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누칼협’보다는 ‘중꺾마’가 회자되는 새해이기를

홍진수 기자 2023. 1. 2.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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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한 탓일 수도 있지만 내 기준으로 지난해 가장 강렬한 인터넷 유행어(인터넷 밈)는 ‘누칼협’이었다. 누칼협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자마 이것은 논쟁에서 ‘무적의 무기’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그랬다.

홍진수 정책사회부장

누칼협은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의 줄임말이다. 누군가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 이렇게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 “그렇게 하라고 누칼협?” 비슷하면서 점잖은 말로는 “너한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사람 없으니 징징대지 말라” 정도가 되겠다.

누칼협이란 말은 게임 로스트아크의 커뮤니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로스트아크에서 어떤 아이템이 출시되고 인기를 모았는데, 얼마 있다가 그보다 좋은 아이템이 또 출시되자 먼저 돈을 쓴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린 모양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누가 칼 들고 아이템 사라고 협박함?”이라고 놀렸고, 유행어가 돼 온라인 세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누칼협의 용례는 다양하다. 누가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리면 “그런 회사에 들어가라고 누칼협(억울하면 더 좋은 회사에 갔어야지)”, 취업 과정에서 학력 차별을 당했다고 투덜거리면 “그런 학교 들어가라고 누칼협”, 영혼까지 끌어모은(영끌) 대출을 받아 집을 샀는데 금리가 올라 힘들다고 하면 “집 사라고 누칼협”, 최저임금이 올라 편의점 하기가 힘들다고 하면 “자영업하라고 누칼협”, 심지어는 대형 참사가 벌어져도 누가 그 현장에 가라고 등을 떠밀었냐며 “누칼협”이라고 한다.

누칼협은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거창해보이지만 ‘시대정신’을 조금은 반영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지금 한국은 제각기 살아나갈 방법을 꾀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다. 아무도 내 인생을, 내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믿을 것은 내 능력뿐이고 내가 선택한 행동에는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경쟁에서 도태되면 그건 어쩔 수가 없다. ‘노오오오오오오오력’을 하지 않는 내 책임이기 때문이다.

나의 선택에 대해서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선언은 남들도 그리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누칼협은 다른 사람의 고통은 이제 ‘내 알 바 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누칼협의 시대에 ‘연대’는 발을 붙일 수가 없다. 이는 곧 인간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사회의 종말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물론 누칼협을 쓰는 모든 사람이 약자를 향한 조롱을 의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를 놀리기보다는, 어느새 각자도생의 시대가 되어버린 한국사회에 보내는 냉소로 누칼협을 쓰는 사람도 많다. 개인의 선택을 모두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부에게 보내는 날카로운 비판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중꺾마’가 누칼협 못지않게 회자가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중꺾마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줄임말이다. 프로게이머인 ‘데프트’(김혁규)의 인터뷰 기사 제목에서 유래했다. 지난해 10월 롤드컵 1라운드에서 패배한 DRX(팀)의 데프트가 쿠키뉴스 인터뷰에서 “오늘 지긴 했지만, 저희끼리 안 무너지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희망을 섞어 말했고, 담당기자가 해당 인터뷰 영상에 <DRX 데프트 “로그전 패배 괜찮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데프트가 직접 한 말은 아니었지만, 이후 데프트가 속한 DRX가 역전 드라마를 써나가면서 유명해졌다. 그리고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남자축구 대표팀이 16강 진출을 확정 짓고 이를 다시 인용하면서 전국적 유행어가 됐다.

여전히 살아내기 어려운 시대다. 그러니 올해는 이웃들과 어깨를 겯고 가보는 건 어떨까. 누칼협으로 냉소하고 조롱하기보다는 중꺾마를 서로에게 외쳐주면서.

지난해 12월25일 영면에 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저자 조세희씨는 2011년 7월 인권연대 12주년 기념강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20대들은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라. 냉소주의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공동의 일, 공동의 숙제를 해낼 수가 없다. 냉소주의는 우리의 적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의 말도 덧붙였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과 불의, 특히 그 앞에서 그가 알고 있는 가운데 저지른 범죄행위들을 책임지게 되는 것이다. 악을 저지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때 나는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게 되는 것이다.”

홍진수 정책사회부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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