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견을 듣는다] "`바보 고종` 조선총독부가 만든 것… 근현대사 바로잡아야 미래있어"

이규화 2023. 1. 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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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대사 연구 가장 불안… 고종의 개혁적 정치 내용 전부 다 배제
민주공화정 뿌리는 128년전 고종의 교육조서에 담긴 '자유 국민' 정신
尹정부, 日과 역사·인권·경제문제 한번에 풀 만루홈런보다 3안타 효과
이태진 한국역사연구원장 고견 인터뷰. 박동욱기자 fufus@

[]에게 고견을 듣는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백암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과 같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면 잃은 나라도 되찾는다는 권업(勸業)의 의미로 말했다. 다시 100년 전 역사를 돌아보며 오늘의 대한민국 위기 극복을 얘기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에 들어섰지만 국민의 행복도는 OECD 최하위권이다. 이념과 계층, 세대, 지역 갈등은 여전하다. 밖으로는 약육강식 혼돈의 국제질서가 도래했다. 대외의존 경제 대한민국이 생존해 완연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지도자와 국민 모두 투철한 각성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길이 보인다. 근현대사에서 국가적 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왔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우리 근현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국민적 자부심과 통합을 이룰 수 있다"며 "우리가 현재 채택하고 있는 민주공화정의 뿌리는 128년 전 1895년 고종의 교육조서에 담긴 '자유 국민' 정신에서 연원하고, 그것이 그간 위기에서도 살아남게 한 에너지였다"고 해석한다. 이 교수는 니어재단이 지난해 6월 국가원로와 현역학자들이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놓고 벌인 토론 내용을 지난달 책으로 묶은 '한국의 새길을 찾다'에서 근현대사의 여실한 실체와 의미를 제시했다. 이 교수는 "자발적 근대화 노력으로 '자유 민'을 상정한 조선 말과 대한제국의 역사가 있었기에 일제 압제 35년을 견디어낼 수 있었다"며 "비록 북한이 다른 길로 가버렸지만, 자유민주주의 국체가 우리의 힘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를 만나 근현대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견을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달 27일 오전 서울 서초동 이 교수가 운영하는 한국역사연구원에서 가졌다.

대담 = 이규화 논설실장

-올바른 근현대사 인식이 왜 중요한가요. 교수님은 '근대와 현대를 잇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근대를 실패한 거울로만 거론한다'고 비판하셨는데요.

"우리가 걸어온 길이 정말로 험난하고 치열한데, 특히 1980년대 민주화 이후 양극화현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국민들이 뭘 해야 되는지, 한번 왜 이러는지 성찰도 할 상황이 됐고 사실은 좀 정리가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역사학자로서 유일하게 책 편찬에 참가를 했는데, 근현대사를 연결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습니다. 역사라는 거는 쉬운 표현으로 비유를 하자면, 항해하는 배가 방향을 잡는 겁니다. 방향이 잘못 잡히면 엉뚱한 데로 갈 수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전체 내력이지만 현재의 좌표를 읽기에는 근대사가 제일 필수 시기입니다. 역사에서 좌표 측정은 고성능 기계가 있어 그냥 찍으면 고맙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좀 긴 시간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우리 근대사 연구가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인가요.

"한국역사학계의 근대사 연구가 제일 불안합니다. 이 시기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굉장히 많았고요. 좋은 일 나쁜 일, 특히 나쁜 일이 포함돼 있는 역사여서 그만큼 더 철저해야 되는데, 사실은 그 시대를 연구하는 사료에서부터 문제가 있었어요. 쉽게 얘기하면, 고종시대 실록과 순종 실록이 있지만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겁니다. 편찬자가 조선총독부라는 데서 편찬 의도가 절로 나타나죠. 일제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그런 방향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죠."

-그동안 배운 근대사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사료를 기초로 쓰였다고 보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최근에 고종실록 편찬 경위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는데, 짐작은 했지만 구체적으로 확인이 됐는데, 고종시대 때 있었던 많은 일들에 관한 사료를 모으기는 했어요. 많이 모았어요. 일종의 충실한 작업을 한다는 제스처였죠. 고종 정부가 1880년 이후 특히 청일전쟁이 막바지에 있었던 1895년부터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까지 10년간 상당한 개혁적인 정치가 많이 취해졌습니다. 그 개혁과 관계된 기록이 지금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자료 속에 있습니다. 수천 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종실록 편찬에) 전혀 안 넣었어요. 전부 다 배제됐어요."

-일반인이 보기에도 납득가지 않는 일입니다.

"자력 근대화 역사가 현재 인용되는 고종실록에는 전혀 반영이 안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구자들이, 사실은 이건 학계의 얘기입니다만 조선시대부터 역사의 흐름을 보고 이 시대를 보는 거 하고, 근대사라고 해서 1870년대 이후, 예컨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개국한 시기부터 딱 잘라서 보는 거 하고는 연구 시각이 전혀 다른 겁니다. 특히 18세기에 영조 정조 시대를 보면 절대로 망할 나라가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보는 것과 자학적 역사관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영·정조 시기 그 입장에서 고종시대를 보면 '왜 조선은 망했을까'하는 의문이 계속 듭니다. 그러나 1875년부터 보게 되면 결과를 추종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결과를 토대로 원인을 추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부연설명'이고 자기 개발의 근대화 정책, 이런 것은 눈에 덜 들어오는 겁니다. 결국 항일전선에서 민족사의 자부심을 찾는 독립운동 역사, 의병 역사 이런 것에 역사의 초안이 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개인 개인의 영웅적인 투쟁 이런 걸 찾게 되죠. 그러니까 전체 역사에서 부분만 보게 된다는 얘기죠. 그래서 저를 포함해 몇몇 사람은 조선시대를 공부하다가 밑으로 내려왔어요.(웃음)"

-교수님께서는 연구영역과 주제가 매우 넓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조선이 망할 나라가 아닌데 왜 이렇게 됐나 원인을 들여다보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일본의 침략주의가 세계 역사상 단순한 제국주의가 아니었다는 데 이르렀습니다."

