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트바 에이스인 남친…“오빠 원래 이런일하는 사람 아니야”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2. 12. 31. 19:03
[씨네프레소-62] 영화 ‘비스티 보이즈’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2006년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박주영의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에는 남다른 직업관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대학을 졸업한 독서광인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수입은 책을 살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긴다. 안정적 직장을 갖겠다는 소망은 없다. “사실 나는 내가 하나도 한심하지 않다.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면서 자아실현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람들이 더 우스울 뿐이다. (…) 고정적인 직장을 갖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고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지 않고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책이 쓰일 무렵 젊은 작가를 중심으로 확산하던 직업관이 투영된 문장일 수 있다. 직업으로 자아실현을 한다는 믿음에 도전하는 주장으로, ‘나의 자아란 직업으로 실현될 수 있을 만큼 작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이러한 직업관은 건강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일정 부분 참고할 만하다. 선망하는 직업을 모두가 갖게 되는 사회는 없을 뿐만 아니라, 꿈에 그리던 직장에 가고서도 기대보다 별 볼 일 없는 직무에 실망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계를 위해서 ‘아무 일’이나 해도 괜찮을까. 오늘 리뷰할 윤종빈 감독의 ‘비스티 보이즈’(2008)는 잠시 돈벌이를 위해 밤거리 일을 선택한 남자를 비추는 작품이다. 점점 무너지는 그의 모습을 통해 직업과 자아상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 집만 안 망했어도” 호스트는 자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야기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호스트바에서 일하게 된 승우(윤계상)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잘생기고 키가 큰 데다가 매너까지 좋은 그는 가게에서 ‘에이스’로 꼽힌다. 그러나 그에겐 호스트바에서 일하기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술 시중을 들게 된 자신의 처지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엔 호스트란 직업을 무시하는 시선이 많기에 일단 호스트로선 타인의 푸대접에 무뎌지는 편이 유리하지만, 그는 도무지 하대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느 날, 손님 입에서 나온 ‘빠돌이’(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라는 말에 분노해 그녀 머리채를 잡아 버린다.
지원(윤진서)과의 관계가 여기서 시작된다. ‘텐프로’ 종업원이라는 지원은 승우를 ‘빠돌이’라고 무시한 손님의 친구다. 그녀는 본인의 친구에게 “우리 가게에 손님이 와서 진상 부리면 좋냐”고 지적하고 방에서 끌고 나온다. 승우는 지원의 미모와 지적인 면모, 그리고 자신을 배려하는 태도에 호감을 갖게 된다. 승우는 “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다. (호스트바에선) 그냥 잠깐 일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등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둘 사이는 동거하는 관계로 급진전된다. 여자친구를 유흥업소에서 빼내기 위해 마이킹(선급금을 이르는 은어) 3000만원을 갚아준다고 할 정도로 승우는 지원에게 푹 빠져버린다.
그러나 둘 사이는 자주 삐걱댄다. 승우의 ‘인지 부조화’가 주요 원인이다. 사업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하는 일이라고 자위했지만 여자친구와 자신의 지출을 감당하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고, ‘잠시’라고 생각했던 기간은 예상보다 길어진다. 승우는 자신의 친구가 어느 날 “웬만하면 하는 일 빨리 정리하라”며 던진 조언에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폭음한다. 친구에게 무시당했다고 느낀 것이다.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 “우리 집만 안 망했어도”라 말하며 괴로워하는 승우에게 지원은 약간 질려버린 듯하다.
