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37년째 책 나올 때마다 놀라워”[박주연의 메타뷰]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60)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침실 한켠 책장에 꽂힌 1200여권의 시집 중 한 권을 무작위로 뽑는다. 아무 데나 펼쳐 시를 소리내 읽는다. 그는 “오늘 나는 문학적인 하루를 보낼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 위한 습관”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음식의 질은 물론 접시와 수저받침 하나까지 정성을 다한 자신만의 아침식탁을 차린다.
출근길에는 단골 꽃집에 들러 꽃을 한아름 산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마음산책 출판사 6층 회의실에 놓인 커다란 화병의 꽃을 깔아끼우기 위해서다. 중정(中庭)을 사이에 두고 집무실 맞은편에 위치한 회의실은 대형 탁자 위 꽃과 오디오 기기, 책과 그림으로 장식돼 있다. 그는 “작가를 비롯해 필자 대다수가 예술가이다 보니 일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는 것보다 꽃과 음악으로 분위기를 먼저 부드럽게 만드는 게 여러모로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소한 행동 하나에도 치밀한 전략이 숨은, 경영인다운 면모다. 이 회의실에서 지난 12월 23일 정 대표를 만났다. 트레이드 마크처럼 앞머리를 짧게 자른 단발머리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그는 목둘레에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에 체크무늬 스커트를 매칭한 샤방샤방한 옷차림으로 기자를 맞았다.
-출판사가 참 예쁘네요. 건물을 직접 지어 입주한 거지요.
“창립 20년을 맞은 2020년에 완공해 그해 12월에 입주했어요. 건물의 2~4층은 임대를 주고 1층은 주차장, 5층은 편집부와 디자인실, 6층은 제 집무실과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어요. 지하홀이 특히 의미 있어요. 2018년부터 ‘마음산책 북클럽’을 하고 있는데, 매해 100명씩 선정된 독자들이 같이 책을 읽은 후 독후감을 나누는 자리가 필요해요. 장소 섭외가 쉽지 않아 애를 좀 먹었는데 이제 이 건물 지하에 홀을 만들어 독자들이 언제든 방문하고 북토크와 저자 특강 등을 열고 있어요. 요즘에는 독자 모니터링이 중요하거든요. 마음산책 북클럽은 누적 500명의 회원이 있고, 내년에 6기를 뽑아요.”
-출판편집인으로는 37년, 여기에 더해 출판경영인으로 산 지도 22년이 됐더라고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요.
“출판에서 맺은 인연들이 저를 살렸어요. 책이 아니었으면, 또 출판 편집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요. 이 직업 덕분에 제가 많이 바뀌었거든요. 어렸을 때는 거의 자폐적인 성격이었어요. 사람을 잘 못 만났죠. 대학교 기숙사 생활 4년간 같이 밥 먹는 게 너무 어색해 식당 여는 시간을 놓쳐 자주 굶었을 정도예요. 그런데 출판 일은 타인의 힘을 구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거예요. 협업이 기본이더라고요. 성격 때문에, 또 두려움 때문에 제가 좋아하는 이 일을 못 해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먼저 다가가 제안하는 용기를 내기 시작한 게 오늘에 이르렀어요.”
-1996년부터 출판 불황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2000년 8월 마음산책을 설립해 22년을 보내는 동안 경영상 큰 위기는 없 었습니까.
“절실한 마음으로 출판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잘 견디겠다는 각오를 매번 다졌기에 위기를 잘 느끼지 못했어요. 살아 움직이고 있고, 책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위기는 없다’는 마음으로 위기를 둔감하게 받아들인 거죠. 위기에 예민해지기보다는 새로운 기회에 민감한 출판 인생을 살아왔어요. 아침마다 오늘은 어떤 언어로 생각을 담은 원고를 만날 수 있을지 설레요.”
어릴 땐 사람 잘 못 만나는 자폐적 성격
협업이 기본인 출판 일 때문에 바뀌어
“책 만들 힘 있다면 출판 위기는 없다”
-마음산책은 문학/예술/인문서 출판사이지요. 특히 기획이 빛나는 예술가들의 산문으로 독보적 영역을 구축해왔어요. 틈새시장 공략이 적중한 것 같습니다.