-서구의 일반적 제국주의 형성과정과 달랐단 말씀인가요.

"일본이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빨리 서구 기술 문명을 배워가지고 그 힘으로 주변국을 먼저 차지해야 된다는 주변국 선점론을 메이지유신 이후 국시로 삼았어요. 그 이론을 낸 사람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선생이잖아요. 얼마 전에 저격당해 죽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고요. 이 사람이 유수록(幽囚綠)이란 책을 써놨는데, 제일 먼저 타이완 그리고 조선, 북으로 가서 만주 몽골 중국 그리고 다음에 태평양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했어요.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로 진출해야 된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놀라운 건 그 안을 제자와 후진들이 순서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실천했다는 거죠. 이런 사실을 제가 봄에 낸 일본 식민역사 비판총서(일제식민사학비판총서 8권)에서 밝혔습니다."

-일본 역사학계도 자신들의 식민사학에 관한 연구가 축적이 돼있습니까.

"일본 역사학계는 그걸 문제 삼지 않아요. 그걸 반성적으로 드러내 일본제국의 파시즘에까지 이른 침략의 역사를 자체 비판을 해야 되는데, 그걸 안 합니다. 이게 왜 그렇게 됐느냐면 국체(國體)로서 천황의 권위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사회적인 공론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언으로 일관해요. 소수의 학자들이 특히 피해국인 한국사 연구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그런 점을 비판적으로 얘기하면 마이너리티로 덮어 버려요."

-일본이 과거 식민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다가고도 잊힐 만하면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또 망언이 나옵니다. 그 배경에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돼 있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놀라운 건, 우리는 피해자로서 왜 일본이 우리를 침략했는가를 더 철저히 연구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찍 근대화를 해서 우리보다 힘이 강해졌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당연히 우리가 패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며, 고종시대가 바보의 역사 아니냐고 스스로 힐문합니다. 고종황제는 국가원수로서 바보였다. 이 역사는 정말 버리고 싶은 역사다. 이런 식의 논의가 일반화돼 있죠. 여기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학계의 숙제인 거군요.

"일제가 35년간 또 침략 준비 기간 때부터 이미 우리한테 퍼뜨린 거예요. 그들이 주입한 그런 단편적인 역사 사실, 이런 것들이 이 시대 역사의 본체처럼 배포됐습니다."

-교수님 칼럼에서 읽은 건데, 일본 도쿄대의 교수가 서울대 강연에서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한반도 식민사에 대해 학자적 양심을 찾을 수 없다고 한 일화가 있던데요.

"저를 도쿄대학 한 학기 방문교수로 초청한 답례로 동경대학 교양학부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다카하시 데쓰야를 초청해 강연을 부탁했어요. 그런 의미의 얘기를 하더라고요. 결론에 가서 일본에서는 국가와 천황에 관한 문제에 저촉이 되면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입을 다문다고요. 터부가 돼 있는 거지요. 천황이 제국시대에 거의 신적인 존재였어요. 패전 후에 인간 선언을 했지만, 전체적 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점은 일본 역사철학 인문사회학 발전의 발목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데쓰야 교수가 흥미로운 말을 했는데, '민주화가 훨씬 앞선 한국이 우리를 좀 도와줘야 되겠다'는 조로 얘기를 했습니다. 참 일본을 위해서는 안타까운 일이죠."

-교수님은 우리 민족이 정의감이 남다른 민족인 것 같다고 하셨는데요. 하나의 예로서 세계 어느 국가의 역사에도 언관(言官)이 3개나 있고 왕에게 수많은 상소가 빗발쳤던 경우는 없었다면서요.

"우리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강하죠. 고종시대에 유명한 유학자로 알려져 있는 이건창의 '당의통역'이라는 책에 그 점을 비판 반성적으로 썼어요. 왜 이렇게 조선 역사에서 당정이 심했느냐, 그 이유를 드는데 여덟 가지를 들었어요. 첫 번째가 시비지심이 너무 강하다는 거였어요. 이 탄알만한 땅에서 어떻게 엄청난 전쟁이 일어날 수가 있느냐는 얘기인데,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 거죠. 우리는 조선시대에 앞서 고려시대에도 언관이 발달해 있었어요."

-유교의 영향으로 봐야 하나요.

"모든 유교 정치제도는 중국에서 시작하잖아요. 그런데 실제 활용은 조선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활용됐어요. 저쪽에는 한번 일어났다가 주저앉는 경우가 다반사예요. 주자(성리학)도 일어났다가 결국 중국에서는 주저앉았잖아요. 조선에서는 주자를 받들거나 끝까지 고수를 했어요. 우리에겐 이런 철저성 같은 게 있어요. 조선이 건국 돼서 중국의 언관제도를 도입해서 쓴 고려제도를 그대로 쓰다가 언관을 3~4개로 더 증설하잖아요."

