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철거되는 힐튼호텔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긴급 방한한 IMF 협상단과 우리 정부의 비밀 협상이 힐튼호텔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본지가 먼저 알아내 동료 기자와 달려갔다. 20층도 넘는 호텔 어디에서 협상이 열리는지 찾을 길이 막막해 서성이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협상장에서 내려오던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관료와 딱 마주쳤다. 깜짝 놀라던 그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협상장이 알려진 이후 힐튼호텔은 IMF 협상 내내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필자에게 힐튼호텔은 외환 위기 당시의 춥고 무거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 건축사에선 기념비적 공간이다. 근대 건축의 거장으로 꼽히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건축 철학을 한국 건축가가 한국 땅에 재해석한 건축물로 꼽힌다. 미스 반데어로에에게 수학하고 그의 건축 사무실에서 10년간 일한 ‘1세대 건축가’ 김종성씨가 설계했다. 일리노이 공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세계적 호텔을 지어달라”는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의 요청을 받고 미국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귀국해서 힐튼호텔을 설계했다. 산을 등지는 배산(背山)이 아니라 남산 쪽으로 출입구를 내고 남산을 감싸안은 것처럼 살짝 꺾인 모양이다.
▶꼭대기층인 23층의 펜트하우스는 김우중 전 회장의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유명했다. 또 다른 반대편 끝에 대공포대가 있어 김 회장, 객실 손님, 군인 동선이 엉키지 않도록 설계됐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이 외국 귀빈 등을 펜트하우스로 초청해 식사 대접을 했는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사업가 시절 한국을 방문했을 때 초대받았다.
▶호텔을 완공하고 경영한 사람은 부인 정희자씨였다. 미국 힐튼 본사에서 ‘터프 마담’으로 통했다. 힐튼이 1년에 경영 수수료를 25%씩이나 떼가는 것에 딴지를 걸고 저돌적으로 협상해 수수료를 깎은 여장부였다. 호텔 개관 때 조각가 헨리 무어의 ‘여인상’을 설치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호텔에 문화 예술을 접목한 선구자였다. 이런 남다른 경영 덕에 전 세계 500개 힐튼호텔 가운데 최고의 호텔로까지 선정됐다.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1999년 싱가포르계 호텔 운영사에 팔렸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국내 자산 운용사에 재매각됐다. 신규 인수자가 힐튼호텔을 부수고 호텔·오피스·상업시설을 갖춘 복합시설을 짓겠다고 한다. “신라 범종을 녹여서 가마솥 만드는 일”이라며 건축계에서 비판이 거셌는데도 끝내 헐리게 됐다. 모기업 대우그룹에 이어 힐튼호텔까지 사라진다니 또다시 스산한 바람이 마음을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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