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 평론 [2023 신년특집]
이 세계의 거주자들, 온갖 종류의 창조물들, 인간과 비인간은 모두 나그네이다. 1)
1. 재난 속에 있는 지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는 수십 년 내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재난이 일상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2) 지구의 기온 상승은 곡물의 성장을 방해하여 곡물 수확량의 감소와 그로 인한 빈곤을 불러올 것이고 전염병을 퍼뜨리는 열대 지방 모기의 영역 확장은 유해 바이러스의 전파로 이어지게 된다. 기후변화가 불러올 농업과 경제의 불안정함은 사회 불안정으로 이어지며 국가 간의 분쟁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고에 앞서, 이미 우리는 재난 속에 있다. 산업혁명이 불러온 탄소배출은 산업혁명 이전보다 최소 100배나 빠른 탄소 배출 속도를 보이며 온난화를 가속화시켰다. 3) 20만년 전 처음으로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이후 고작 200년간의 짧은 시간 만에 인간은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었다. 인간 행위의 종류와 규모가 지구의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인류세(anthropocene)’ 4) 라는 지질학적 시대의 구분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파울 크뤼천은 인간의 행위가 지구 전체의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파괴할 정도로 강력해졌음을 경고하며, 지난 세기 중반 이후 인간은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한다.
지구 절멸의 위기에 다다른 인류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인간의 힘을 보다 더 강화하여 문제를 해결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위상을 축소시킴으로써 지구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이를 에코모더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대비로 설명한다. 5)
에코모더니스트들은 인류세의 도입이 인류의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의 결과라고 본다. 그들은 환경문제 역시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펼치며 자연을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수동적 존재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태양복사조절이나 탄소포집 기술의 불확실성은 환경에 어떤 부작용을 낳을지 모르는 실정이며 생태계가 교란되어도 자연은 회복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은 에코모더니즘의 한계를 나타낸다.
반면 에코모더니즘의 대척점에 있는 포스트 휴머니즘은 지구상의 다른 종과의 공존을 말하는 신유물론적 사고를 기반으로 인간과 자연의 분리라는 오랜 전통을 끝내고자 한다.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간이 자연·동물·기계와 같은 비인간(inhuman)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류가 지켜오던 인간중심주의를 버림으로써 재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은 90년대부터 시작된 생태시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생태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주제로 삼으며 환경오염으로 인한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는다. 6) 그 결과 생태시는 환경오염의 실상을 고발하고 인간을 위한 도구로 생각되어온 자연에 대한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기서 동식물과 같은 비인간은 여전히 인간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 취급되었다. 생태시의 비인간은 인간의 보호와 실천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 의존적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위계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반면 포스트 휴머니즘의 비인간은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서 인간과 동등한, 혹은 인간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종족간의 경계를 허문다. 단순히 타자가 아닌 모두가 동등한 객체의 자리에 있다는 포스트 휴머니즘적 인식은 다양한 생명체, 비-생명체들과 인간을 동등하게 바라본다. 이 관점에서 ‘비인간’은 자연이나 자연물과 같은 유기체 뿐만 아니라 기계, 기호, 관계망 등 지구상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해러웨이가 인간과 동물, 흙이 모두 퇴비에서 혼합되어 있다는 입장이나 베넷이 주장하는 비인간(쓰레기, 전기, 음식, 금속 등)의 사물-권력은 더 이상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말한다. 레비 브라이언트는 더 나아가 존재의 기본 단위체를 ‘기계’라고 말하며 비인간과의 격차를 줄인다. 그는 기계(객체)를 유형 기계와 무형 기계로 나누며 객체들의 범위를 더욱 넓히고 있다. 7)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비인간에 대한 관심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비인간-동물에서부터 시작된다. 젊은 작가들이 모여 펴낸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아침달, 2019)나 『그대 고양이는 다정할게요』(아침달, 2020)와 같은 반려 동물에 관한 작품들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 비인간과의 동등한 관계, 동물 윤리에 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유계영은 반려견의 감정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화자와 반려견의 마음이 같음을 확인하고, 정다연은 반려견과의 산책 속에서 겪는 차별을 반려견과 하나가 되어 넘어서고자 한다. 이장욱은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화자를 등장시켜 원숭이의 시에 인간이 소재로 등장한다는 전복적 상상력을 펼친다. 김복희는 새인간이라는 혼종 생명체를 만들어내는데, 생명을 구입하러 가면서도 새인간을 인격체로 대하는 이중적 태도의 화자와 인간을 위해 날지 않기로 결심한 비인간의 관계는 인간과 비인간의 이상하면서도 원활한 교류를 보여준다. 8)
임승유의 첫 번째 시집 10) 을 마주하면 마치 동화 속에 들어간 기분이 든다. 노파와 소녀, 모자와 아이, 스피어민트나 글라디올러스의 향기가 진동하는 시들 사이에서 소녀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마냥 몽환적이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소녀들은 언제나 약자로 존재하며, 소녀들이 겪은 사건은 밖으로 꺼낼 수 없도록 모자 속에서 벌어지고(「모자의 효과」), 꿈속에서 일어나며(「꿈속에 선생님이 나왔어요」), 물항아리(「투명한 인사」) 안을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다.