-언로가 그만큼 활발하면 부정이나 부패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지 않나요. "말이 많아지고 말을 수용해야 되니까 기구를 더 만드는 거죠. 그뿐 아니라 지방의 서원이 발달했을 때는 서원의 여론을 대표하는 각파 현직 고관들이 여론을 반영한다는 명분으로 또 발언을 굉장히 많이 하죠. 이것을 반드시 나쁘다고 생각할 수는 없죠. 그런 전통이 없으면 전제 정치라는 것이 쉽게 생겨버리죠."

-그러고 보면 조선시대에 서양의 절대왕정이나 일본의 절대복종의 전제군주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전체 정치는 없었습니다."

-조선의 왕처럼 왕 노릇하기 힘들었던 왕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임란 후에는 송시열 등이 학문을 가지고 얘기를 하잖아요. 군주가 말이 막히지 않아야 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숙종 영조 정조는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한 군주입니다. 군사(君師)라는 말이 생겼죠. 임금의 스승이 있어서 임금이 배우고 또 그걸 통로로 신하들을 제압을 하는 거죠. 그런 과정에서 정치적 수준이 올라갔습니다. 특히 정조 같은 사람은 민국(民國) 정치라고 해서 소민(小民)도 국가의 주체여야 한다는 개념을 갖고 있었어요."

-18세기 후반에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군주가 있었군요.

"양반인 대민(大民)만이 아니라 소민도 국가의 주체여야 한다는 새로운 정치상을 구상을 해요. 대한민국의 민국 바로 그 용어를 그때 썼어요. 그때 국은 임금이에요. 임금 플러스 민이니 대민 소민을 합친 것이 나라의 주체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런 정치사상을 실제 구현하려는 노력도 있었나요.

"유교 윤리서에 삼강행실도가 있었지 않습니까. 세종이 온 백성이 지켜야 할 기본 인륜이라고 해서 편찬해 보급했지요. 16세기에는 사림(士林) 사회가 형성되면서 지식인 유자(儒者)들이 자기들끼리의 윤리성과 부부 관계를 규율한 이륜(二倫)이 있었고요. 정조는 이 둘을 합쳐가지고 오륜행실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륜을 포함한 오륜행실도를 온 백성이 잘 알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도가 있었죠. 그러니까 대민도 소민도, 일반 평민도 나라의 근본이니까 나라의 근본으로서 해야 될 의무가 있다는 뜻을 담은 거예요."

-18세기 조선에서 양반이 아닌 나머지 백성을 나라의 주체로 상정했고 개혁의 한 주체로 여겼던 것은 여간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정조의 정치사상을 고종이 계승했어요. 고종이라는 임금을 피상적으로 알고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다 바보로 만들어 놓은 영향이 커요. 실제와 거리가 있어요. 이 분은 연암 박지원을 숭배했어요. 북학파의 거두 박지원은 청나라 가서 보고 청라도 문화가 굉장히 발달했다, 오랑캐 문화라고 할 수가 없다, 오랑캐라고 하는 저 곳의 문화가 발달한 건 우리가 받아들여야 된다, 이런 주의를 폈어요. 그걸 고종이 받아들였어요. 서양 오랑캐를 만나가지고 '신의 속도'로 달리는 증기선, 우리 것보다도 몇 배나 되는 위력을 가진 대포, 이걸 거치하고 있는 군함들을 앞에 놓고 이들을 오랑캐라고 할 수 있느냐고 역설했어요."

-정조의 개혁 정신과 연암의 실사구시가 고종에서 행동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건가요.

"고종은 서양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자 이런 입장에서 일본의 개항 요구도 받아들입니다.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약을 체결하자고 할 때 고종이 그 내용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일본이 배운 것처럼 우리도 배울 거 있으면 배우자 이렇게 된 거죠. 당시 일본이 왜 운양호에 포격을 했냐고 따질 때 고종의 명을 받은 관리는 황색깃발만 있었지 나라를 상징하는 국적 표시가 없었다. 그래서 포격을 가했다고 했어요. 일본이 도쿄에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공사들한테 브리핑 할 때는 '국기를 단 배에 포격을 가했다, 국제법도 모르는 놈들이다' 이렇게 말했는데, 오히려 조선이 국제법을 들어 반격을 한 것이지요."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은 우리가 맺은 첫 근대 불평등조약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조선 조정에서 검토할 테니 열흘 뒤에 만나자 하고 한 일주일 만에 검토했어요. 국왕 임석 하에서 했겠죠. 원래 일본이 제안한 원안은 13개 조였어요 그런데 정부 검토 결과는 그 중 제일 끝의 제13조는 최혜국 조관이라는 건데, 이건 우리 보고 앞으로 다른 나라하고 조약을 체결하지 말라는 얘기다, 이건 빼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머지 12개 조 중에 9개조 문구를 수정했어요.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조약의 목적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없는 거죠. 국제사회에 우리도 진입해서 서양 기술 문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가 분명히 있었다는 거죠."

-이후 실제 그런 경로로 갔었나요.

