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쌀에게 자유를
한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계묘년(癸卯年) 새해를 맞았다. 예전엔 농한기(農閑期)였다지만 요즘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시설농업이 늘어나면서 이젠 겨울에도 바쁜 곳이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농업의 중심엔 벼농사가 있다.
굳이 숫자로 따지면 전체 농가의 절반 이상(52%)이 벼농사를 짓는다. 연간 생산액도 8조4000억원으로 농축수산물 중 1위다. 농업소득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도 34%에 달한다. 더 중요한 건 벼농사는 고령화된 농촌의 버팀목이라는 사실이다. 노동 투입 일수가 적은 데다 기계화율이 95%를 넘고, 정부가 가격을 지지해주기 때문에 고령농에겐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쌀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최근 25년간 두 해를 제외하고는 생산이 수요보다 많았다. 구조적인 공급 과잉이라는 뜻이다.
정부는 작년엔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 무려 72만t을 시장 격리 조치했다. 한 해 쌀 생산량의 20% 가까운 물량이다. 시장 격리는 넘치는 쌀을 정부가 예산으로 사들여 창고에 쌓아두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들어간 예산이 1조7000억원 정도 된다. 이렇게 격리된 쌀은 썩기 직전에야 주정용이나 사료용으로 헐값에 매각된다. 창고 보관료를 감안하면 사실상 투입 예산 전액을 허공에 날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가격을 지지하는 정책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쌀 공급 과잉은 생산량 증가보다 수요 감소 요인이 더 크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25년 새 절반으로 줄었다. 코로나19 이후 감소 속도가 더 빨라져 작년엔 1인당 소비량이 52㎏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정에서 밥을 해 먹는 횟수가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얼마나 줄었는지 생각해보면 금세 안다. 쌀 소비 감소는 장기적인 추세로 봐야 한다. 정부가 구조적인 쌀 과잉을 해소하지 않은 채 시장 격리와 가격 지지에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얘기다.
그런데 느닷없이 야당이 물 붓기를 강제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개정안은 쌀 초과생산량이 3%를 넘거나 가격이 5% 이상 하락하면 시장 격리를 의무화하겠다는 것이다. 급기야 지난달 28일에는 국회 상임위에서 야당 단독으로 본회의 부의 요구를 의결해 본회의 상정 길을 열었다.
이날 상임위 의결 소식을 접한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상중(喪中)임에도 긴급 브리핑을 하기 위해 빈소를 떠나 세종시로 달려갔다. 학창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인생의 멘토이자 공무원으로서 삶의 귀감이셨던 장인의 별세를 주변에 알리지 않아 썰렁하기 그지없었던 빈소마저 지키지 못한 것이다. 정 장관은 "의무적 시장격리제는 많은 부작용이 우려되는 만큼 쌀 산업 발전을 위해 신중하고 합리적인 논의를 해달라"고 국회에 간곡히 호소한 뒤 다시 빈소로 돌아갔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야당 대표의 민생 1호 법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농민들도 이 개정안을 1순위로 생각하지 않는다. 시장 격리가 의무화되면 장기적으로 오히려 벼농사가 늘어나 유리할 게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벼 대신 콩이나 밀, 가루쌀을 심으면 직불금이 제공되는 인센티브도 올해 새로 시작된다. 그럼에도 야당이 개정안 처리를 강행한다면 정치 공세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더 이상 쌀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지 말자. 표의 볼모에서 쌀을 풀어주자. 그래야 쌀 시장이 정상화되고, 농업·농촌·농민이 바로 설 수 있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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