친척 집에 다녀와라/가족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해서 여자아이는 집을 나섰다//친척집에 간다는 건/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쓰는 일 모자를 쓰고 걸어갈 때 모자 속은 아무도 모르고 모자 속을 생각하면 모자 속이 있는 것만 같다 긁적이며 생쥐가 태어나는 것만 같다 고모와 당고모와 대고모의 발바닥으로 가득한/그런 친척 집이 있는 것만 같다//(…)사촌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 여긴 모르는 곳 구름과 이불 이불과 구름 잘못된 발음을 할 때처럼 최책감이 들어 풀잎과 꽃잎 꽃잎과 풀잎 우린 그만큼 가까운가요? 풀숲의 기분으로 달려도 도착하게 되지 않는다 모자 속에서는 나쁜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짓이겨지는 풀잎과 짓이겨지는 꽃잎 중에 뭐가 더 진할까? 피는 물보다 진할까? 친척이 물 한 컵을 줄 때는 숨을 참으면 된다 맛도 안 나고 냄새도 안 난다//(…)친척 집에 간다는 건/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그런 모자 속으로 사라지는 일 모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건 또 모자만 아는 일
- 「모자의 효과」 부분 (1시집)
소녀는 가족의 심부름으로 모자를 쓰고 낯선 길을 걷는다. 그러나 홀로 친척 집으로 가는 소녀를 지켜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장신구의 역할만 가능한 모자만이 소녀와 함께 있지만, 모자를 쓴다는 것은 소녀가 가족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소녀는 모자를 불쾌한 것으로 여긴다. 심부름의 과정에서 소녀는 여러 가지 폭력들과 마주한다. 소녀의 등 뒤에서 나타나는 삼촌은 어른만이 소녀를 볼 수 있고, 소녀는 어른을 보지 못하는 위치에 있어 가족 내의 소녀가 어른의 감시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사촌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성적 폭력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소녀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가족의 심부름을 거부하지 못한 것처럼 소녀는 어떠한 반항도 할 수 없다.