“맞아요. 마음산책을 설립할 때 어떤 지향점을 가진 출판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가 문학과 그림, 영화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 방면의 원고로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문학/예술/인문서가 될 텐데 그런 책을 전문적으로 내는 내로라하는 출판사는 이미 많은 거예요. 차별화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기획서를 들고 특정 예술가를 찾아가 ‘이런 글을 산문으로 써달라’고 하는 거죠. 예전에는 여기저기 발표한 글을 모아 산문집을 내는 게 흔했고, 그것이 잡문집이라면서 의미 부여를 안 했어요. 제가 생각한 산문은 달라요.”
-어떻게요.
“어떤 작가를 연구하거나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는 데 최적의 장르이자 민낯의 얼굴이 산문이에요. 그러니 아주 중요하죠. 실제로 프랑스나 영미권에서는 산문이 이미 오래전부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고요. 저는 출판하고 싶은 산문이 아주 많았어요. 가령 화가의 그림은 전시회를 직접 가거나 도록을 사는 게 낫지, 책 속에 작고 평범하게 인쇄된 그림을 보는 것으로는 충분히 만족할 수 없잖아요. 제가 궁금한 것은 작가의 삶과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는지에요. 즉 이야기가 담긴 예술서를 해당 예술가의 육성으로 내자고 마음먹은 거죠.”
소설가 김영하의 영화산문 <굴비낚시>를 시작으로 박영택(미술평론가), 이해인 수녀, 김소연(이상 시인), 김점선(화가), 박완서, 김중혁, 이승우, 정이현, 김연수(이상 소설가),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이상 영화감독), 권남희(번역가), 신형철(문학평론가), 박용만(전 두산그룹 회장) 등의 산문이 마음산책에서 줄줄이 나왔다. 정 대표의 기획력은 또 다른 곳에서도 빛났다. 박완서의 <박완서의 말>을 비롯해 사상가 또는 문학가의 말을 엮은 ‘말 시리즈’, 김금희의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등 한국 문단의 주요 작가의 짧은 소설을 펴내는 ‘짧은 소설 시리즈’, 여성의 일과 성장을 담은 ‘직업 이야기 시리즈’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뭔가요.
“김용택 시인이 문학을 공부하면서 읽었던 시인들의 시 중 특히 오랫동안 남아 빛나는 시들을 한데 묶어낸 <시가 내게로 왔다>예요. 2001년부터 시리즈로 5권이 출간됐는데, 지금까지 80만부가 판매됐어요.”
-지금까지 몇 종의 책을 출간했습니까.
“마음산책에서는 520종,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해 편집자로 참여한 책을 모두 합하면 1400여종이에요.”
그는 1962년 전라북도 전주 출생이다. 아버지는 도청 공무원이었다. 3남2녀 중 막내로, 늘 다락방에 틀어박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그를 식사 때마다 불러내리는 게 가족의 일상이었다.
-혼자 다락방에서 뭘 했나요.
“‘새농민’, ‘주부생활’ 같은 각종 잡지가 다락방에 쌓여 있었어요. 학교도 다니기 전이니 의미도 모른 채 닥치는 대로 읽었죠. 그걸 통해 세상을 만났어요. 김말봉(1901~1961)이라는 이름을 잊을 수 없어요. ‘새농민’에 그분의 소설이 연재됐는데, 제가 모르는 단어가 수천 개씩 나왔어요. ‘이건 어른들이 쓰는 단어인가보다’ 하며 수상한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나요. ‘주부생활’ 첫 장을 넘기면 나오는 큰 광고 하단에 쓰인 작은 글씨가 너무 예뻐 손으로 몇 번이고 쓰다듬었던 기억도 있어요. 활자에 관심이 많았어요.”
낯가림이 심한 그가 좋아하는 것은 독서와 달리기였다. 삼중당 문고를 읽으며 문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150원이면 손바닥만 한 문고판을 살 수 있어 하염없이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산이고 들이고 뛰어다녔다. 달리기만큼은 늘 1등이었다.
