 펼치며 총력을 펼치고 있는 만큼 우리도 정부와 정치권, 민간기업, 학계가 필사적으로 뭉쳐 지원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민동훈 기자 mdh5246@mt.co.kr, 한지연 기자 vividh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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