가족과 친척이 만들어낸 억압과 결핍은 소녀를 상상의 공간으로 향하게 만든다. 처음 소녀의 상상은 대부분 기분 나쁜 움직임으로 채워져 있다. 상상의 공간은 모자 속과 모자 속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어지러움을 만들어낸다. 모자 속에 등장하는 ‘고모와 당고모와 대고모’ 역시 소녀와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아닌 소녀와 멀어지는 관계이다. 관계없는 친척들의 발바닥이 가득한 공간은 상상 속 공간에서조차 소녀가 가족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 상상 속 공간에서 소녀는 친구를 발견하게 된다. 소녀의 친구는 인간이 아닌 ‘비인간’ 친구들이다. 소녀는 작은 친구들을 상상 속에서 만남으로써 현실의 위협과 억압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모자를 멋진 잠자리로 생각하게 만드는 작은 고양이는 모자를 쓴 소녀의 상황을 벗어나게 만들고, 모자 속에서 태어나는 생쥐는 상상 속 공간을 인간이 아닌 비인간들로 채워버린다. 사촌이 몸 안에 침범하거나, 친척이 주는 물을 받아 마셔야 할 때에도 식물이 등장하여 소녀를 돕는다. ‘풀잎과 꽃잎’을 되뇌며 불쾌한 사촌에게 의문을 던질 수 있게 하는 것, ‘짓이겨지는 풀잎과 짓이겨지는 꽃잎’을 생각하며 친척이 주는 물을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은 풀잎과 꽃잎의 일이다. 소녀가 불쾌하게 생각하던 모자 역시 소녀의 비밀을 담아내는 비인간-친구가 되어 소녀의 상상을 모자 속에 기록하고 수많은 비인간 친구를 만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작은 비인간들은 어느 곳으로도 탈출할 수 없는 소녀를 위로하며 소녀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소풍이라도 가자는 것처럼 말하니까//호루라기가 생각났다 호루라기를 부니까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피가 돌기 시작했다 손끝까지 가서 불끈 쥔 주먹이 될 거야 숨이 턱까지 차오를 거야 핀셋으로 아스파라거스를 뽑아냈다 목에 걸린 달리아가 호루라기는 고여 있다고 말한다 하늘이 텅 비었다고 말한다//지렁이도 질병사를 할까 귀뚜라미는 구름은/더 작아지고 싶다면 약국에 가는 거다 약국은 알약들의 세계 분말들의 세계 목구멍의 세계//의자처럼 창백하다는 건 뭘까//에 대답하기 위해 우린 약국에 가고 있었던 거잖아//(…)오렌지가 먹고 싶었다면//우리 소풍 갈까/그렇게 말하지 그랬니
-「우리 약국 갈까」 부분(1시집)
다른 이와의 대화중에도 소녀는 상상의 공간으로 빠져든다. 소녀의 상상 속 공간은 호루라기라는 작은 사물에서 시작된다. 호루라기에 숨을 불어넣으면, 호루라기에서 뻗어 나온 소리가 노을을 번지게 하고 노을이 번지는 것처럼 피를 돌게 한다. 조물주가 세계를 빚는 것처럼 영향력을 뻗는 작은 호루라기는 심장에서 먼 손끝까지 피를 돌게 하는 것이다. 손끝까지 이른 비인간의 영향력은 소녀가 주먹을 쥐게 하고 소녀를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움직이게 만든다.
호루라기로부터 생명을 받고 달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녀의 관심은 지렁이와 귀뚜라미, 구름과 같은 비인간으로 옮겨간다. 지렁이와 귀뚜라미, 구름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적 흐름이 아닌 ‘질병사’와 같은 개별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소녀는 자신을 점점 더 입자로 만들어버리는 목적지인 약국을 떠올리며 다시, 대화를 나누던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소녀가 약국을 향하면서도 소풍을 가자는 것처럼 말하는 상대방의 말을 짚어내며, 솔직해질 것을 권유할 수 있는 것은 소녀를 움직이게 하고 소녀에게 용기를 주는 비인간 친구들 덕분이다.
한편, 온갖 비인간들의 범람 속에서 소녀는 자신을 지탱해줄 비인간 친구를 찾아낸다. 작은 식물과 작은 사물들의 목소리는 소녀에게 가 닿았고, 소녀의 행동을 이끌어냈다. 때문에 소녀의 본격적인 움직임은 식물과 사물이라는 비인간들과 함께 시작된다.
시에서 나타나는 식물들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바람이나 비, 햇빛, 또는 인간의 손길에 의해서만 성장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제 식물은 웅크렸던 몸을 펴고(밖에서 자라는 것들은 웅크리고 그러다 때를 만나면 있는 힘껏 갈 데까지 가버린다. - 「중앙교육연수원」) 인간을 덮치는 등(내가 물을 주지 않았는데도 길게 자라는 풀숲이 있고//어느날/풀숲이 나를 덮친다는 장면에서는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 「산소」) 비인간의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식물이 정적이라고 생각되던 고정관념은 임승유 시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비인간-식물은 항상 자라나고(나무는 자라고 자라서 길 끝에 서 있는 나무가 되고 – 「표현」) 인간의 바깥으로 걸어 나간다.
