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위한 법과 원칙
[세상읽기]
[세상읽기] 류영재 | 대구지방법원 판사
차별은 사람을 붕괴시킨다. 이 상황이 법적으론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남아프리카 국가 보츠와나의 노동법원은 2011년 이 질문에 답했다. 직장에서 의무적으로 받으라 한 에이치아이브이(HIV) 검사를 거부했다고 노동자가 해고당한 사안에서, 법원은 직장의 이 검사 강제가 인간의 존엄할 권리(Right to dignity)를 침해하여 해고는 위법하다고 결정한 것이다.
에이치아이브이 바이러스와 에이즈는 다른 개념이다. 에이치아이브이 바이러스 감염 상태에서 항바이러스 치료를 꾸준히 하면 신체의 면역력이 유지되어 에이즈 발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 바이러스는 일상생활을 함께하는 것으로 전파되지 않기 때문에 이 바이러스 감염인과 에이즈 질환자와 함께 일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의학적 설명에도 이 바이러스와 에이즈에 대한 사회의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다. 편견은 해고와 격리를 동반하는 차별과 낙인효과를 불렀다. 보츠와나도 그런 차별과 낙인이 만연했다. 언뜻 보면 직장 내 에이치아이브이 검사 강제는 그리 부당해 보이지 않는다. 검사받는다고 해서 노동자에게 즉시 심각한 위해가 닥칠 리 없고(오히려 검사 결과 양성 사실을 알게 되어 조기 치료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양성 결과가 곧바로 해고로 이어진다고 예고되지 않았다. 보츠와나 노동법에는 직장에서 에이치아이브이 강제 검사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법원은 단순히 법률에서 검사 강제를 금지하는지만을 따져 해고의 적법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다.
대신 집적된 사례를 통해 직장에서 이 검사를 강제하는 조치가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을 어떻게든 해고하는 결과로 귀결되었고, 이는 에이치아이브이 양성을 정당한 해고 사유인 양 오해하게 만들어 사회의 에이치아이브이 및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차별, 낙인을 강화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직장의 에이치아이브이 검사 강제는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편견과 차별, 낙인에 내몰릴 위험을 감수하고 검사를 받든가, 그게 싫으면 일자리를 포기하라며 노동자에게 내민 냉혹한 선택지였던 셈이다. 법원은 그 선택의 강요를 노동자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는 조치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가혹하고 품위 없으며 모멸적이고 무례한 처사에 해당하여, 인간의 존엄할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비록 노동법에서 에이치아이브이 검사 강제가 금지되진 않았지만, 국제인권규범과 자국 내 법체계에 비추어볼 때 이 바이러스와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강화하고 노동자에게 가혹한 선택을 강요하는 직장 내 에이치아이브이 검사 강제 자체가 위법하므로 그 검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한 조치도 위법하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이 판결은 생존을 위해 사회적 차별과 부당한 노동환경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 고찰해 그 상황이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린다는 점을 법적으로 규명해냈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사회가 지켜야 할 ‘법과 원칙’은 산 사람 위에 군림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사람이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설명해주는 판결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도 편견과 차별, 낙인에 내몰린 사람들, 생존을 위해 가혹한 노동환경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를 받아든 사람들이 수없이 있다. 아직도 존재에 대한 인정투쟁을 벌여야 하는 성소수자들, 예배를 위해 혐오표현을 감내해야 하는 이슬람교도들, 가혹한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파업을 할 때는 사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하든가 아니면 불법세력으로 몰릴 각오를 하라고 강요받는 노동자들, 출퇴근 시간엔 지하철 탑승을 사실상 금지당한 장애인들과 값싼 노동력 취급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 이들의 존엄성은 존중받고 있는 걸까.
새해가 되었다고 이들과 함께 겪는 겨울이 갑자기 따뜻해질 리 없다. ‘법과 원칙’은 단 한 사람의 삶도 가혹하고 품위 없으며 모멸적이고 무례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한계는 명백하지만 결코 차갑지는 않다고 배웠는데, 우리 사회의 법과 원칙은 이들의 겨울을 데우기는커녕 그 어떤 추운 날보다도 더 시리게 차가웠던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누구도 법의 이름으로 배제되고 적대당하지 않도록, 존엄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배운 바를 실천해 보자고 신년 다짐 하나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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