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수호자’·‘개혁 막고 보수 회귀’…피아노 즐기고 길냥이 돌보기도

조현 2022. 12. 3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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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한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은 누구
2007년 6월 30일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이 바티칸에서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바티칸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종했다고 발표했다. AP/연합뉴스

31일 오전(현지시각) 95살 나이에 선종한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 내 보수파에서는 ‘진리의 수호자’로, 진보파에서는 교회 개혁을 거부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원점으로 되돌린 이라는 정반대의 평을 듣는 인물이었다.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제265대 교황직에 올랐으나, 재위 8년 만인 2013년 2월 건강상 이유로 물러남으로써 가톨릭 역사상 598년 만에 중도 사퇴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전격적인 퇴임은 가톨릭 교회의 고질적인 아픔이었던 어린이 성추행 사제에 대해 그가 교리 수호에서 보여준 강고함과 달리 너그러움을 보인 사실이 밝혀지고, 2012년 교황청 내 부패와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 내부 편지와 문서가 교황의 최측근 집사에 의해 유출된 데다 교황청 내 부패를 청산하려던 노력이 반대파에 의해 수포로 돌아간 것 등 때문으로 관측됐다. 또 이미 교황 취임 당시 78살로, 1730년 교황 클레멘스 12세 이후 275년 동안 선출된 교황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오래 재임하기 어려운 ‘징검다리’ 교황이 될 것으로 애초부터 점쳐지기도 했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 <한겨레> 자료사진

고인은 퇴임 후 모국인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로마 바티칸시국 내 한 수도원에 머물며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하며 지냈다. 퇴임 이후 비교적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베네딕토 16세는 빈자들을 위해 교회가 발벗고 나섰던 남미의 해방신학을 강하게 거부하며 탄압했으나, 그에 이어 남미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함으로써 두 교황은 극적인 대비를 보였다. 고인은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는 학자 스타일이자 보수적인 신앙 교리를 고수해 독일 병정 같은 인상이었으나, 2019년 개봉한 영화 <두 교황>이 그가 프란치스코 후임 교황과 다르면서도 차이를 인정하는 교황으로서 대중적인 이미지를 순화하는 구실을 해주기도 했다.

전·현직 교황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두 손을 맞잡았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3년 12월  23일 바티칸 안에 있는 교회의 어머니 수도원을 방문해 베네딕토 16세와 인사를 나누고 함께 기도를 드렸다. 수도원을 떠날 무렵 프란치스코 교황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자 베네딕토 16세는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기도할 것”이라고 답했다. 바티칸/로이터 뉴스1

베네딕토 16세는 재임 기간이던 2006년 2월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2006년 11월에는 평화로운 수단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를 촉구했고, 2007년 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 접견 후에는 친서를 통해 남북 이산가족 재결합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08년 경기 이천 화재 참사 때에는 가톨릭 수원교구장 앞으로 위로 전문을 전달하기도 했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이 31일(현지시간) 95세로 선종했다고 교황청이 발표했다. 교황청 대변인은 \"명예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오전 9시 34분에 바티칸에서 돌아가셨다고 슬픔 속에 알린다\"고 밝혔다. 사진은 지난 2007년 2월 15일 노무현 대통령이 바티칸 교황청을 방문,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선물한 고려청자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베네딕토 16세는 실력파 신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교황청의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가톨릭 보수 교리의 수호자가 되었다. 따라서 그가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있었던 24년 동안 그의 이름인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종교재판관과 동일시된 인상을 풍겼다. 그는 현대 사회의 무신론,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적 경향, 교황 무오류성에 대한 의혹을 잠재우고, 남미의 해방신학 열풍을 꺾기 위해 선봉에서 싸워 전차 추기경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런 그의 투쟁은 보수파의 지지를 받았으나, 다른 편에서는 가톨릭 2000년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이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아조르나멘토’(개혁·쇄신·현대화)를 정면으로 거슬렀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바티칸을 찾은 순례객들을 맞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63)와 바오로 6세(재위 1963~78)가 단행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사명을 ‘전도’에서 ‘인간의 존엄성 증진과 인류 공동선 실현’으로 변화시켰고, 가톨릭 신자만으로 국한했던 ‘하느님의 백성’을 인류 전체로 확대하고, 라틴어만 사용해 신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던 미사 용어를 각 나라 언어로 사용하게 하고, 미사 때 사제들이 제단을 향해 서있어 신자들은 뒷모습밖에 볼 수 없던 것을 신자 쪽으로 돌아서도록 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불러왔다.

일제강점기 친일 종교였던 데 이어 독재시대에 순응적인 자세를 보여온 한국 가톨릭이 1970년대 초부터 세상에 눈을 돌려 고통받는 민중 편에 서며 민주화와 인권 수호 선봉에 서게 된 계기가 된 것도 이 공의회였다. 그러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신앙교리성 수장에 임명된 뒤 신학의 균형 유지를 위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과로 탄생한 국제신학위원회가 ‘어용’으로 전락하면서, 보수적인 원리주의적 교리만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그는 ‘신의 충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런 보수 회귀는 중앙집권과 교황권 강화로 이어졌다. 각 나라에 권한과 책임을 이양하고 협의체(시노드)를 통해 민주적 운영 방식을 이미 채택한 정교회나 성공회처럼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지역적 특성에 맞는 사목을 지향했으나 반대로 갔다.

그는 21세기 가장 존경받는 가톨릭 신학자 중 한명으로 손꼽혔던 한스 큉이 교황 무오류성 교의를 정면으로 비판하자, 그의 수업 및 저서 출판을 금지했고, 여성 사제 서품 문제 논의도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는 교황 취임 이후 이슬람 전문가인 종교간대화평의회 의장 마이클 피츠제럴드 대주교를 이집트 대사로 좌천시키고, 이슬람 국가인 터키(현 튀르키예)의 유럽연합(EU)의 가입을 “문화적·지리적으로 이질적”이라며 반대했다. 또 고국인 독일을 방문해서는 인용문을 언급하며 “이슬람 선지자 무하마드가 가져온 것은 칼을 앞세워 믿음을 전파하는 식으로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것들뿐”이라고 말해 무슬림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이어 브라질을 방문해서는 “가톨릭 교회는 중남미 원주민들에게 자신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당시 인디언 부족들이 기독교를 조용히 갈망했기 때문에 유럽 선교사들을 환영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2007년 3월엔 “가톨릭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발언해 개신교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고인에게 학자적인 면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인은 수준급 피아니스트여서 종종 모차르트와 바흐의 음악을 연주했으며, 다른 교황들이 포도주를 즐긴 데 비해 그는 독일 출신답게 맥주를 좋아했다. 개인적으로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상처를 치료하고 보살핀 애묘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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