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을 다시 읽는다
[한겨레 프리즘]
[한겨레 프리즘] 김경락 | 전국팀장
얼마 전 대구시는 대형마트 의무 휴업일을 일요일에서 평일로 바꾸기로 했다. 신세계·롯데 등 유통 재벌이 손톱 밑 가시라고 여기던 규제 중 하나가 일요일 의무 휴업제다. 고양시 등 일찌감치 제도를 바꾼 기초자치단체는 있지만 광역 단위에서 이런 조처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다.
일요일 의무 휴일제는 2012년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으로 지자체별로 순차 도입됐다. 우후죽순처럼 세를 뻗치던 대형마트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골목상권을 위협한다는 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와 골목상권 간 대립 관계는 뚜렷했기에 대형마트의 집객 능력이 골목상권에 도움 된다는 식의 유통 재벌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대구시 조처는 시정을 휘어잡은 보수 아이콘 홍준표가 밀어붙여 단행된 ‘대기업 규제 완화’라고만 보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무엇보다 지역 상인 단체가 앞장서 의무 휴업일 변경을 요구했다. 실제 대구시 발표 이후 반대 움직임이 크게 일지 않은 까닭이다.
여기에는 ‘규제 환경’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최근 3~4년 새 부쩍 성장한 쿠팡 등 온라인쇼핑몰의 존재는 유통 시장의 이해관계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유통 재벌 대 골목상권’에서 ‘온라인 대 오프라인’으로 경쟁 구도가 새로 형성됐다. 신기술·산업 등장은 으레 경쟁 구도를 흔들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 생생한 사례를 수년째 목격해왔다. 대형마트와 골목상권은 상호 협력의 실마리를 찾아야 생존할 수 있는 처지다.
정책은 이처럼 두 발 내디디고 있는 현실,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관념적 이념에 매몰되어서는 현실·환경 변화에 둔감하게 되고, 현실·환경에 둔감한 정책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정책 방향이 규제 완화이든 강화든 다를 바 없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실·환경에 더듬이를 곧추세워야 한다.
이런 이유로 ‘보수(진보) 정부가 웬일’이란 생각이 들게끔 하는 정책이 과거에 적지 않았다. 진보 정부인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상품과 서비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촉진하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여념 없었고, 법인세도 꾸준히 끌어내렸다. 노동 유연화 끝판왕인 비정규직 제도(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에 관한 법, 파견근로자에 관한 법)도 크게 손봤다. 보수 정부인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공정거래법 강화(사익 편취 규제 도입),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강화(일감 몰아주기 과세), 법인세 세액공제 축소와 같은 정책을 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외환위기 여파와 소규모 개방경제 체제 속에 신자유주의 세계화란 거센 외풍을,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금융위기로 한껏 드러난 양극화와 불평등, 그에 따른 저성장이란 규정력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지지층 불만은 외면할 수 있지만 현실은 모른 체할 수 없는 게 정부이고 정치다.
코로나19 시대를 지나오면서 규제·정책 환경은 다시 변곡점을 맞고 있다. 장기간 저물가는 고물가로 전환했으며 무역 장벽은 다시 두꺼워지고 있다. 성장·발전에 대한 욕망보다 보호·안전에 대한 갈망이 더 강렬하다. 국가 간 협력과 상호 의존의 가치는 빛바래고 주권 국가가 다시 부상한다.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는 이런 변화는 쉽게 간파할 수 있을 듯하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특히 구체성을 갖는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선 큰 틀을 넘어 변화의 세심한 결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정책이 어렵다. 이념에 매몰되거나 검사-모피아 동종교배로 구성된 컨트롤타워 눈에는 변화의 세심한 결이 보이지 않는다.
세심한 결을 보는 데 도움이 될 법한 글을 하나 소개한다. 유승민이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할 때 한 국회 연설이다. 연금·재정·보육 구조개혁을 위한 ‘합의의 정치’를 역설한 이 연설의 전문을 전하는 <한겨레> 기사 제목에는 ‘야당이 극찬한∼’이란 수식어가 달려 있는데, 한편으론 ‘야당 정치인은 왜 이런 연설을 하지 못하나’란 생각이 들게끔 했던 연설이다. 변화의 시대엔 생각이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어야 출구가 보인다.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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