중앙여중을 거쳐 1978년 전주여고에 입학했다. 고교평준화가 이뤄지기 바로 전 해에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다. 하지만 오직 ‘입시’만 강조하는 학교생활에 숨이 조여왔다. 답답한 마음에 야간학습 때면 홀로 교실에서 빠져나가 운동장을 달리거나 드러누웠다. 그는 “공부한다고 세상을 차단한 채 사는 아이들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고 말했다. 결국 엄마가 학교에 불려왔다. 엄마의 설득에 그는 더 이상 야간학습을 빼먹지 않았다. 대신 글을 썼다.
-어떤 글을 썼습니까.
“시를 썼어요. 하루 일과 중 포착된 어떤 것들에 대해서요. 어느 날 이화여대 영문과에 재학 중인 다섯 살 위 언니가 제 시노트를 우연히 봤어요. ‘너 글을 쓰고 싶어하는구나’ 하며 묻더라고요. 그렇다고 하니까 ‘사회에 도움이 되고 대중과 소통도 되는 사회적 글쓰기를 해보면 어떻겠니? 기자를 하면 사회적 글쓰기가 가능하다’고 해요. 그때부터 신문기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도움이 될까 해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간 거고요.”
-81학번으로 1985년 2월에 졸업했지요. 언론사 기자직 공모에는 응시했나요.
“경향신문과 KBS에 도전했지만 떨어졌어요(웃음). 어느 날 일간지 하단광고면에 출판사 ‘홍성사’의 기자 채용 광고를 봤어요. ‘꿈과 일터’라는 막 창간한 잡지의 기자를 뽑는 거였어요. 우여곡절 끝에 합격했어요. 하지만 ‘꿈과 일터’는 창간 6개월 만에 휴간했어요. 그후 단행본 편집자로 일하게 됐는데, 신세계였어요. 제게는 천국이었어요(웃음).”
마음산책에서 520종, 편집은 1400여종
처음 단행본 편집자 됐을 때 천국 맛봐
-어떤 점에서요.
“기자로 일할 때는 너무 힘들었거든요. 뭇사람들을 섭외하고 만나서 취재하는 게 힘들어 끙끙 앓았어요. 그에 비해 편집자는 필자와 내밀하게 잘 소통하면 일의 상당부분이 해결돼요. 책 만드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지 몰랐어요. 처음에는 반죽이 계속 잘 안 되다가 결국 풍미 좋은 빵이 완성되는 과정과 같아요. 처음 받았을 때 오자와 탈자, 문맥상 오류 등으로 불완전했던 원고가 저자와 편집자의 꾸준한 소통과 여러 단계를 거쳐 한 권의 멋진 책이 되어 나오니까요. 첫 책을 받아들었을 때 정말 울 뻔했어요. 저는 지금도 매번 책이 나올 때마다 너무 놀라워요.”
-37년이나 책을 만들었는데도 그렇다고요.
“새 책이 막 나와 그것을 보고 만질 때의 흥분감은 어마어마한 중독이에요. 그런데 제가 좀 특이한 경우라고는 해요. 노동으로 보면 이 일이 변수가 많아 자신을 굉장히 갉아먹거든요. 나만 잘하면 될 일이 아니라 필자가 마음을 바꿀 수도, 디자인 작업이 잘못될 수도, 인쇄나 제본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래서 후배들은 번아웃이 많이 생긴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출판업에 딱 맞는 행운의 체질을 타고난 것 같아요.”
그는 ‘홍성사’에서 1년을 보낸 후 <소설 영웅문>으로 대중출판의 선두에 섰던 ‘고려원’으로 옮겨 3년을 일했다. 100권으로 기획된 중편소설선집과 시집, 장편소설들을 편집했다. 대형 베스트셀러였던 조성기의 <야훼의 밤>, 남지심의 <우담바라>가 그의 손을 거쳐 출간됐다. 이윤기의 신화소설 <뮈토스>도 그가 편집자였다. 이후 ‘삼성출판사’에서 2년을 보낸 후 문학의 세계가 그리워 1992년 ‘세계사’로 이직했다. 그는 ‘세계사’에서 만드는 계간지 ‘작가세계’의 편집장이었다. 1996년 ‘열림원’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비롯해 시인 정호승, 김용택, 곽재구, 이해인 수녀의 시집과 이청준의 전집, 현각 스님의 <만행> 등을 출간했다.
-세계사에서 근무할 때인 1992년에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지요. 어쩌다 시인이 된 건가요.
