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희망이 있다면
어떻게 돌아가셨을지, 이런 너덜너덜한 세상을 두고. 부고를 들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큰 사람이 가고 나면 빈자리도 크게 느껴진다. 최근에 별세한 천병희 선생과 조세희 선생도 그랬다. 많은 이들이 각별한 추도사를 남겼고, 따라 읽으며 공감한 바도 있지만, 유명 인사들의 죽음 뒤에 으레 따라붙는 ‘한 시대가 끝났다’는 식의 패배주의적 평가에는 동의가 되지 않았다. 그건 한 사람의 죽음과 함께 한 시대를 묻어버리는 청산주의적 태도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건너온 이들은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남은 이들에게 그만큼 치열하게 물려주고 떠난다. 남은 이들은 자신에게 넘겨진 몫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두 분에게는 특히 언어에 대해 큰 빚을 졌다. 서양 고대 문헌을 보고 공부하는 철학, 정치학, 문학 등 전공자들은 천병희 선생의 고전 번역에 기대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나도 고대정치사상 전공자로 고대 희랍어 번역자가 되어 후세대의 디딤돌을 놓는 것으로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으려 했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도 살아남은 문헌연구자들은 하나의 단어를 붙들고 하루를 씨름하며, 한 문장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수많은 참고문헌을 뒤지는 고전 번역 작업을 한다. 오직 소수만이 읽을 책이고, 소수에게만 필요한 공부 같지만 이런 기초인문연구는 우리 공동의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수적인 연구다. 시대와 사회를 해석할 수 있는 풍부한 언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학 정책이 이러한 인문연구의 토대를 와해시키고 있다면 후학의 실천적 애도는 그에 맞선 저항이어야 할 것이다.
조세희 선생의 삶과 글은, 작가는 왜 존재하며 어떤 이들의 옆에 서 있어야 하는가를 아프게 물어온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당신은 누구를 위해 쓰는가.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두려워하며 품어야 하는 질문을 던져주었다. 현장 없는 글의 위험성을 경계하도록 일깨우고, 현장으로부터 길어 올린 사유와 언어의 깊이를 보여준 사람. 현장문학의 시대는 끝났다는 조사(弔詞)는 지금도 현장으로 달려가는 작가들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읽고 자란 글의 파동이 되어 그의 물음을 서로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자신이 떠난 자리를 더 많은 작가들이 채우고, 더 많은 문학과 예술이 노동계급의 편에 서기를 선생도 바랄 것이다.
나에게 ‘남은 이의 몫’ 중 하나는 인문학의 이유와 지금 필요한 인문정신을 다시 묻는 것이다. 국가가 언어를 발명하여 국민을 세뇌시키던 독재정권의 사상 통제는 자본이 언어를 창조하고 미디어와 시장을 통해 시민을 현혹하고 유통시키는 문화통치 시대로 넘어왔다. 비판인문학, 실천인문학 대신 번성하는 ‘스튜디오 인문학’은 연예오락 산업에 소재를 제공하는 ‘콘텐츠 소스’로 전락했다. 한편 사회운동은 언어의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전장이다. 그린뉴딜과 탄소중립은 자유주의 수사학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굿 거버넌스, 사회적 가치투자, 기업가정신, ESG 등 자본의 신조어들은 자산투자운용사와 시민단체를 넘나든다. 언어의 계급성과 정치성은 ‘다양한 언어의 자유로운 경쟁’을 촉구하는 언어시장주의 속에 용해되고, 언어시장주의자들은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의 언어들이 강압적이 아니라 ‘패셔너블’해졌다는 점을 간과한다.
저항자를 패배시키는 질문들도 보다 세련되고 정교해졌다. ‘가능한가?’ ‘현실적인가?’ ‘대안은 있는가?’라는 의문문은 ‘안 된다!’고 직접 금지하는 명령어보다 더 강한 규율을 작동시킨다. 하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말을 부수는 말(이라영)’도 끊임없이 재발명된다. 지난해 강력한 파동이 되어 다양한 저항 주체들에게 퍼져나간 “이대로 살 수 없다(유최안)”는 저 낡은 신자유주의 구호 “(자본주의 외에) 대안은 없다!”를 뒤엎는다. 한 노동자에게서 시작되어 자본주의와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 존재들이 공유할 수 있는 말이 되었다. 학자와 작가들은 이 말속에 사상과 이론과 형상을 불어넣어야 한다. 말을 힘으로 만드는 건 운동이다.
순순히 굴종하지 않는 ‘난장이’들이 없이는 조세희가 있을 수 없었고, 연극을 부자들의 안마당에서 꺼내 공공축제로 만든 아테네의 데모스가 없이는 천병희를 통해 읽는 고대 그리스 비극도 있을 수 없었다. 우리가 시대의 거장을 경유하여 만나야 할 존재는 바로 그들이다. 희망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있다. 다 망해버린 세상에서도 어디서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들이 나타나는 것인지, 나에게 인문학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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