비인간-식물의 적극적인 개입은 소녀가 상상으로만 꿈꿔온 세계의 탈출을 가능하게 만든다. 소녀는 가족의 그늘에 갇혀있던 어린 아이가 아닌, 비인간과의 소통이 가능한 성인이 되어 현실에서도 자신의 신체를 식물처럼 바꾸며(울타리를 지날 때 나도 모르게 쥐었던 손을 놓았다. 나팔꽃의 형태를 따라 한 것이다. - 「근무」) 비인간과 닮아가고, 비인간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계로 시선을 돌린다.
화원이 들어섰다. 화원에는 화초가 있고 사람도 있다. 화초는 많고 사람은 둘이다. 둘은 번갈아가며 일한다//일하지 않는 날 화초를 사러 가면 일하는 한 사람이 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화원에 다녀오면 화초가 는다. 키 크는 화초와 옆으로 버는 화초와 아래로 늘어지는 화초와 일을 하려고 하는 내가 일정한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한다.//죽이지만 않는다면 살아 있다.
-「새로운 현실」 전문 (2시집)
성인이 된 화자는 식물과 인간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비인간을 통해 마주한 화원은 더 이상 인간이 주인이 아니다. 화원은 우선 화초가 있고, 그 뒤에 ‘사람도’ 존재하는 곳으로 화원의 주인을 인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게 된다. 많은 화초와 대비되는 소수의 인간들을 통해 인간의 존재보다 식물의 존재감은 더 크게 다가온다.
화원의 구성은 화자가 원하던 세계에 가깝다. 화원은 인간들로 빽빽하게 채워지고 비인간들이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아닌, 비인간들이 더 많은 공간을 채우며 인간과의 공존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화원에서 화초를 계속 데려오며 자신의 집을 인간이 아닌 비인간으로 채우고자 한다.
화원에서 화자의 집으로 자리를 옮긴 식물들은 정적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곧게 위로 자라나든, 수평적으로 넓게 퍼지든, 잎사귀가 계속 아래로 길어지든 모습은 다르지만 식물들은 화자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일정한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화초와 ‘나’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생활방식을 가지는 동등한 관계가 된다.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화초들을 보며 화자는 비인간 역시 능동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죽이지만 않는다면’에서 나타나는 비인간들을 향한 애정은 정적으로 보이는 비인간이라 하더라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으로 채워진 삶은 어느 때보다 비인간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일으키며 화자는 세계가 인간만이 아닌 인간과 비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각인시킨다.
자작나무를 심었다. 자작나무 옆에 자작나무를 심고 하루 종일 심다가 해가 넘어가면 다음 날 와서 심었다. 때리는 것 같았다. 맞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된다고 그만 집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앉아서 울다가/자작나무를 심기 시작한 후에는 자작나무 밖에는 아무도 없어서 누운 자작나무를 일으켜 세워가며 자작나무를 더 심었다. 자작나무를 다 심을 수 있을 때까지는 세상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자꾸 누우려는 언덕을 일으켜 세우다 보면 자작나무가 자작나무를 앞서가는데/그때부터 먼 곳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새」 전문 (3시집)
비인간들이 살아있는 세계에서 화자는 비인간에게 의지하게 된다. 자작나무를 반복해서 심는 행위는 소녀가 상상 속에서 비인간을 통해 위로받던 것을 현실로 옮겨온 것이다. ‘때리는 것’, ‘맞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 등 화자의 울음을 유발하는 사건들은 자작나무 심기를 통해 해소된다. 자작나무를 심기 시작한 후로 ‘자작나무 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은 화자의 세계를 지속시키고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비인간이라는 고백이다.
