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道를 따르는 사람들]① 한희수 롯데百 소믈리에 “끊임없는 이미지 트레이닝이 亞 대회 우승 비결”
한식학자 김상보는 ‘술은 사람의 영혼을 맑게 해준다’며 ‘사람의 뜻과 신의 뜻을 화합하는 매개체가 곧 술’이라고 말했다. ‘주도(酒道)’는 마치 의식을 치루듯 정중하게 이 매개체를 다루는 방법을 의미한다. 흔히 이 단어를 그저 ‘술 마시는 법’이라고만 생각하지만 그보다 깊은 속 뜻이 담겨있는 셈이다. 주도는 문자 그대로 ‘술의 길’을 뜻하기도 한다. 코로나 이후 혼술(혼자 마시는 술)과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주류 시장은 커졌지만, 편하게 마시면서 취하는 사이 ‘좋은 술을 바른 마음가짐으로 맛있게 즐기는 법’에 대한 설명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조선비즈는 술의 길에서 정점에 선 사람들을 만나 ‘술 마심’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편집자주]
‘와인을 가장 완벽한 상태로 조율하는 사람들’ 소믈리에라면 누구나 한 번 쯤 내로라하는 대회에서 우승하는 꿈을 꾼다. 당연히 그 의지만큼 뒷받침돼야 하는 것이 바로 실력과 지식이다.
와인을 업(業)으로 삼은 베테랑 소믈리에라면 다들 실력과 지식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긴박한 대회 상황, 심사위원들이 던지는 돌발 주문에 대처하려면 실력과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인자 자리에 올랐던 소믈리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침착함과 대범함이 서비스의 성패를 가른다고 입을 모은다. 여기에 뻔뻔하다 싶을 정도의 여유까지 한 스푼 더해야 식사 자리 분위기를 좌우하는 관리자로 올라선다.
지난달 15일 오후 2시 ‘제8회 아시아 베스트 소믈리에 대회’ 결선이 열린 베트남 호치민 카라벨 사이공 호텔. 사회자가 결선 참가자 3명 가운데 가장 먼저 시험을 치르는 한희수(30·롯데백화점) 소믈리에에게 두 번째, 세 번째 과제를 한꺼번에 내주자 일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보통 이런 국제 대회는 해결하는 데 4~5분이 걸리는 과제가 하나씩 순서대로 나온다. 여러 과제를 묶어서 출제하는 경우는 드물다.
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12분. 여느 과제보다 2배 이상 긴 시간이다. 대신 해결하기 훨씬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나왔다.
먼저 5분 안에 6명 잔에 하프보틀(반 병짜리) 샴페인을 따라야 했다. 그 다음 7분 동안 ‘매그넘(magnum)’이라 부르는 일반 와인(750mL) 두 배에 달하는 병에 담긴 레드 와인을 디캔팅 (와인병에 남은 포도 찌꺼기를 거르는 작업)해서 또 다른 여섯 잔을 서빙해야 했다.
샴페인은 거품이 많이 나 짧은 시간 동안 넘치지 않게 따르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양이 넉넉치 않은 반 병짜리라면 눈대중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한 양을 나누기 어렵다.
한 소믈리에는 능숙한 솜씨로 샴페인 잔과 레드 와인 잔을 살피더니, 하나씩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벽면 한 쪽에 자리 잡은 셀러를 뒤적여 보통 와인보다 큰 와인 병을 꺼냈다. 이어 호스트(손님을 접대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능숙한 프랑스어로 병을 보여주며 물었다.
“가지고 오신 와인이 크뤼 부르주아 등급 샤토 노이약(Château Noaillac) 2016년산 맞으신가요?”
매그넘은 용량이 일반 와인병 두 배일 뿐 아니라 그만큼 더 무겁다. 그는 어린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2킬로그램(kg)이 넘는 병을 두 손으로 기울여 본인 앞에 놓인 시음 잔에 와인을 한 모금만 따랐다.
장 파스칼 포베르(Jean-Pascal Paubert) 프랑스 소믈리에 대회 기술 위원장을 포함한 심사위원 여섯 명은 한 소믈리에 일거수 일투족을 꼼꼼히 살폈다.
한 소믈리에는 “매그넘 사이즈 병에 맞는 디캔터와 파니에(panier)를 찾아 봤지만 보이지 않아 ‘일반 디캔터 두 개에 나눠서 디캔팅을 하겠지만,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겠다’고 예고를 했다”며 “나중에 심사위원장 심사평을 들어보니 이렇게 신중하고 세심한 대처를 한 부분에 대해 칭찬을 하더라”고 말했다.
파니에는 오래된 와인을 비스듬하게 눕혀서 따르는 조그만 바구니다. 오래 묵힌 와인에 생긴 침전물이 병 안쪽 벽을 타고 바닥으로 쉽게 가라앉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파니에 위에 놓인 와인을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는지 여부는 소믈리에 대회에 단골로 나오는 과제다.
