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의 지형, 마음의 지도
[서울 말고]
[서울 말고] 정나리 | 대구대 조교수
월드컵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의 손을 잡고 나왔다 들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낯설어 흠칫 놀랬다. 아이들을 ‘실물로’ 못 본 지 오래된 듯해서이다. 아이가 많지 않은 동네에 살기도 하거니와, 동시간대 같은 공간을 교차할 일이 드물다. 아는 어린이들도, 월급만 안 받았지, 나보다 더 바쁜 일상을 짊어지기 일쑤다. 더욱이 코로나 때문에 통 못 본 사이에 훌쩍 커 언뜻 못 알아볼 정도이다. 가끔 내게 전해지는 사진으로 또는 유튜브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인은 노인들끼리, 부자는 부자들끼리, 공간이 집단적 성격을 띠도록 도시는 크게 구획되어 있다. 그래서 거리와 광장을 모두가 공유하는 외에 각자의 구역 안에서 대체로 이질감 없이 ‘안전하게’ 느낀다. 물론 아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시공간을 바꾸어내는 힘을 지니지만, 아이들의 공간은 대개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따로 계획된다. 그리고 그 계획에는 우리가 그들에게 바라는(요구하는) 것들이 담긴다. 학교에선 공부를, 학원에선 보습을, 놀이터에선 놀이를 하도록 공간에 역할이 부여되고 메시지가 들어간다. 미끄럼틀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규칙을 체화하게끔, 그네에서 팔다리의 힘을 키울 수 있게끔, 몸과 시선의 움직임 속에서 지배적인 사회규범을 습득할 수 있게끔, 구조물에는 특정한 세계관이 흐른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는 한정된 공간의 효율적 조직과 관리, 즉 ‘공간을 통한 통치’를 요했을 텐데, 그것은 여러모로 아이들의 활동반경과 유형을 제한했다. 위험천만의 도시에서 아이들은 ‘미완’의 존재로 한쪽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옛날’에는 놀이터가 따로 없었다. 대신 아이들은 근린환경을 직접 탐색하며 ‘마음의 지도’를 그려나갔다. 예컨대, 아홉 살 하진이(박형진, <갯마을 하진이>)에겐 격포에서 이십 리 떨어진 조그마한 갯마을 전체가 놀이터다. 하진이는 하교 뒤 친구들과 온 동네를 다니며 논다. 어른들의 ‘보호’나 ‘간섭’이 딱히 없는데, 바빠서이기도 하겠지만, 두 발로 접근 가능한 주위의 ‘자연’, 동네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아홉 해 동안 발달한 인지체계와 운동능력을 발휘하여 검불 우거진 곳에서 불을 질러 먹고 언덕에서 연을 날린다. 목화밭에서 서리를 하고 바위벼랑에서 엉새 둥지를 발견하는가 하면, 바다에서 멱을 감고 펄에서 새조개도 캐어다가 구워 먹는다.
마음의 지도는 구체적인 장소의 다양한 상호작용 안에서 가능해진다. 추상적인 공간에서 형성된 자아는 그 자체도 어느 정도 도식적일 수밖에 없다. 수십 개의 책상이 하나의 교단을 향하는 교실에서 숱한 시간을 보낸 마음의 지도는 위계적인 구도를 전제하여 확장될 거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게 장소가 단순한 위치 정보를 넘어 자아정체성과 직결되는 것처럼, 하진이가 갯마을 곳곳에서 자신과 세상을 마주한 기억은 생애 전반에 걸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마음의 내비게이션이 될 것이다. 타존재에 곁을 내어줄 수 있는, 삶이 던지는 난제들에 흔들리지 않는, 좌표가 된다.
머지않아 갯마을에도 산업화의 바람이 불고, 십대 초반의 아이들은 (미래) ‘일꾼’의 사명을 띤 채 도시로 떠난다. 아이들의 놀이 장소는 그만 의미를 잃어버리고 신나는 놀이도 사라진다. 갯마을 공동체가 와해되는 순간 근린자연은 진공의 공간이 되어 갯벌은 메워지고 벼랑은 깎인다. 어떤 잘 만들어진 놀이터도 벼랑에서 엉새 둥지를 발견하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능가하긴 어려울 텐데, 온통 텅 빈 놀이터만 눈에 보인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미완’인 우리의 적대와 혐오로 얼룩진 마음의 지도는 어쩌면 장시간 노동과 부조리가 난무하는 척박한 현실의 지형을 그대로 반영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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