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보수파 핵심으로 ‘생전 사임’ 파격…세계가 애도 물결
10년 전 바티칸 비리 논란 속
700년 만에 이례적 자진 사임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이 95세를 일기로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오전 9시34분 선종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자진 사임한 역대 두 번째 교황이다. 그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전한 마지막 메시지는 “믿음 안에 굳건히 서라”였다.
교황청 공보실이 선종 발표 이후 10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공개한 2쪽 분량의 영적 유언은 베네딕토 16세가 즉위한 뒤 1년 후인 2006년 8월29일 독일어로 작성됐다.
베네딕토 16세는 우선 “어떤 식으로든 내가 잘못한 모든 사람에게 온 마음을 다해 용서를 구한다”고 밝혔다. 유언 작성 당시 79세였던 그는 “인생의 늦은 시기에 내가 살아온 수십 년을 되돌아보면 감사해야 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신자들을 향해 “믿음 안에 굳건히 서라”며 “자신을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고 촉구했다.
대중에 사랑받진 못했지만
유능한 신학자로 평가받아
유언장엔 “믿음 안에 굳건히”
베네딕토 16세의 본명은 요제프 라칭거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됐다. 당시 나이 78세로, 클레멘스 12세 이후 275년 만의 최고령 교황이자 482년 만의 독일인 교황이었다.
동성애·이혼·임신 중단 반대
이슬람 등 타 종교와 갈등도
교황청 보수파의 핵심이었던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바오로 6세 이후 폐지된 교황 의상을 다시 착용하는 등 전통을 되살리는 데 힘썼다. 동성애, 이혼, 여성 사제 서품, 임신 중단 등에 반대하는 전통적 시각을 고수했다. 2009년 “콘돔이 에이즈를 확산시킨다”고 발언해 빈축을 산 적도 있다. 환경보호를 주장하고 신자유주의는 단호히 비판했다.
베네딕토 16세는 한반도 문제에 여러 차례 관심을 보였다. 2006년에는 교황청 주재 일본 대사인 우에노 가게후미에게 “한반도의 비핵화를 이루기 위한 모든 노력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고, 2007년에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분단으로 고통받는 분들에게 제가 영적으로 함께하고 있음을 알려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베네딕토 16세는 8년의 재임 동안 타 종교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2006년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일부 가르침이 악마적이라고 쓰인 중세 문헌을 인용해 이슬람 국가들의 반발을 샀고, 2009년에는 홀로코스트를 부인한 영국인 주교를 복권시켜 유대계의 비판에 직면했다.
사제들의 성추문 사건 등이 잇달아 폭로되며 교회가 대내외적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2012년 베네딕토 16세의 집사 파올로 가브리엘레가 성직자들의 뇌물 비리 등을 담은 기밀 문서를 공개해 논란에 휩싸이는 일도 있었다.
이듬해인 2013년 2월 베네딕토 16세는 건강 문제로 더는 직무를 수행할 힘이 없다며 스스로 물러났다. 교황의 생전 퇴위는 1415년 그레고리우스 12세 이후 598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특히 자진 사임은 1294년 첼레스티노 5세 이래 처음이자 현대 들어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는 퇴임식도 없이 물러난 이후 ‘명예교황’이라는 직함으로 바티칸의 한 수도원에서 지내왔다.
그는 전임 요한 바오로 2세나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대중에게 사랑받지는 못했지만 유능한 신학자로 평가된다. 사제 시절이던 1963년부터 사임한 2013년까지 6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그는 사임 이후 “실질적인 통치 분야는 나의 강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명백한 취약점이었다”며 “나는 영적인 질문에 대해 성찰하고 명상하는 교수에 가깝다”고 했다. 보수적인 베네딕토 16세와 개방적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야기는 2019년 영화 <두 교황>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퇴임한 전직 교황의 장례 절차에 대한 규정은 따로 없으나 외신들은 베네딕토 16세의 장례식이 현직 교황의 장례 절차에 준해 치러질 것으로 관측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장례미사를 집전한다. 교황은 생전 자신이 묻히고 싶은 곳을 지정할 수 있는데, 베네딕토 16세는 전임 교황 대다수가 묻힌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지를 지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 “믿음과 헌신 기억”
한국 천주교도 조문단 파견
세계 각국에서는 애도 성명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모국인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는 “그는 독일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 교회 지도자였다”고 밝혔다. 가톨릭 신자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믿음과 원칙에 따라 일평생 헌신한 저명한 신학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바티칸과 불편한 관계가 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조전을 보냈다.
한국 천주교도 애도의 성명을 발표하는 등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을 추모했다. 명동대성당은 1일 베네딕토 16세를 기리는 분향소를 마련했다. 한국 천주교는 염수정 추기경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오는 5일 바티칸에서 열리는 장례미사에 파견한다.
오경민·박용하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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