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의 나락 한 알] 새해, 소소한 상을 차려보자

기자 2023. 1. 2.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초, 서강대학교 구내의 예수회 공동체에서 성북구 길음동의 한 수녀원으로 이사했다. 대학가에서 16년을 살다가 주택가로 옮겼으니 내겐 꽤 큰 변화다. 새로운 곳에 쪼그만 주방이 하나 있다. 주방을 보며, 이참에 요리를 좀 해볼까 생각했다. 소소한 상을 차려 사람을 부르고 담소하며 함께 먹는 모습을 그려보니 괜찮아 보인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지난해로 문을 연 지 5년이 지난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 거기 들어서면 바로 카페 겸 식당 그리고 주방이다. 꿀잠에선 끼니때는 물론, 수시로 주방에서 뭔가를 만들어 식당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밥을 함께 먹으며 처음 보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서로 아는 사이가 되고 지칠 대로 지친 사람은 힘을 얻는다. 위험한 노동, 부당한 노동으로 자식과 남편을 잃은 유족들도 꿀잠의 밥심으로 긴 싸움을 이겨냈다.

어설픈 상이지만 오붓한 행복

1990년대 후반, 미국 보스턴의 예수회 공동체에 4년 정도 살면서 공부할 때, 돌아가며 저녁 당번을 맡았다. 7명이 같이 살았으니 매주 한 번꼴로 차례가 돌아왔는데, 그전에 요리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부담이 컸다. 급한 대로 주위의 한국 분들에게 물어물어 불고기, 볶음밥, 카레 라이스, 잡채 같은 식단을 정해놓고 4년 내내 돌렸다. 물론 요리법도 정식이 아닌 약식이었다. 저녁 준비가 쉽진 않았지만 내가 차린 상에서 맛있게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은 근사했다.

미국에서 맞은 어느 해 생일날, 오늘 점심으로 라면을 먹을까 하고 있는데, 공동체 동료가 생일 선물이라며 그릇 하나를 내민다. 미역국이었다. 한국 사람은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다고 들었다며, 먹고 힘내란다. 어디서 났냐고 물으니,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한국 분에게 부탁했단다. 그 미역국을 먹으니 정말 힘이 나는 듯했다. 직접 한 건 아니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마련한 음식은 맛도 있고 힘도 준다.

예수회에 들어간 뒤, 집에 가면 엄마는 언제나 똑같은 질문을 하셨다. “거기선 뭐 먹는데?” “언제 또 오는데?” 밥은 제대로 먹고 지내는지 늘 걱정하셨고, 어디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닌데 돌아갈 때면 늘 아쉬워하셨다. 한 번은 언제 오느냐고 묻는 엄마에게 농을 했다. “뭐 맛있는 거 해주시면 금방 또 올게요.” “이제 다 까먹어 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나.” 엄마는 반색하면서도 멋쩍어하셨다. 그땐 이미 아버지가 주방을 맡고 계셨다. 그런데 다음에 가니, 엄마가 육개장을 ‘한솥’ 끓여놓고 날 맞으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얼마나 공들여 장을 봤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이게 간이나 맞을지 맛이나 있을지” 하면서도 엄마는 한 그릇 가득 육개장을 내오셨다. 간도 맞았고, 맛도 있었다.

집에 있는 내내 엄마의 육개장을 먹었다. 엄마는 아직 계시지만, 그 육개장이 다시는 맛보지 못할 엄마의 손맛이었다. 그래서 고기를 잘 먹지 않는 요즘도 육개장은 예외다. 몇 년이 지나고 나자 집에 가면 내가 엄마에게 상을 차려드려야 했다. 어설픈 상이었지만, 엄마가 맛있게 드셨다고 믿고 싶다.

밥 대신 법을 들이대는 분에 황당

없다가 생긴 주방에 이런저런 기억이 더해져, 준비도 없이 사람을 몇 번 불렀다. 아직 한국 음식은 무리라, 파스타와 거기에 어울리는 소소한 것들을 곁들여 상을 차렸다. 어설픈 상이지만 그래도 오붓한 공간에서 모두 즐겁게 보냈다.

예상 밖의 ‘성공’에 고무되어, 올해는 짬이 날 때마다 상을 차려보자고 생각한다. 당분간 메뉴는 이거 하나로도 괜찮을 거다. 오는 사람이 계속 바뀔 테니. 근데 학기가 시작되면 어떨지 솔직히 자신은 좀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상을 차리는 일일지 모르겠다. 내가 하는 일이 나는 물론, 다른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밥이 되길 바란다. 지위가 높고 권한이 클수록 ‘그 누군가’는 더 많아지고 책임도 커진다. 그렇게 보면 대통령은 우리 모두의 상을 차리는 사람, 아니 우리가 상을 차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대통령이 요즘 툭하면 밥 대신 법을 들이대니 황당하고 난감하다.

내 말을 먼저 들어야 상을 차려주겠다는 건 골목대장이나 하는 우격다짐이다. 안전하게 밥 먹을 권리를 요구하는 노동자를 억누르는 건 그들의 상을 걷어차는 거다. 북한과는 ‘강 대 강’ 외길로 치달리며 긴장을 고조시킨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쟁 준비”라니, 대통령이 어찌 이렇게 노골적으로 전쟁을 말할 수 있나?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기 짝이 없다. 압도적 군사력을 갖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벌인 전쟁의 결과가 무엇인가? 전쟁은 소수의 권력자를 뺀 나머지 모두의 밥상을 파괴할 뿐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게 전쟁이다.

희망을 말하기가 참 어려울 때다. 그래서 더욱더 희망을 말하며 새해를 시작해야겠다. 짬을 내고 마음을 내어 소소한 상을 차려보자. 그렇게 차린 상에 둘러앉아 함께 희망을 길러내자.

조현철 신부·서강대 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