승우가 호스트바 손님 전화를 지원 근처에서 받는다든지, 지원에게 용돈을 찔끔찔끔 준다든지 하는 문제가 더해지며 둘의 갈등은 점점 고조된다. 여기서 지원은 남자친구를 자극하는 일을 벌이는데, 앞서 승우를 ‘빠돌이’라고 모욕했던 자신의 친구를 그가 일하는 가게로 데려가면서다. 자신의 친구에게 “댁한테 술 팔 생각 없다” “다시는 지원이 만나지 말라”는 말을 쏟아내는 승우에게 지원은 더욱 정이 떨어져 간다. 이후 다른 남자와 ‘사업차’ 연락하던 지원은 그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승우의 말에 “그 사람은 우리랑 달라. 그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한테 사기를 치냐”고 응수하며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히고, 둘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승우(윤계상)는 못 견뎠는데, 재현(하정우)은 어떻게 버텼을까
승우가 이 직업을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재현(하정우)과의 대비를 통해 더 분명히 드러난다. 승우 누나의 남자친구인 재현은 승우를 이 세계로 인도한 인물이자 스스로도 호스트바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그는 승우와 달리 세상에 호스트를 괄시하는 사람이 존재한단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두 사람이 여성들로부터 초대 받아 호텔에 방문하는 에피소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승우와 재현은 그 방에 들어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게 되는데, 다른 남성들이 두 여성에게 놀러오겠다고 연락했기 때문이다.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두 남자가 일반 세계의 남성들에게 밀린 것이다. 그래도 여성들이 선물해준 스웨터를 건진 것에 만족하며 호텔에서 나오는 재현에게 승우는 “신났네, 신났어”라고 비아냥댄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오라 가라 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불쾌할 만한 상황인 데다가, 남의 시선에 민감한 승우로선 ‘혹시 내가 호스트라서 무시한 건가’라는 자괴감을 느꼈을 수 있다.
자아상이 자주 흔들릴 만한 환경은 피하는 게 좋다
호스트바 종사가 윤리적으로 옳은지에 대한 질문을 일단 차치해두고, 직업 선택에 있어서 성격의 중요성이라는 관점으로 이 영화를 읽어보자. 인생에서 잠깐 지나가는 일로 호스트바를 선택한 건 승우나 재현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직업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감수성이다. 인생의 모든 일에 진지하지 않은 재현에겐 호스트바 매니저는 그냥 돈벌이일 뿐이다. 직업으로 인해 자신이 더 못한 사람이 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물론 그 둔감함 때문에 주변에 민폐를 끼치긴 하지만, 적어도 재현은 그 일을 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자아상의 급격한 변화 같은 건 겪지 않는다.
반면, 승우는 예민한 인물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범한 갈등을 겪고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즉각 ‘혹시 내가 호스트라서 무시하나’라는 물음이 지나간다. 자아상이 불안정해지니 주변 사람에게 포악해지고, 이로 인해 불화가 생길 때마다 상대방의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매너 좋은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그는 길거리에서 여자친구를 폭행하기에 이른다. 분노를 못 이긴 우발적 행동이었겠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바닥에 있는 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약자를 힘으로 짓누른 것일 수도 있다.
호스트바라는 특수한 세계를 다룬 영화지만 보다 넓은 직업군에도 적용할 수 있을 메시지가 있다. 직업을 고를 때는 급여나 복지 등 그 직장의 특성 외에도 성격, 자아상, 지구력 등 구직자 자신의 특징을 꼼꼼히 살펴야 함을 보여준다.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희미해진 현대에는 다음의 이직·전직을 기대하며 일단 되는 대로 취직할 때도 많은데, 그때 역시 자신이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성격적 요건을 갖췄는지는 신중히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 내외부에서 활발한 교류가 필수적이고, 자신의 성과가 타인의 선택에 의해 갈리는 경우가 빈번한 직업은 자존심이 세고 예민한 사람에겐 배로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에도 영향 받지 않는 건강한 자아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겠지만, 자아상이 자주 흔들릴 만한 환경은 가급적 피하는 편이 합리적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원과의 교제를 고민하는 승우를 만류하며 재현이 툭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너 걔 일 나가서 다른 놈들하고 술 마시고, 밖에서 만나고 그러는 거 견딜 수 있을 거 같아? 견딜 수 있는 놈들은 따로 있는 거야.” 호스티스와의 교제는 웬만한 사람이 감당할 일이 아니란 뜻이지만, 호스트바에 발 들인 승우의 선택에 대한 평가로 봐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직업이란 한 사람의 자아를 다 담아낼 수 있을 만큼 큰 그릇은 아닐지라도, 자아를 망가뜨릴 수 있을 만한 위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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