"이후 1880년대 초에 일본 시찰단이 갔습니다. 갔다 온 뒤에 미국하고 통상조약을 제일 먼저 하잖아요. 82년 미국과 통상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86년까지 서양 7개국과 조약을 체결합니다. 굉장한 변화이고 시기였죠. 이제부터는 서양 오랑캐가 아니죠. 유럽의 열강들과 수교를 해서 배우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겁니다. 한편에선 청나라가 계속 방해를 했어요. 조약에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명시를 요구하는데, 이걸 밀어내기 위해 속전속결 또는 경우에 따라 지연작전을 폈어요. 힘은 없었지만 국제 감각이라든지 이런 것이 전혀 아둔한 것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조금 이따 말씀드릴 것 같습니다마는 내치(內治)는 정조의 민국론 말하자면 소민도 나라의 주인이라는 정치 이념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근대적 국민 개념으로 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보고 있는데요. 1880년대는 국제사회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미국이 우리한테 제일 유리한 나라라 보고 필두로 삼았습니다. 청의 이홍장이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일본 러시아 견제를 위해서 조선에 권하면서도 청나라와의 전통 관계로 종속관계를 명시하도록 요구했어요. 그러나 미국 측에서도 말도 안 된다고 했고 이쪽에서도 예의 관찰하면서 미국 측 주장이 관철되도록 기다렸어요. 미국하고 성사된 후에 공사 파견은 늦었어요. 6년간 청나라가 방해를 하죠. 위안 스카이를 보내 내정 간섭하려고 계속 달려듭니다. 고통의 시간이었죠. 그 사이에 이게 혼란의 씨앗이 되버렸어요."

-그 사이 두 번의 정변(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겪었잖아요.

"그런데 그 외중에 고종은 육영재단을 설립했어요. 이때는 현직 관리들과 그 자재들 중심으로 근대화의 중심 파워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영어를 배우게 하고 서양에 관한 공부를 하게 했어요. 이어 배재학당 이화학당을 세우게 합니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제안하는 것을 받아들여 정부에서 돈을 대줬어요. 월급을 다 줬습니다. 서양 선교사들 학교 이름도 다 군주 측에서 지어줬어요. 배제도 거기서 나왔고 사실 이화는 오야 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본이 이제 주변국 선점 차원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켰단 말이에요."

-고종의 서양 문물 도입을 방해하려 한 건가요.

"일본은 조선에서 청의 영향을 배제하는 것이 시급했어요. 고종이 하는 방식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은 거죠."

-청일 전쟁이 끝난 후 갑오개혁이 있지 않았습니까.

"어쨌든 청일전쟁 후 고종의 개혁 작업은 계속됐어요. 현직 양반 관료와 그 자제들 엘리트 중심이 아니라 전국 백성을 대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1895년 1월 4일에 홍범 14조를 발표를 하죠. 그때가 음력으로 쳐서 94년 12월인데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에게 당신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떼내는 거였습니다. 자주 독립국 선언을 요구하는 거였어요. 고종은 좋다.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는 입장이었죠. 그걸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임금의 직접 통치를 제한하는 내각제를 합니다. 종묘에서 선대왕들의 신위 앞에서 고유를 하고 실행을 합니다."

-고종이 가장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국민 창출, 근대적인 국민 창출 이것을 정조의 소민 보호론을 확대해서 근대화합니다. 그렇다면 국민 창출로 제일 필요한 건 뭐냐 하면 교육이다, 그래서 교육조서 발표합니다. 지덕체 3육 교육이 바로 그때 선언이 됩니다. 그런데 이 지덕체 3육 교육은 원래 미국 개척 시기 18~19세기 중등 교육의 강령입니다. 원래는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의 교육 사상인데 미국 식민지 개척 식민지 시대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학교 중등 교육에 강령으로 삼았어요. 굉장히 앞선 개념입니다. 당시 서양 지식에 관해서는 고종이 제일 앞서 있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와 당시 조선을 찾는 지식인들로부터 많이 들었어요. 한성 순보를 발행하면서 뉴스 소스에도 많이 접합니다."

-근대에 대한 지식은 개혁으로 나가가는 동력이 되었나요.

"1896년에 왕비 명성왕후 1주기 때 당시 조선에 선교사로 와 있던 아펜젤러와 호머 헐버트 육영공원 교수 두 분이 고종과 인터뷰를 했어요. '코리아 레포지터리'라는 잡지에 싣기 위해서 인터뷰를 했는데, 8페이지 정도 영문판 기사입니다. 그걸 또 왜 (연구자들이) 아무도 안 보는지 난 모르겠어요. 거기서 두 기자가 하는 말이 '지금 조선 군주는 조선에서 최고의 지식인이다'라는 겁니다. 그렇게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네들과 통한다는 얘기죠. 시살 지덕체 교육을 지금으로서도 굉장히 근대적일뿐 아니라 현대적입니다."

-개혁의 주체를 육성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던 것 같아요.

"미국에서는 지덕체 중 체를 앞세우는데 고종은 덕을 앞세웠어요. 마음을 제일 앞세운 거죠. 교육조서에 이렇게 쓰였습니다. '나라의 모욕을 막아줄 사람' '나라의 불법한 것을 퇴치할 사람' '나라의 정치 제도를 끌어갈 사람'을 창출하기 위해서 내가 이 조서를 발표한다고요. 그런데 이런 점을 너무 모르고 있었어요. 저도 뒤늦게 발견을 했습니다마는 2015년 시점에교육사를 연구하는 분이 글을 하나 쓴 게 있어요. 그게 유일했어요. 그런데 내용을 충분히 검토를 안 했어요. 거기 결론은 1890년 5년 앞서 일본 메이지 천왕이 내린 교육칙서를 모방한 거다, 이렇게 평가를 해놨어요. 그런데 내용을 보면 전혀 달라요. 일본은 복종하는 시민을 만드는 건데, 고종 교육조서는 나라를 주체적으로 끌어갈 국민 창출 육성이라는 겁니다. 전혀 다릅니다."

