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시평] 불체포특권
법조인 수사는 사법탄압이고
기업인 수사는 경제탄압인가
국회의원만 특권 누릴 이유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구금돼 의회에 출석할 수 없었던 의원의 석방을 명했다. 1340년의 일이다. 그 뒤 잉글랜드에서는 체포돼 구금된 의원은 의회 출석을 위해 석방하는 관례가 정착됐다. 1689년 잉글랜드 의회는 전제정치를 강화하려는 제임스 2세를 폐위하고 그의 딸과 사위를 공동 왕으로 추대해 명예혁명을 완성했다. 이때 채택된 권리장전 제9조에 "의회에서의 토론과 언론의 자유는 의회 이외의 기관 또는 법원에 의해 탄핵당하거나 문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명시됐다.
영국의 이런 전통은 1789년 제정된 미국 헌법에 그대로 수용됐다. 연방헌법 제1조는 의원은 '반역죄나 중죄 또는 평화 훼손 행위'를 제외하고는 회기 중에 체포되지 않는 특권이 있다고 규정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연방헌법 제1조의 '평화 훼손 행위'에는 형사 범죄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했고, 결국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은 회기 중 형사 범죄로 체포되지 않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19세기 들어 세계 각국이 성문 헌법을 제정하면서 영미의 불체포특권을 대부분 명문으로 채택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제헌헌법 제49조는 "국회의원은 현행범을 제한 외에는 회기 중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하며 회기 전에 체포 또는 구금되었을 때는 국회의 요구가 있으면 회기 중 석방된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현행 헌법 제44조에 그대로 남아 있다.
불체포특권은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때까지 의회 내에서 의원의 자유로운 발언과 토론을 보장하는 순기능을 했다. 그런데 서구사회에서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의회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불체포특권은 그 필요성이 사라졌다. 오히려 의회 내의 정치적 부패를 감싸는 부정적 역할만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유럽평의회는 반부패국가연합(GRECO)과 함께 2013년 세계적 헌법 자문기구인 베니스위원회에 불체포특권 폐지를 위한 지침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베니스위원회는 2014년 민주국가에서 불체포특권은 역사적 소명을 다했고 의회 활동과 관련된 발언 보호 등 특수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보고서를 채택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체포특권은 필요 없다는 베니스위원회의 의견에 이론을 달기 어렵다. 아직 민주주의가 자리 잡지 못한 나라에서도 불체포특권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독재 정권은 부정선거나 의원에 대한 공갈, 협박, 매수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의회 활동을 무력화한다. 헌법상 불체포특권이 존재하므로 합법적인 체포보다는 납치와 불법 감금으로 의회 활동을 방해하는 일도 다반사다. 불체포특권이 독재 정권의 더 큰 불법을 조장하는 셈이다.
이코노미스트지가 해마다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국가로 꼽힌다. 일본과 대만이 우리 뒤를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행정부가 국회의원을 불법으로 체포해 의회 활동을 방해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근래 불체포특권은 부패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수사 대상이 된 국회의원의 체포나 강제 조사를 막는 방탄 역할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정치 개혁을 논의할 때마다 불체포특권 등 국회의원의 특권을 내려놓겠다고 약속하고 있지만 실제로 실행된 것은 없다.
국회의원들은 범죄 혐의로 수사받을 때마다 정치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법조인이 수사받으면 사법 탄압이고, 기업인이 수사받으면 경제 탄압이 된다. 헌법 제11조는 사회적 특수계급이나 특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못 박고 있다. 국회의원도 일반 시민과 다른 특권을 가질 아무런 이유가 없다. 새해에는 여야 모두 약속한 정치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해 본다.
[강일원 변호사·전 헌법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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