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할 때를, 그리고 머물러야 할 순간을 아는 ‘5곳’
하루를 일곱 번 보내고 나면 새로운 한 주의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그 일주일을 평균 4번 정도 보내면 한 달이 지나간다. 그렇게 11번을 반복하고 나면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다. 어느 덧 2022년을 정리하는 12월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가야할 때인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쯤은 잠시 시간을 멈춰 세우고 싶을 때가 있다.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거나, 정말로 아름다운 것을 봤다거나 할 때가 그렇다. 이런 잊기 싫은 때나 장소 등이 있으면 놓치고 싶지 않다. 올해를 되돌아보면 분명 비슷한 기억으로 시간을 사로잡고 싶을 때가 있었을 테다. 머물러야 할 순간인 것이다.
결국 가고 멈추고의 연속이 인생이다. 인생의 쳇바퀴를 쉼 없이 돌리는 일을 누구나 하기에 순간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자 할 때 묘한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진으로, 영상으로 해소할 수 없는, 기억이 추억이 되는 어느 지점, 바로 그 찰나를 잡으려면 수단이 필요한 법. ‘이야기’야말로 가장 적절한 추억지킴이로 손색없다.
건축물이 대표적이다. 건물 저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건물이 올라간 땅이, 건물을 지은 사람의 철학이, 건물이 들어선 시간이 각각 다르니 가능한 얘기다. 어떤 정자는 조선의 왕이 바라보던 200여 년 전 풍경이 겹쳐 보이고, 어떤 역은 첫사랑을 닮아 애틋하다.
직선의 미학이 돋보이는 사찰부터 최근에 지어진 공공도서관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뛰어난 건축물을 간직한 경기도 내 5곳을 소개한다. 저마다의 이야기로 말을 거는 건축물들과 함께 자신만의 이야기, 그리고 인연을 쌓아가면 어떨까.
나무·집·아이·새 등 일상적 소재를 담박하게 그리며 순수한 내면세계를 추구했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장욱진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을 건축적으로 풀어냈다. 작가의 호랑이 그림 ‘호작도’와 집의 개념을 모티프로 한 건물은 2014년 김수근 건축상을 받고, 영국 BBC의 ‘위대한 8대 신설미술관’에 선정되는 등 수많은 매체가 주목했다.
내부 또한 놓치면 안된다. 직사각형 형태의 보통 미술관과 달리, 중정과 각각의 방으로 구성한 전시 공간은 화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한옥의 구조를 닮았다. 2층에서 내려다보이는 꺾어진 계단은 미술관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보여준다.
용두바위에 우뚝 세운 각루는 ‘ㄱ’ 자형 평면에 북쪽과 동쪽은 ‘凸’ 형으로 빼내 주변을 살피고 화포를 쏘기에 적합했다. 미려함이 적을 두렵게 해 이기게 한다는 수원화성 축성의 철학은 방화수류정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석재와 목재, 전돌이 어우러진 벽체는 위용이 넘치고, 팔작지붕을 여러 개 겹친 듯 화려한 지붕은 사방에서 달리 보인다. 반달 모양 못인 용연이 한눈에 보이는 누각은 유사시에는 군사 시설, 평소에는 풍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방화수류정은 멀리서 보아도, 그 안에 있어도 눈이 호강한다. 굽이굽이 흐르는 성곽 위의 정자는 장엄하고, 정자에서 보는 용연과 수원 시가지는 시원스럽다.
MZ세대에게는 감성 사진을 찍는 피크닉 장소로 통한다. 연못의 수양버들을 배경으로 피크닉 소품을 놓으면 ‘좋아요’가 찍히는 사진 완성이다. 어둠이 내리고 성벽을 따라 조명이 켜지면 황홀함은 배가된다. 용연에 달이 떠오르는 모습은 수원팔경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수려하다.
사실 대웅전은 절의 중심 전각이자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법당인 만큼 화려함을 드러내기 위해 팔작지붕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와 달리 칠장사의 대웅전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위용은 없지만, 볼수록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질박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대웅전은 찬찬히 볼수록 진가가 드러난다. 단순한 선의 미학을 알려주는 지붕 외에 색 바랜 단청, 불화와 연꽃무늬로 채색한 내부의 우물천장도 고색창연하다. 칠장사는 신라 선덕여왕 5년인 636년에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에 혜소국사가 중창한 도량이다.
유서 깊은 사찰은 귀한 문화재를 다수 품었다. 절 입구의 철 당간지주는 청주 용두사지, 공주 갑사의 것과 함께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좀처럼 보기 힘든 문화재다. 나한전 옆의 혜소국사비는 대웅전과 더불어 절의 보물 중 하나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당시부터 명맥을 이어온 곳으로 1980년 로마 교황청이 세계 순례성지로 선포하며 많은 여행자가 찾는다. 성지는 입구부터 남다르다. 어른 손 크기만 한 어두운 기와를 층층이 쌓아 거대한 무덤 같은 입구를 만들었다.
성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순백의 성모상이다. 구산성당 초대 주임 고(故) 길홍균 신부가 꿈에서 본 성모의 모습을 김세중 화백이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심혈을 기울여 조각했다. 안당문을 지나면 소나무가 드리운 순교자 9명의 묘역과 구산성당이 나타난다.
신앙을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은 성인의 비장한 결의와 달리, 오늘날의 성지는 한없이 평화롭다. 구산성당 옆 십자가의 길은 특히 고요가 짙다. 드문드문 놓인 청동 조각상을 따라 사색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1956년 영업을 시작했지만, 중앙선 철로를 복선화하면서 2008년 폐역이 됐다. 164㎡의 아담한 역사에는 60여 년 전 간이역의 모습이 오롯하다. ‘一’ 자형 평면 구조의 역사는 짙은 일식 기와를 얹었다.
출입구의 뾰족한 박공지붕과 ‘삐걱’ 소리가 날 듯한 나무 문, 예스러운 역 간판에서 옛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기차를 기다리던 대합실은 능내역의 옛 풍경을 간직한 전시관이 됐다.
능내역을 즐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레트로 감성의 사진 찍기. 역사 앞 나무 벤치, 새빨간 우체통, 빛바랜 흑백사진 등 눈 닿는 곳곳이 포토존이다. 둘째, 자전거 타기. 역 근처에서 빌린 자전거로 페달을 밟으며 팔당대교, 정약용유적지 등 주변 풍경을 품에 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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