비인간 늘려가기는 이제 화자의 삶의 목적이 되어 자작나무를 다 심을 때까지 세상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끌어낸다. 그렇게 점점 더 비인간에 의지하는 화자의 앞에서 비인간은 한 번 더, 움직인다. ‘자작나무가 자작나무를 앞서가는’ 움직임은 비인간이 인간의 손에 의해 길러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스스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1시집에서 예고되었던 나무의 일(나는 거기 남겨놓고//나무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아래로 더 아래로-「나무가 하는 일」)의 연장으로 식물의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다. 끝없이 뻗어 나가는 자작나무는 인간을 ‘앞서나가며’ 인간의 테두리를 벗어나, 먼 곳으로 향하며 비인간 늘리기에만 매달려 있던 화자에게 멀리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독립적인 비인간은 독립적인 인간을 만들어낸다. 비인간은 어느 한 생명에게 의존하거나 기생하지 않고 그 자체로도 설 수 있음을 스스로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인간의 행동을 통해 화자는 비인간을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 비인간과 동등하게 관계 맺고 먼 곳으로 가는 비인간을, 확장되어가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소녀가 그토록 바라던 평평한 관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4. 감싸 안는 사물들
소녀가 기대던 비인간 중 하나인 식물이 운동성을 가지고 소녀의 곁에서 움직이고, 멀리 길을 뻗어 보여준다면 사물이 소녀를 위로하는 방식은 그와 다르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비인간-사물들은 인간과 함께일 때 망가지고 사라지는 소녀를(「투명한 인사」) 제자리로 돌려놓음으로써(라이터를 살 때마다/어딘가에 두고 온 내가 생각났다 - 「라이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소녀를 소녀답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사물은 항상 그 자리에 ‘있음’으로서 자신을 잃어버린 소녀를 되찾아주는 기준점이 되었다. 이제 성인이 된 화자 앞의 사물은 화자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화자와 시선을 교환하고 일어서는 자세를 갖으며(「네가 이야기를 마치고 나간 후」)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오래되었다.//노출되었고 옮기려면 나 혼자는 안 되지만 여럿이 달라붙으면 한꺼번에 치울 수 있는//그것은//내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있었다. 가만히 두면 감자에 싹이 나는 물건이 아니라서 뭘 하는지 몰랐지만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던//그것은//더는 사용할 수 없는 크기로 있었다. 이제 나는 그것이 옆에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옆에 두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 「물건」 전문 (2시집)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는 사물들은 화자에게 안정감을 준다. “나와 있는 그 사람이 보였다. 그 보다 먼저 나와 있는 의자가 보였다. 날마다 앉아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건//좋아서다”(「미래가 무섭다」)와 같은 고백은 화자가 인간에게서 안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어 있는 사물에서 안정감을 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물건」의 사물은 화자가 자신을 보며 그저 안정된 상태로 있도록 하지 않는다. 물건은 부피를 팽창시키고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물-권력 11) 의 힘을 발휘하며 화자가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인간으로 발돋움하게 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은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켜왔다. 화자는 그런 사물을 보며 인간의 힘을 합치면 옮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오래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화자는 물건의 겉모습을 오랫동안 보아왔다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뭘 하는지’ 모를 정도로 물건의 실제 쓰임새를 알지 못한다. 사물의 능력을 모르는 화자 앞에서 사물은 ‘사용할 수 없는 크기’가 되어 화자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부피를 변화시킨 물건 앞에서 화자는 비인간-사물을 더 이상 전과 같은 오래된 물건으로 볼 수 없게 된다. 이제 화자에게 비인간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 세계는 인간으로만은 구성될 수 없음을, 인간과 비인간은 함께 살아가야함을 상기시킨다.
행동하는 사물들은 점점 더 화자와 가까이 맞닿게 된다. 그중에서도 옷은 사물이 인간 화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했을 때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두 팔을 감싸 안으며//카디건을 걸치면 더 있을 수 있을 텐데. 말해보는 여기. 여기는 마음에 든다.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물이 없어서 물을 따라왔다. 물은//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질이고//카디건의 성질은 따뜻하다. 알맞게 높은 온도는 마음이 놓인다. 마음을 놓자 뭔가 달라진다. 변한다. 여기서 여기를 놓친다. 여기를 돌려놓으려고//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 「여기」 부분 (3시집)
옷은 개별적인 사물이면서도 화자의 몸에 입혀질 때 화자에게 새로운 의식의 흐름을 선사한다. 슬림 브이넥 리넨 원피스는 블랙 원피스를 입은 화자를 ‘편하고 안전한 세계에 빠져’(「어두운 구석」)들게 하고 원피스와 양말과 운동화의 조합은 화자에게 웃음을 주며(「생활 윤리」) 화자의 삶을 지속시킨다.
