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내 몸을 손님처럼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2023년 새해가 밝았다. 소중한 선물 같은 하루. 맑은 마음으로 깨어났다. 머리가 맑은 건지 아직 몽롱한 상태인지 내 몸이 잘 인지를 못 하는 것 같아서, 일단 맑은 마음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정신과 몸이 합의 보겠지. 그래, 맑다고 치자.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문득 내 몸이 손님 같다고 느껴진다.
혼자 멍때리다가 나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내 몸이 나에게 말을 걸 때도 있고, 내 마음이 몸에게 말을 건넬 때도 있다. 이 순간을 가끔 알아차리는데, 이 신호가 손님이 찾아온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절이 있다.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사랑해야 할 텐데, 과연 나는 나를 사랑하는 걸까? 바쁘게 사는 요즘,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대한다면 나는 내 이웃에게 일을 많이 시키고 끊임없이 몸을 혹사시키게 될 텐데 오히려 이웃에게 미안한 일이다.
에스앤에스(SNS) 때문에 쓸데없이 남들과 비교하게 되며, 경쟁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는 근대 문명에서 우리 모두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며 적당히 일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정말 꿈같은 일이다. 인간의 마음이 과연 그런가? 근면, 성실, 그리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배워 온 시간이 너무도 길다.
다들 너무 열심히 사는 지금, 여전히 사람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한다. 나는 뮤지션이자 프리랜서이지만 나는 나의 직원이며 직장 상사다. 출근 시간도 딱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퇴근 시간도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야근'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보았다. 이 노래를 이번 콘서트에서 처음 발표했는데 제목이 ‘야근’이라고 말하자마자 야유가 터져 나왔다. 제목을 ‘퇴근’이라고 할 걸 그랬나? 이런 가사다.
‘야근이다! 별들은 신나게 파티를 여는데, 왜 나는 잠 못 들고 오늘 밤도 일하냐고. 지긋지긋한 인생 뭐 재미있는 일 없을까나? 야근이다! 별들은 신나게 웃고만 있네./ 먹이를 찾아 뒷골목 헤매는 고양이들, 반짝이는 두 눈은 이 도시의 반딧불. 밤하늘처럼 까만 커피에 비친 저 달은 알고 보니 누렇게 뜬 내 얼굴이라네.’
새해에는 내 몸을 손님같이 대하고 싶다. 가끔 지치면 빨리 집에 가고 싶고,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사람 많은 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 공허해지면 마음의 내비게이션이 책장 앞으로 안내하고,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말들이 가시처럼 찌를 때면 갑옷을 두르고 혼자만의 숲으로 잠시 피신하라고 한다. 지쳐있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동을 하거나, 수면 부족인데 불안해서 잠을 줄이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병을 키운다. 그럴 때 우린 내 몸이 시키는 말을 잘 경청해야 한다.
지난해 연말 크라잉넛 콘서트에서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렸다. 예전 같으면 콘서트 끝나고 뒤풀이를 2박 3일 동안 했겠지만, 이번에는 간단하게 밥 먹고 집에 들어와서 조신하게 뒹굴었다. 이 역시 내가 내 몸이 시키는 말을 경청한 결과이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나다. 나는 오랜 친구이자 손님이다. 결국은 스스로 위로하고 믿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열심히 살라고 한다. 바쁘게 시간을 쪼개 쓰고 쉴 새 없이 움직이라고 몰아붙인다. 좋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만큼 휴식도 챙겨야 한다.
새해에는 나와 조금 더 친해져 보리라. 내 몸과 나, 우린 팀이다.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존중해야 타인도 이해할 수 있다. 나를 발전시키는 것도 좋지만 비교의 늪에 빠지지 말고, 불안과 우울이라는 자외선에 선크림을 발라줘야 한다. 정말 힘들 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가려운지는 결국 스스로 알아차려야 한다. 각자의 매뉴얼은 각자가 가지고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행복은 컨디션에 달려있다. 삶은 복잡하고도 단순하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매일 일 하느라 시간에 쫓기고 피로에 절어 있다면 무슨 소용인가? 나의 몸은 손님이다. 손님의 목소리에 잘 귀 기울이고 지난날의 나와 화해하며, 새해에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자.
이번 콘서트에서 관객들이 아프게만 느껴졌던 청춘을 빗댄 곡 ‘양귀비'를 떼창해 주었다. ‘돌아오지 않는 청춘의 여름날 나의 꽃 양귀비여. 꽃을 피워주오.' 추운 겨울, 봄을 기다리며 마음과 마음이 오가고, 음악으로 객석에서 꽃을 피워 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와 나 사이에서도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나만의 정원을 가꾸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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