“‘고려원’ 다닐 때 편집장이던 최승호 시인이 당시 ‘세계사’ 주간으로 계시면서 저를 데려갔어요. 일간지가 공모하는 신춘문예에 계속 탈락하면서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20~30대 내내 매일 시를 써왔어요. 안 쓰고는 견딜 수 없었거든요. 잠들기 전에 반드시 시 한 편을 쓰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어요. 어느 날 상사인 최승호 시인께 그동안 제가 써놓은 시 수십 편을 보여드렸어요. 며칠 동안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길래 낙심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몇 편을 고를 테니 등단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등단하게 됐어요.”
-1994년 첫 시집 <비밀을 사랑한 이유>에 이어 1999년 두 번째 시집 <나만의 것>을 발표하고선 더 이상 펴낸 시집이 없어요. 이유가 뭔가요.
“2000년 ‘마음산책’을 차린 후 24시간 내내 마음산책에 온 신경이 집중된 삶을 살아왔어요. 그러니 시 쓸 시간이 있나요(웃음).”
그가 마음산책을 경영하면서 ‘휘청’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남편 윤성근 시인(1960~2011)의 갑작스러운 사망을 맞았을 때다. 대장암 말기였던 윤 시인은 2011년 4월 8개월간의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81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나는 햄릿이다>(1992)를 비롯해 시집 4권을 냈다. 1999년부터는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로 일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시를 썼다. 원고를 아내에게 주며 “부고하지 말 것”과 “1주기 때 유고시집을 만들어달라”고 유언했다. 아내는 마음산책에서 남편의 마지막 시집 <나 한 사람의 전쟁>을 출간했다.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뎠습니까.
“남편의 투병생활을 직원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회사와 병원을 오갔어요. 매일 남편이 입원한 서울성모병원에서 새벽을 보낸 후 출근해 급한 업무를 처리했죠. 남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남편이 그렇게 떠난 후 5년간은 서울성모병원 앞을 차마 지나가지 못했어요. 남편이 누워 있던 꼭대기층의 병실, 그리고 그 병실 창밖 우리의 고통과는 상관없는 견고한 세상을 보며 가졌던 생각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남았기 때문이에요.”
-남편은 어떤 분이었나요.
“어느 모임에서 남편을 알게 됐는데, 이후 퇴근 무렵이면 제가 일하는 출판사 앞에서 저를 기다렸어요. 세 번째 데이트한 날 남편이 청혼했어요. 그래서 만난 지 3개월 만인 1988년 10월에 결혼했죠. 저는 그분이 시인인 게 좋았어요. 만나면 시 이야기, 책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았고요. 저는 그분이 끝까지 시인으로 살다 간 게 너무 고맙더라고요. 좋은 선물을 주고 간 것 같았어요.”
“시인으로 살다 간 남편, 늘 선물 같아”
거리풍경 보며 달릴 때 엔도르핀 샘솟아
묘비에도 ‘편집자로 살았다’ 쓰고 싶어
정 대표의 자택은 마포구 신공덕동에 있다. 그는 주 2회 필라테스를 하고, 주말이면 집에서부터 효창공원을 거쳐 다시 집까지 4㎞ 정도를 달린다. 그는 “거리의 풍경을 보며 달릴 때 세상이 내 몸을 통과하고 내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 들어 엔도르핀이 샘솟는다”고 말했다.
-경영인보다 여전히 ‘편집자’로 불리기를 원한다지요.
“책의 세계에는 저자나 독자와 다른 차원의 편집자 영역이 있어요. 저자 섭외, 원고 기획, 교열, 편집, 디자인 작업을 거치면서 세상을 조금 다른 각도로 바라본 시선을 담고,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책을 생산하는 직업이죠. 편집자로 37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더 새로운 모습의 편집자로 거듭날 겁니다. 같은 원고를 줘도 편집자마다 다르게 책을 만들 수 있어요. 원고를 해석하고 편집하는 데 편집자의 시각과 취향이 반영되기 때문이에요.”
그는 언젠가 자신이 사망한 후 새겨지기를 원하는 묘지명이 있다고 했다. ‘정은숙은 편집자로 살았다’이다. 간결한 이 한 문장이 그의 꿈과 인생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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