-현대 우리 국민들이 그 점을 잘 알아야 할 텐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고종 시대를 얼마나 왜곡 속에 파묻혀서 진주를 발견을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아주 중요한 것은 이 교육조서를 필두로 국왕이 일반 모든 백성들한테 내리는 조서는 국한문 혼용체로 씁니다. 백성이 아니라 이제 국민이 대상이 되니까요. 그리고 학부에서 학부 편집국에서 교과서를 편찬하는데 국민 소학 독본이라는 걸 냈어요. 그것도 국한문 혼용체예요. 그리고 거기에 예를 들면 이런 안이 있어요. 광지식, 지식을 넓혀라, 지금까지 유교 중심의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지식을 익히라는 거였어요."

-고종에 대한 오해가 걷히지 않고는 근대사를 바로 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국정을 주체적으로 임했던 국왕을 완전히 바보처럼 만들어 버렸어요. 민비 소위 민비 왕후 세력과 대원군 세력들을 만들어서 두 싸움 속에 군주가 아무것도 못했다고 프레임을 짠 겁니다. 이런 프레임 속에 그러면 이 척족 세력이 다 했다, 이런 식이죠. 척신 정치가 고종시대도 계속된 것처럼 돼서 긍정적인 설명이 나올 수가 없죠. 그래서 결국은 개인적인 선각자를 띄우는 거죠. 김옥균이나 서재필 이런 사람이 나오죠.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신문을 창간했다는 것은 주인을 갈아치운 거예요."

-그렇습니까? 대다수 현대인들은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독립협회는 고종이 국민 창출의 정치를 시작하면서 백성들이 새로운 정보를 많이 입수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한글 신문 독립신문을 내면서 만든 겁니다. 그런데 군주가 중심이 돼 정부에서 근대화 사업을 한다면 백성이 따라오게 할 수 없지 않냐는 생각에 관민 단체를 만든 것이 독립협회입니다. 협회를 만들어 독립문도 세워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국가로서 국제사회에 진입한다는 그림을 그린 겁니다. 여기에 적합한 사람을 찾다 보니까 서재필이었던 거죠. 미국에 가 있던 서재필을 초빙해서 주관해 만들게 했습니다. 이게 역사 실체인데 고종과 정부가 없어져 버리니까 서제필 게 돼 버린 거예요. 이런 우스운 역사가 70년여년 끌어왔어요."

-역사바로세우기군요.

"아직도 세울 게 너무 많습니다."

-규장각에 아직 연구되지 않는 고종 시대 자료가 많습니까?

"고종실록에 해당하는 그런 새로운 자료 편찬 사업을 새로 해야 돼요. 굉장히 의미가 있는 작업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제 치하에서도 끊임없이 항일 투쟁을 해서, 국권을 우리가 찾아오진 못했지만 해방을 맞고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로서 세계 유일하게 10대 경제 강국에 들어갔다는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원천을 이해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 에너지가 거기서 나왔다고요."

-식민 시대가 없었다면 하는 가정을 하게 됩니다.

"일본의 주변국 선점론에 의해서 근대화의 힘을 군사력 증강에 두어 이웃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실 이보다 훨씬 빨리 구미 열강 대열에 들어갔을 겁니다. 세계 경제 10위권 안에 들어갔어요. 상대가 있어야 긴장을 하니까 정신적 근육의 힘은 더 커졌다고 할 수 있지만요."

-그런데 식민지 근대화론은 여전히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건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지 않고 미시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했다는 이 사실을 놓고 그 이후의 역사를 (거기에 맞춰) 해석을 하죠. 국권을 빼앗긴 역사의 진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시대 역사를 어떻게 할 거냐, 식민지 역사를 어떻게 해석을 할 거냐 그런 입장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나왔다고 볼 수 있죠 식민지하에서 우리가 근대화됐다? 그런데 여기에는 식민당국 조선총독부의 역사가 비중이 적다면 좀 참고 봐주겠는데, 사실은 우리 식민지 백성들의 노력, 예를 들어 식민지민으로서 우리 국민들이 총독부 치하에서 주체적으로 여러 가지 경제적 문화적 삶의 비중이 컸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총독부 시책 쪽에 더 비중이 크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봐줄 수 없죠. 결과적으로는 역사의 주체를 상실하는 역사관이 아닌가, 저는 좀 그렇게 보여요. 그래서 후배들 보고 그것에 유의하라는 말은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역사 해석입니다."

-일제 식민사학 실체를 연구하는 총서를 내셨는데요.

"8권 총서 중 제가 두 권을 맡았는데, 저자들이 거의 다 사제 관계에 있는 분들이에요. 제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마치고 역사 연구원이라는 걸 만들어서 여기서 좀 연구원답게 일본 제국시대 역사학에 대해 연구를 좀 하고 싶어 연구지원을 신청했어요. 그런데 채택이 안 됐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연락이 오기로, 총서 사업을 좀 주재하면 어떠냐고 해서 팀을 만들었습니다."

-일본 제국시대 역사학을 어떤 계기로 연구 주제로 삼게 되셨나요.

"1991년부터 한 20년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 연구를 했지 않습니까. 제가 특히 놀란 것이 있었어요. 한국 병합 당시에 육군 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와서 병합 조약 강제를 하는 과정의 일본신문 보도를 좀 봤습니다. 당시 신문을 조사해보니 일급 지식인이라고 하는 일본 신문기자들이 전혀 비판적 시각이 없는 겁니다. 관리들은 정책 때문에 그렇다 치고 기자들은 양심적인 면이 나와 있지 않겠나, 그래서 보도된 신문 기사를 봤는데 전혀 그런 걸 못 찾겠는 거예요. 전혀 없어요. 그래서 이건 역사 육의 문제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본 역사 교과서를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그 전에는 그런 연구가 없었던 건가요.