「여기」의 화자가 있는 곳은 차가운 온도를 가진 공간이다. 화자는 이 공간에 더 오래 있기 위해 카디건을 걸친다. 카디건은 화자를 공간에 더 머무르게 하기 위한 사물이었으나, 카디건을 걸친 후 공간에 집중하던 화자의 마음은 카디건으로 옮겨간다. 카디건이 주는 온도는 공간이 주는 온도와 다르다. 따뜻하고 ‘알맞게 높은 온도’는 화자의 체온을 변화시키며 화자가 있던 공간을 다른 곳으로 만든다. 차가운 온도의 공간은 화자가 계속 머무르기엔 춥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 곳이었으나 옷이 화자를 감싸는 순간 화자의 ‘마음이 놓이’는 효과가 나타난다. 비인간-사물과 화자의 접촉은 현실의 공간에 화자를 계속 머무르게 하며 화자의 심경을 변화시키는 힘을 보여준다.
물을 따라오는 화자의 모습에서 카디건으로 화자의 관심이 이동하는 것 또한 화자에게 사물이 어떤 위치인가를 나타내는 대목이다.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질’인 물에서 카디건으로의 시선 전환은 물은 신체활동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질이지만, 카디건이라는 비인간은 인간에게 체온을 전하며 마음을 놓이게 하는, 물과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사물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화자에게 옷은 나와 떨어져 있는 비인간이 아닌, 나를 감싸 안으며 같은 삶을 살아가는 비인간이다.
패딩을 걸치며 ‘어떻게든 걸치면 세상 따뜻하다. 세상도 그랬으면 좋겠는데’(「피아노」)라고 말하는 화자에게서 우리는 비인간을 통해 비인간처럼 따뜻한 세상을 바라는, 자신만 비인간과 함께하는 것이 아닌 더 많은 이들이 비인간과 함께할 세상을 바라게 되는 인간을 만나게 된다.
5. 객체들의 세상을 향해
인간보다 앞서 걸어 나가고, 인간을 감싸 안는 비인간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발견하는 일은 비인간들의 능동성을 통해 인간의 축소된 위치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인간들이 상상의 세계에 갇혀 있던 소녀를 현실로 꺼내고, 화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과 달리 인간은 비인간에게 의지하여 삶을 지속시키고, 무너져가는 자신을 회복시킨다. 이렇게 작아진 인간의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은 비인간과의 평평한 관계가 가능한, 비인간들과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위치를 갖게 된다.
임승유는 비인간의 도움으로 어른이 된 화자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지우고자 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을 지우는 것은 화자가 꿈꾸었던, 더 많은 비인간과 인간들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계속 보고 있으니까//가까워졌다.(…)비가 많이 온 어느 날은 문을 열고 들어’(「경찰서」)가는 화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지 않는 객체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인간을 볼 수 있다. 이는 식물, 사물과 같은 비인간들의 만남에서 그치지 않고 건물이나 장소와 같은 지리적 특성을 가진 거대한 객체와도 관계 맺고자 하는 노력이자 인간의 이름을 내려놓고 기꺼이 객체에 속하려는 시도이다. 행동하는 비인간들과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임승유의 시는 이제 객체로 섞이며 시작될 것이다.
<끝>
2)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김재경 역, 『2050 거주불능 지구』 , 추수밭, 2020.
3) 위의 책, 17쪽.
4) 이 용어는 1980년대에 미국의 생태학자 유진 스토머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그는 인간의 행위가 지구 변화에 미치는 변경 효과가 증대하고 있다는 증거를 대기 위해 이 용어를 도입했다. 이후 2000년에 들어서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스토머의 생각에 동의하며 ‘홀로세’ 대신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학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역,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2021, 82쪽.
