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의 아트레터] 경계를 허문 이름, 버질 아블로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2022. 12. 3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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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 최초의 흑인 아트디렉터
1년전 요절···브루클린 뮤지엄에서 회고전
패션·미술·건축·음악 등 장르 간 융합 시도
스트리트와 럭셔리, 패션과 예술 넘나들어
지난해 요절한 루이비통의 아티스틱 디렉터 버질 아블로의 회고전 ‘Figures of Speech’가 뉴욕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2023년 1월 29일까지 열린다.
[서울경제]

1년 전 41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레 요절한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Virgil Abloh·1980~2021)는 패션 업계는 물론 건축,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인정받았던 만능 크리에이터였다. 아블로는 2018년 백인 중심인 럭셔리 패션계 역사상 처음으로 루이비통(Louis Vuitton)의 ‘흑인’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됐다. LVMH의 루이비통에 합류하기 전, 이미 자신의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파이렉스(Pyrex)와 오프 화이트(Off-White)를 성공적으로 이끈 경험이 있던 아블로는 기존 명품 브랜드의 편중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떨치기 위해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시도했다. 스트리트 패션의 슈프림(Supreme), 스포츠 의류의 나이키(Nike), 가구의 이케아(IKEA), 일본 네오 팝 아트의 대표작가 타카시 무라카미(Takashi Murakami) 등은 아볼로와 오랫동안 협업해온 파트너들이다.

버질 아블로는 살아 생전 이케아(IKEA), 슈프림(Supreme), 나이키(Nike)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했다.

브루클린 뮤지엄이 아블로의 커리어를 되짚어보는 회고전 ‘Virgil Abloh: Figures of Speech’를 열고 있다. 2019년 시카고 현대미술관에서 처음 열린 이 회고전은 미국 내 하이아트 뮤지엄, ICA 보스턴미술관 같은 굵직한 기관으로 이어졌다. 아블로는 브루클린 뮤지엄 전시를 준비하던 중 전부터 앓고 있던 악성 희귀 심장 종양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블로는 1970년대 아프리카 가나에서 미국 시카고 외곽으로 옮겨온 이민가정에서 자랐다. 학부에서는 엔지니어링을, 석사는 건축을 전공한 그는 대학원 시절 유명 건축가 렘 쿨하스와 프라다의 협업을 보고 패션계에 관심을 갖게된다. 2009년 이탈리아의 유명 패션 브랜드 펜디(Fendi)의 인턴 수습 기간을 거친 그는 유명 래퍼 카니예 웨스트의 눈에 띈다. 웨스트의 앨범 커버를 비롯한 여러 아트 디렉션을 맡으며, 아블로는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다.

2010년 초반 스트리트와 럭셔리 패션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을 예상한 버질 아블로는 자신의 브랜드 파이렉스(Pyrex)에 이어 오프 화이트(Off-White)를 론칭했고, 패션계를 비롯한 예술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아블로는 ‘파이렉스’를 공식 론칭하며 자신의 이름을 패션계에 각인시킨다. 파이렉스는 당시 재고가 넘쳐나던 ‘챔피언’이나 ‘랄프 로렌’의 티셔츠를 개당 50달러에 사들여, 브랜드 로고를 재프린트해 10배 넘는 가격에 다시 팔았다. 아블로의 ‘쿨’한 브랜드 전략은 통했고, 판매 결과도 대성공이었다. 아블로는 후에 “파이렉스는 패션의 유행은 누가 만들고 주도하는지에 물음을 제기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고 말했다.

파이렉스의 계보를 이어 ‘오프 화이트’가 탄생했다. 제품에 붙은 빨간 케이블 타이와 반 투명한 태그는 오프 화이트의 스타일로 자리 잡았고,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인용구의 상징인 큰따옴표 (“ ”) 안에 상품을 지칭하는 단어를 직접 써 놓은 것도 오프 화이트의 시그니처다. 대표적으로 가죽 가방 위에 “Sculpture(조각)”라고 적어놓음으로써 자신이 디자인한 가방이 단순한 패션 오브제가 아니라 예술의 영역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콘셉트를 제시했다. 이는 뒤샹이 변기를 거꾸로 뒤집어 일상적 오브제 또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전 세계 패션 피플의 마음을 훔쳤다. 이러한 파격적 시도는 그가 루이비통을 보유한 LVMH의 디렉터 자리를 차지하는 밑바탕이 됐다.

버질 아블로가 사망하기 직전 디자인한 루이비통의 ‘2022 봄-여름 컬렉션’에 포함된 의상이다. 뒤에는 무라카미 타카시와 협업한 작품이 설치돼 있다.

이번 회고전은 아블로가 살아생전 다방면으로 활동한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가 창작한 다양한 예술품, 디자인 상품들의 원본, 가구 등이 전시됐다. 그림과 조각이 주로 설치되던 전시장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아블로가 패션쇼에서 사용하던 디제이 믹싱 기계부터, 자신이 디자인 한 나이키 신발, 오프 화이트와 루이비통의 의류들로 꽉 찬 전시장은 마치 백화점의 쇼룸을 방문한 듯한 느낌을 준다. 수트에 구두보다 오프 화이트의 스니커즈를 신는 것이 더 ‘쿨’한 세상이 됐다. 패션계에서도 스트리트와 럭셔리 패션의 경계가 사라지듯, 미술계에서도 점차 작가의 독창성을 상징하는 ‘오리지널리티’의 중요성이 무뎌지고 있다. 아블로가 보여준 다양한 협업의 형태는 패션을 넘어 동시대 예술의 현주소를 잘 대변하고 있다. /글·사진(뉴욕)=엄태근 아트컨설턴트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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