"일본 국회도서관에 한 40종 정도의 제국시대 교과서가 있더라고요 일본사 중국사 서양사 3종이 있어서 가서 유학생 도움 받아가지고 책을 다 대출해하고 필요한 부분은 복사하고 정리를 해보니까 1890년에 일본 메이지 천왕의 교육칙서가 나온 뒤에 역사 교육이 확 바뀌어요. 그전에는 무슨 우리나라의 역사라는 뜻으로 본방사 중국 역사는 지나사 그랬어요. 서양 역사는 외국사 이렇게 명칭이 시시각각이에요. 이걸 문부성이 어느 교수의 제안을 받아서 일본사 동양사 서양사로 딱 구분을 했더라고요. 문부성이 주관이 돼 이제 교과서 편찬을 감독한 거죠. 그러니까 교육 목적에 맞는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거예요."

-역사교육이 일제의 주요한 정책이 된 거군요.

"그렇습니다.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어요. 동양사 지나사 아니라 이제 동양사로 통합돼요. 동양사는 이름을 바꿨기 때문 동양사는 중국사 지나사에 플러스 주변국 유목민 예를 들어 몽골 역사를 동양사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동양의 의미는 요즘 서양 우리가 오리엔트라고 하는 옥시덴트 이게 아니고 일본 천왕이 지배할 새로운 동아시아 세계인 거예요. 그걸 실현하는 수단으로 역사 교육이 된 데 놀랐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역사 조선사는 동양사에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 안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일본사에 들어가 있어요."

-그렇습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4세기 369년에 일본 천왕의 엄마 신공왕후가 신라를 정벌했다고 일본서기에 나오는데 그걸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조선은 그 신공황후 때 이래 일본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는 거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조선이) 이탈했다는 거예요. 조공도 바치지 않고 무례를 범했다는 거죠. 그걸 바로잡는 역사를 지금 하고 있다는 거라는 겁니다."

-일제 교과서에 그게 쓰여 있나요.

"당시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요. 진짜 황당한 게 그런 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기자들이 그 무례를 범한 조선을 다시 정상으로 돌리는 합병을 비판적으로 볼 이유가 없죠. 당연한 걸로 알고 있는 거죠. 일제 관리나 일본인들이 러일 전쟁 후에 한국에 오잖아요. 이 사람들 의식 속에는 일본 땅에 오는 거예요. 이런 실체가 일제 강점기 교과서 연구에서 드러난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학자들이 그런 작업을 수행했나요.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 교수들이 그런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 이들은 일급 역사학자들이었어요. 그런데도 거기에 기여를 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우리 눈으로 일본을 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교수님 이전엔 일제 교과서 연구로 이런 왜곡된 일제의 역사교육 사실이 은폐됐던 건가요.

"2015년도인가 제가 그 논문을 한국어로도 발표하고 일본으로 번역해서 나왔어요. 그리고 2016년인가 2017년에 일본의 한국사 전공하는 사람들의 연찬회가 저를 초청해서 기조강연으로 그 논문을 발표했어요. 그래서 조선 학회지도 일본어로도 게재돼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봐야겠죠. 그런데 제가 평소에 그전부터 느낀 바로는 한국병합 강제 연구를 하면서 그 당시에 우리 한국인이나 지금이나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을 우리 마음으로 본다는 겁니다. 우리 머리로 봐요. 근데 일본인은 점점 안 그래요. 항상 머리에 천왕이 있어요. 천왕에 충성을 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거기에 동의 못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 중에 있어요. 그러나 말을 잘 못해요. 특히 제국시대는 거의 말을 못해요."

-일부 진실을 밝히려는 양심적 학자는 있기 마련인데요.

"거기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이념적인 사람들이었어요. 1920년대에는 공산주의 세력이 사회주의 이론으로 천왕을 부정했던 거죠.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일본은 일본의 동양사라는 개념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확대해서 1930년대에 파시즘 시기에 오면 이게 천왕의 품에 들어와야 된다고 해요. 그래서 태평양 전쟁을 벌립니다. 일본의 국가신도는 천왕의 아마데라스노 신을 모시는 거 아니에요? 기독교 위에 있어요. 모든 종교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제패를 꿈꾼 거예요. 그게 미국에 의해 무너진 겁니다. 하지만 지금도 일본 국민의 거의 거의 90% 이상은 일본 신도 신자 아닙니까. 원래 신도라는 건 각 집에 조상신이나 조상신을 모시는 거였습니다. 그러다가 메이지가 전국 통합 중앙집권 체제 만들어서 이제 일본 국가 신도가 되죠. 막부 장군한테 눌려 있다가 튀어나와서 천왕 중심의 국가 신도가 만들어진 거죠. 교육칙어를 통해 국가 신도가 되는 것이 역사교육 왜곡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왜 그런 교과서를 만들었냐 하면, 이토 히로부미가 제안을 했어요."

-거기에도 이토 히로부미의 존재가 있었나요.