5) 클라이브 해밀턴, 정서진 역, 『인류세』, 이상북스, 2018, 140-141쪽.
6) 유성호, 「생태 시학의 형상과 논리」, 『문학과 환경』 6(1), 문학과 환경학회, 2007, 102-103쪽.
7)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며 일정 시간 존속하는 기계는 유형기계로 바위, 풀, 인체, 시설, 냉장고 등이 있다. 대조적으로 무형 기계는 반복 가능성, 잠재적인 영원석, 동일성을 유지하며 다양한 공간과 시간에 동시에 나타나는 요리법, 악곡, 숫자, 방정식, 과학 및 철학 이론, 문화 정체성, 소설 등을 말한다. 레비 R. 브라이언트, 김효진 역, 『존재의 지도』, 갈무리, 2020, 52쪽.
8) 이상 인용한 작품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유계영,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문학동네, 2019; 정다연,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창비, 2021;이장욱,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현대문학, 2018; 김복희,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민음사, 2018.
9) Bruno Latour, Facing Gaia : Six lectures on the political theology of nature Being the Gifford Lectures on Natural Religion Edinburgh, 18th-28th of February 2013.
10) 이 글에서 대상으로 삼는 임승유의 시집은 1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문학과 지성사, 2015), 2시집 『그 밖의 어떤 것』(현대문학, 2018), 3시집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문학과 지성사, 2020)이다.
11) 『생동하는 물질』, 38쪽.
글을 쓸 때마다 투명함의 의미를 배워갑니다. 가려진 존재를 발견해나가는 언어와 투명해지는 세계를 마주하면서 저도 투명에 가까워진 기분이었습니다.
왜 글을 쓰냐는 물음에 이제는 답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 곁에 있어 왔던, 시라고 부르는 불완전한 것을 사랑합니다. 여리고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끝내 견뎌내는 아름다운 것들을 말입니다. 시의 곁에서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한 시간을 지켜봐주신 문혜원 선생님, 오래도록 선생님의 제자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비평에 대한 자세와 다정한 조언들을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언제나 따뜻한 격려를 건네주신 국문과 선생님들과 부족한 글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성실하고 끈질기게 써나가겠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웃음을 짓게 해준 남편, 우리가 함께 건너온 시간들을 잊지 않을 겁니다. 나의 기쁨과 슬픔을 안아주는 다현과 찬율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기꺼이 도움을 주시는 가족들과 온기를 나눠준 오랜 친구들에게도,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과 위로와 기도를 보내주는 많은 분들께도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 영원한 감사를 드립니다.
29편의 응모작 가운데 끝까지 선자를 고민케 한, 도전적인 작품은 세 편이었다. ‘행동하는 비인간들의 힘: 임승유론’(황사랑), ‘어느 윤리주의자의 우이의 시학: 전동균론’(김석포), 그리고 ‘동시성과 잠재성의 라니아케아: 김보영론’(황지)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독특한 비평 장면을 보여주었다.
임승유론은 인간 중심의 역사를 비판하면서 식물과 사물들, 비인간들의 독자적인 세계를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고, 전동균론은 순수 자유의 현상학적 철학의 세계를, 김보영론은 SF소설의 문학적 당위성의 세계를 묘파하거나 역설하고 있어 우열을 가르기 힘들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임승유론은 그중 가장 조용한 논리를 펼쳤는데, 다른 두 편의 역동성과 치밀함에 비해 다소 유약한 느낌이 들지만 인간성의 과잉에서 유래하고 있는 재앙의 시기에 재난의 세계를 구원하는 대안적 관점의 제시가 새롭고 신선하다. 김보영론은 문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힘 있는 구성을 보여주지만, 그런 만큼 곳곳에 다소 무리한 논리와 난해성이 없지 않았다. 전동균론은 철학적 인식의 깊이가 전동균 시세계 분석이라는 실제 현장과의 어울림을 덮어버리는 큰 모자가 된 감이 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다른 분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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