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불안의 바다서 눈 덮인 산사 떠올릴 때
10년 전 겨울, 첫 회사를 그만둔 나는 <모비 딕>을 들고 어느 산사에 갔다. 책을 만들며 밥벌이를 하는데도 두꺼운 책을 읽을 여유가 없는 게 억울해서 홧김에 산 책이었다. 나는 두툼한 책을 책상에 놓아둔 채 연이은 야근을 견뎠다. 몸과 마음이 지쳐 탈진할 지경일 때 표지의 고래 그림을 보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면 차분히 이 책을 읽을 거라고, 나는 당장 도망치자며 아이처럼 조르는 자신을 어르고 달랬다.
그런데 모처럼 산사에 앉아서 읽기 시작한 <모비 딕>은, 슬프게도, 무지막지하게 재미가 없었다. 물론 당시의 내게 그랬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 책이 800페이지 내내 고래를 쫓고 싸우는 투쟁과 파멸과 분노와 우정의 이야기일 줄 알았다. 물론 그런 면도 있었지만, <모비 딕>은 고래에 대한 방대한 박물지이자 백과사전의 성격이 강했다. 고래의 어원과 옛 문헌, 포경선의 구조, 선원의 역할, 포경과 고래 해체 기술, 심지어 포경 도구에 이르는 상세한 정보를 저자 허먼 멜빌은 놀라운 솜씨로 소설의 서사에 결합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회사로 옮겨가기 전에 간신히 며칠의 말미를 얻어낸 나는, 굳이 고래를 째서 등잔 기름을 만드는 공정을 하염없이 읽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달랑 책 한 권만 들고 들어왔던 터라 딱히 시간을 보낼 다른 방법도 없었다. 함께 갔던 형은 그 책은 뭐길래 펼치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드냐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그러게 형, 이 책은 대체 뭘까, 왜 한참 읽었는데도 이 배는 출항할 줄을 모를까, 나는 왜 이걸 읽고 있을까. 지금도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하얀 눈이 소금밭처럼 쌓인 오래된 산사는 아름다웠다. 하루에 두 번씩 전나무숲 사이를 걷고 차를 마시다 보면, 고장난 탈수기처럼 돌아가던 머리도 조금은 평온해졌다. 당시 나는 서른을 넘긴 나이에 첫 회사에 들어갔고, 설상가상으로 몇 달 후에 간신히 ‘비평가’라는 명함을 얻었던 참이었다. 새벽 독서와 저녁까지 이어지는 노동, 밤의 글쓰기를 지속하는 일은 버거웠다. 불안과 피로가 오래 뒤섞이며 나를 갉아먹는 듯했다. 그에 비하면 눈 덮인 산사에서 <모비 딕>과 분투하는 일은 지루했지만 평온했다.
특히 산사에서 만난 어느 스님과 나눈 이야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난다. 이제는 이름도 법명도 기억나지 않는 젊은 스님의 대화법은 독특했다. 시도 때도 없이 두꺼운 책을 끼고 잠에 드는 중생이 세속의 피로와 불안을 호소하면, 스님은 그게 헛된 집착이라며 꾸짖는 대신 오늘날의 스님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하고 자기 관리를 해야 하는지를 푸념조로 말했다. 특히 ‘훤칠하고 독경도 잘하시는’ 스님들을 부러워할 때면, 그의 투박한 용모와 살짝 하이톤의 목소리 때문에 어리석은 중생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피식거리는 내게 스님은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절집도 보기에 예쁘다 뿐이지, 마음이 시장통이면 여기도 시장통이에요. 근데 시장통에 살아도 마음이 절집이면 절집에 사는 거고. 저는 그런 거 같더라고요.
물론 나는 여전히 시장통에 살고 있고, 피로와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지는 못했다. 가끔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거대한 고래를 뒤쫓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이곳에서 10여년을 버텨내다 보니 오히려 항해에 대한 의구심만 늘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따라잡으면 싸워 이길 수는 있나. 하지만 여전히 우리들은 배에 오른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피로와 불안을 카페인과 알코올로 달래면서.
겨울의 짧은 해가 저물어 항구에 일찍 정박할 때면, 나는 종종 눈 덮인 산사와 스님의 말을 떠올린다. 물론 절집의 마음으로 사는 것은 세속의 우리들에게 가능하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지독한 피로와 불안이 덮쳐올 때, 그 스님의 말을 떠올리는 일은 내게 적잖이 위로가 된다.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다 잠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도 그랬으면 좋겠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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