"제국 헌법과 국가 신도 교육이 같이 나왔죠. 앞뒤 다퉈서 나오는데 이런 말을 했어요. 유럽 가서 헌법 연구 많이 했지 않습니까, 2년 동안 했습니다. 이들은 견문을 넓혀서 보니까 서양 열강에서 식민지가 되는 패턴이 있더라는 겁니다. 먼저 선교사가 온다는 겁니다. 기독교 선교사가 먼저 와서 포교를 해서 성 안에서 성문을 연다. 그 다음엔 군대가 온다, 이런 패턴을 막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막는 '안티 크리스티아니티'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었고 그게 국가 신도입니다." -일본에서 기독교 세가 미미한 현 상황이 설명되네요.

"그러니까 일본의 정신세계는 우리하고는 다릅니다. 일찍이 고종황제를 아주 적극 도왔던 그 호모 헐버트 선생이 한 말이 있어요. 일본에 가면 '유니버설리티'(보편타당성)를 못 느낀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천와 중심의 가치관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에 오면 그냥 별 얘기를 안 해도 그것대로 다 된다는 거예요. 친근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실은 그게 우리의 힘이죠."

-한일관계를 만들어 갈 때 우리가 곱씹어야 할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제가 역사 교과서 분석까지 하고서 느낀 소감은 일본을 바로잡는 거 일본의 관념을 자기중심적인 천황제 관념을 바로잡게 하는 것이 일본이 더 좋은 나라가 되는 길이라는 겁니다. 일본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저와 접촉하는 제 입장에 동조하는 일본 교수들도 다 그런 얘기를 해요. 아베 신조에 반대하고 이런 운동하는 사람들인데 한국 기자하고 인터뷰 하면 한국 기자 질문이 거의다 똑같습니다. '당신은 일본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지 왜 한국을 위해서 공부하느냐'고요. 그러면 그들은 더 좋은 일본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을 해요."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에서 첨예했던 한일관계의 갈등을 풀려 노력하고 있는데요.

"양국 정상이 만나가지고 합의 봐서 이제 앞으로는 이렇게 한다는 것이 그가의 모델로 돼 있잖아요. 우리는 그걸 천왕이 해주면 더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일본이 안 하지 않습니까. 양국 정상이 만나 공동 성명서를 내고 바람직한 결론을 냈다고 칩시다, 그러나 일본 국민의 정신이 거기에 안 맞아요. 일본 국민 개개인은 자기 나라 천왕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 합의문에 동의를 할 수 없는 거예요. 실천할 수 있는 주체가 못 돼요. 그리고 역사 교육이 또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일본 역사교육이 바뀌지 않는 한, 천황제 중심으로 남아 있고 주변국 선점론적 사고와 인식이 있고, 그게 영광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만주와 조선을 차지하고 있을 때가 일본의 제일 전성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에 한일 역사 공동성명서 발표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는 얘기죠."

-일본에 올바른 역사교육을 요구하는 것은 내정간섭인가요.

"결국 만루 홈런을 치려고 우리가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한 방에 다 해결하자는 건 저는 헛일이라는 생각합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세 가지 있지 않습니까. 먼저 역사문제에 인권문제가 있어요.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는 인권문제죠. 독도 등 영토문제는 역사문제고요. 나머지 하나가 경제문제입니다. 이걸 다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리 주장으로만 될 일이 아니에요. 세밀하게 살펴봐야 하고 또 전제되는 문제들이 해결돼야 이 문제들이 풀려요. 그래서 저는 한일관계를 풀려면 만루 홈런 작전이 아니라 3안타 작전으로 가야 된다고 봅니다."

-3안타 작전은 어떤 전략인가요.

"우리 입장에서는 역사 문제는 학계에 일단 좀 맡기라고 하고 싶어요. 일본 역사학계가 바뀌어야 되지 않냐는 겁니다. 안 바뀌면 다 소용없요. 지금까지 10년, 20년간 한일 역사학자들이 만났어요. 한두 번 하고서 다 없어져 버렸어요. 서로 싸우기만 합니다. 한일 역사문제에 있어 일본은 보편타당성을 가진 연구와 사고방식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한국사를 전공하는 일본 교수들을 보면 한 20~30%는 우리와 같은 역사관을 가지고 있어요.한 70%는 아니에요."

-그래도 강제징용 문제는 대법원 판결이 구속력을 갖고 집행될 예정이어서 조속히 해결해야 할 텐데요.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는 인권 문제잖아요. 이건 유엔 인권위원회와 연결해서 국제적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당했지만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이쪽 희생자도 있지 않습니까. 같이 협력해서 해결해야 돼요. 경제 문제는 일본도 지금 한국과 협력해야 살잖아요. 경제 문제 때문에 역사 문제와 인권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그동안 한일 역사 문제를 공부하면서 결론에 도달한 것이 유감스럽게도 만루 홈런 정책은 성과를 내기 어렵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3안타 전략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앞서 말씀 하셨지만, 고종에 대한 평가가 극과극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을 하려고 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신데요. 무능한 군주였다는 비판도 적지 않거든요.

"저는 요새는 이런 얘기를 해요. 안중근 의사를 누가 허물이 있다 하겠습니까. 안 의사 어머니께서 '너는 상고를 하지 마라,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니까' 그런 어머니의 훈계도 놀랍지만 사실은 안중근 의사 자료를 샅샅이 보면 놀라운 면이 많습니다. 그동안 쓴 글을 모아가지고 내년 3월쯤 책을 내려고 그럽니다. 그 제목이 '지식인 안중근'입니다. 높은 지식과 바른 지식 위에 그런 위대한 행위가 나온다고 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안중근을 일본 사람들은 매몰시키려고 포수로만 이미지를 각인시키려고 했죠. 근데 안 의사는 군인이었고,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죠. 생각을 해보세요. 사형 선고를 받고 한 50일 동안의 옥중에서 유목을 남겼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유묵들이 대부분 옥중에서 남긴 거군요.