으레 이전과 유사한 문제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다른 결선 진출자들은 여러 변수가 한꺼번에 등장하자 우왕좌왕했다. 샴페인 여섯 잔을 따르는 두 번째 과제는 다들 무난히 완수했지만, 레드 와인 여섯 잔까지 완벽하게 서빙한 사람은 한 소믈리에 뿐이었다.
한 소믈리에가 마지막 심사위원 잔에 레드 와인을 따르고 인사를 하자 관객석과 심사위원들에게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레스토랑에서 일반적으로 서비스하는 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은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회에서는 항상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어려운 돌발 상황이 나타나죠.
언제 다시 이 자리에 설 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긴장까지 더하면 평소에 잘 하던 일을 하다가도 손이 꼬입니다.
출·퇴근길에도 머릿 속에서 끊임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지 않으면 이럴 때 무너지는 거죠.”
한 소믈리에는 이어진 네번째, 다섯번째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와인 정보를 가린 채 하는 시음) 과제에서도 다른 참가자를 압도했다.
색상을 구분할 수 없는 검은 와인 세 종류가 어느 지역에서 어떤 품종 포도로 만든 와인인지 구분하는 과제에서 한 소믈리에는 4분 동안 이 와인들을 완벽하게 분류했다.
그는 “보르도에서 와인 공부를 해서 이 지역 와인만큼은 꽤 잘 맞추는 편인데, 우연히 검은 잔에 담긴 와인 세 종류가 모두 보르도 지역 와인이었다”며 “운이 좋아서 이 과제에서도 상당한 배점을 땄다”고 말했다.
그 결과 한 소믈리에는 싱가포르, 홍콩,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다른 국가에서 온 소믈리에를 누르고 올해 아시아 최고 소믈리에 자리에 올랐다.
한 소믈리에는 지난 10월 서울서 소펙사(SOPEXA·프랑스 농식품 진흥공사) 코리아가 주관한 제21회 한국 소믈리에 대회 준우승자 자격으로 이번 대회에 참석했다. 우리나라 소믈리에로서는 세번째 우승이지만, 준우승자로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한 소믈리에는 ‘우연히’, ‘운이 좋아서’ 아는 와인이 나온 덕분에 우승했다고 겸손하게 답했다.
그는 “프랑스 보르도 와인전문학교 CAFA도 우연히 가게 됐다”고 말했다. 2010년 수능을 마치고, 충동적으로 결정한 프랑스 유학이었다.
한 소믈리에는 19살 프랑스 중부 소도시 투르(Tours)의 한 어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와인에 대한 지식은 커녕, 프랑스어조차 한마디도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프랑스어를 배우는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와인에 눈을 떴다.
한 소믈리에는 “친구들과 저렴한 프랑스 와인부터 마시기 시작하면서 와인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며 “전문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3개월은 너무 낯선 용어 때문에 힘들었지만, 책을 달달 외우기 시작하니 와인 공부가 할 만해 졌다”고 말했다.
이따금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 보면 필연(必然)일 때가 있다. 그는 와인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와인에 대한 지식 뿐 아니라 대범함과 뻔뻔함도 같이 챙겼다.
“여느 프랑스 직업학교처럼 CAFA에서도 일년 동안 포도밭에서 한 번, 와인가게에서 한 번 이렇게 두 번 인턴십을 해야 했어요.
포도밭에서는 한창 포도를 거두는 9월에 인턴십을 했는데, 차도 몰아본 적 없는 저한테 스틱으로 된 수동 트랙터를 몰아보라 했습니다. 걱정했는데 정작 트랙터 운전을 해보니까 할 만 하더라구요.”
와인가게에서는 평생 와인을 마셔온 프랑스 현지 소비자에게 어떤 와인이 좋은지 권장하는 일을 맡았다.
“한국에서 온 햇병아리가 프랑스 음식에 이 와인이 맞다고 자신있게 말하려면 일단 뻔뻔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경험을 해봐서 큰 국제 대회에서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 소믈리에는 2014년 프랑스에서 돌아와 올해 상반기까지 SPC그룹 외식사업부에서 일했다. 이후 지난 9월 롯데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겨 VIP를 상대로 한 와인 컨설팅과 강의를 맡고 있다.
그에게 우승 이후 새롭게 그린 청사진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바로 ‘주변에서 다음 대회부터는 다른 소믈리에에게 양보하라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곧 생각한 바가 있다는 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보통 다른 소믈리에 분들은 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해서 호텔이나 파인다이닝 같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저는 기업에서 시작해서 또 다른 기업으로 넘어 오느라 이렇게 멋들어진 곳에서 쌓은 경력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런 점이 조직 문화에 특화한 소믈리에가 되기 좋은 것 같아요. 헤드 소믈리에나 음료 부문 디렉터 자리에 머물지 않고 롯데백화점처럼 와인업계에 영향력 있는 기업에서 큰 역할을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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