"옥중에서는 옆에 책이나 참고서가 없어요. 그 문구가 다 머리에서 나왔어요. 가톨릭 신자로서 프랑스 신부들 도움을 받아서 대학을 세우려고 프랑스 공부를 했습니다. 일본의 한 철학자가 안중근에 매료돼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읽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고까지 했어요. 제가 보기에 안 의사가 영구평화론을 읽은 것 같아요. 프랑스어 번역본이 신부의 서재에 꽂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죠. 옥중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법원장 면담을 신청합니다. 거기서 상고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전해요. 법원장 보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상고를 하지 않는다. 상고를 하는 순간 당신들의 통치 체제를 인정하니까.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그러면서 당신들의 동양평화론은 거짓이라고 단정합니다."

-일제를 말로나마 단죄한 기개입니다.

"남의 국권을 빼앗는 평화론이 어디 있느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런 말도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 군주의 총명함을 이기지 못해서 강제로 퇴위시켰다. 현 황제보다 좀 못한 황태자를 억지로 황제 위에 올렸다. 이 얘기를 해요. 안중근이 그런 평가를 누가 부정하겠어요. 지금 이상한 폄하론을 내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역사 공부의 초입에도 안 들어온 거예요. 나치식로 피상적인 지식으로 뭐라고 할까, 자기만족을 하는 넋두리 같은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고종을 개혁군주로 보면 그 뒤에 일어난 여러 가지 긍정적 변화들이 설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건 제가 논문을 썼습니다만 많은 국민들이 좀 일깨우고 싶은 점도 있는데요. 옥중에서 쓴 그 책이 안응칠(안중근의 아명) 역사잖아요. 자서전을 쓰면서도 '안응칠 역사'라고 겸손하게 붙였어요. 근데 여기도 참 독특해요. 1895년에 고종의 교육조서를 읽고 나서 불현듯 생각이 났어요. 안응칠이야말로 고종의 교육조서 이후 영향을 받는 딱 그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때 나이가 한 17세쯤 되었을 때였어요."

-시기적으로 교수님 추정이 타당합니다.

"그런데 안응칠 역사를 다시 따져보니까 그 국민 창출 역사의식이 그냥 곳곳에 담겨 있어요. 안응칠 역사를 우리가 다시 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또 옥중에 쓴 유목의 제일 마지막에 뭐라고 썼냐면 잘 아시듯, 그때가 1910년 경술년 2월 아니면 3월입니다. 사형 선고 받은 게 2월 14일이니까 그래서 선고받고 유목을 쓰기 시작했다는 말이 되죠. 3월 26일에 돌아가셨으니까요. 그 중에서 특히 '여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고 썼습니다. '대한국인'이라는 이 아이덴티티 표시, 이건 정말 놀라운 겁니다."

-고종의 '국민창출'의 교육 효과라고 보십니까.

"이건 무심히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안응칠 역사에 담긴 국민정신과 연결시키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나라 서예사상에 '대한국인'이라는 자기 국적 표시를 한 유묵은 유일합니다. 거기에 부연해서도 이런 저런 말이 좀 더 있습니다만 우리가 안중근을 존경한다면 고종 시대의 역사는 결코 폄훼될 수 없습니다. 일제 식민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조선은 일제에 의해 병합될 운명이었다고 절대로 만들 수 없는 거지요. 우리의 새로운 근대 역사를 일본이 강제로 뺏어갔다고 보는 것이 보편타당합니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화 의지와 계획이 있었다는 교수님의 연구성과는 이제 학계의 정론이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1909년 고종황제가 서북간도에 보낸 '서부 간도 및 부근 인민에게 내리는 효유'라는 것이 근자에 다시 발견이 됐습니다.당시는 황제에서 강제 퇴위된 뒤죠. 태황제로서 통감부가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주권을 이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거기에 보면, '내가 너무 못나서 나라를 섬나라 오랑캐들한테 뺏기게 됐다, 이런 지경을 만든 내가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나라가 망했다고는 말하지 말자, 너희 만성이 있지 않는가.' 너희 만성이 있다는 의미는 교육조서의 내용과 굉장히 가까운 내용입니다. 나라를 키워서 광복하자, 그러면서 자유라야 민이며, 독립이어야 국가라는 말을 합니다. 즉 자유민과 독립국을 여러분들이 앞서 끌어가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후 3·1 독립만세와 임시정부, 나아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건가요.

"거기에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1919년 독립만세로 이어지고 상해에서 임시정부 창설할 때 임시 헌법에 제1조의 민주공화국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민주공화는 그냥 급조된 것이 아니라 1895년 이후 대한제국을 세워서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 국가 이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일본에 의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게 대단한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 민주공화정을 계속한다는 표시로 읽어야 될 줄 압니다."

-우리 근대사가 초라하고 짓밟인 역사만은 아니었다는 말씀을 들으니 훈훈해집니다.

"그 정신이 1895년 이후에 1910년까지 이후 일제 35년의 압제를 견디고 통과하도록 한 겁니다. 비록 북한이 다른 길로 가버렸지만,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국체를 세운 힘은 거기서 나온 거죠."

-교수님 말씀 들으니 지금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도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토대로 해야 힘을 받을 것 같은데요.

"자유민주주의 교육이 각급학교에서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윤 대통령도 자유를 강조했듯이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강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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