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스탠퍼드 안 부러워”...서울대 다녀야 들을 수 있는 이 수업 [더테크웨이브]

황순민 기자(smhwang@mk.co.kr) 2022. 12. 3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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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 맞은 서울대 ‘창의공학설계’
“이제 한국도 주입식 교육 벗어나자”
故주종남 교수가 처음 기획해 진행
약 4500명 교육 ‘이공계 인재’ 산실

서울대 공대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스탠퍼드 등 세계 초일류 대학들이 자랑하는 대표 수업에 견줄만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강의가 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창의공학설계’ 일명 ‘창공’ 수업이 바로 그것.

창공은 1학년 학생들이 제한된 공학지식과 재료를 활용해 자신만의 로봇을 만들고 ‘로보콘’이라는 대회를 열어 겨루는 서울대 공대의 ‘킬러 콘텐츠’다. 이론을 실제로 활용해 만드는 경험, 친구들과 협업하고 경쟁하는 경험을 통해 진정한 공학자를 길러낸다는 목표로 고(故) 주종남 교수가 처음 도입했다. 주 교수는 “한국의 고질적인 주입식 교육을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갖고 이 수업을 기획했다고 한다. 창공은 지난 30년간 약 4500명의 서울대 공대생을 교육하며 대한민국 이공계 인재 ‘화수분’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수업의 상징과도 같은 ‘로보콘’은 서울대 공대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학부생 수업이 로봇 연구자·기업인 산실로
지난 2001년 KBS는 서울대학교 1학년 학생들의 로봇경진대회를 전국에 생중계했다. ‘창의공학설계’(창공) 수업을 수강한 200여명의 1학년 학생들이 ‘에너지 전쟁에서 지구를 구하라’는 가상의 미션을 수행할 로봇을 제각각 만들어 와서 전국의 시청자들 앞에서 경쟁한 것이다. 이 대회에서 수상한 학생들은 지도교수였던 고 (故) 주종남 교수와 함께 미국 MIT에서 열린 국제 로보콘에 참석해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국제로보콘에 참가한 학생 김아영 씨는 훗날 로봇공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년 전 서울대 기계공학부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용되어 모교로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창공 수업이 계기가 되어 로봇공학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밤을 새며 힘들게 로봇을 만들었는데 그걸 마치고 나니 진짜 엔지니어가 된 것 같았거든요.” 김아영 교수가 20년 만에 전하는 ‘창공’ 수강 후기다. 현재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조규진 서울대 교수는 “30년 전 첫 번째 창공(‘창의공학설계’) 수강생이었는데 이제 담당교수가 되었다”면서 “ 저도 창공을 통해 처음 로봇을 만들었고, 그 힘든 과정을 통해 비로소 공대생이 되고,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올해 연말을 앞둔 11월 25일 서울대학교 해동아이디어팩토리에서는 기계공학부 신입생들의 로봇 만들기 프로젝트 수업인 ‘창의공학설계’ 3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축사를 맡은 홍유석 서울공대 학장은 “30년 전에는 서울공대에서도 책을 보고 문제를 푸는 수업이 거의 전부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주종남 교수님이 창공이라는 수업으로 우리나라 공학 교육에 큰 파장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수업의 의미를 되짚었다.

2년 만에 다시 현장에서 열린 30주년 기념 로보콘에서는 기계공학부 22학번 학생 135명이 다양한 로봇을 만들어 ‘물난리가 난 캠퍼스에서 교수님을 구하라’는 미션을 수행하며 열띤 경쟁을 펼쳤다. 제로팀과 긴급구조팀의 결승전. <사진제공=서울대>
30년 전 학생이나 조교로서 학기말 로보콘(로봇경진대회)을 치렀던 중견 엔지니어들은 이날 모교를 찾아 “공부만 잘하던 고등학생을 진짜 공학도로 만들어 주었던 수업”이라며 스승인 고 주종남 교수를 추억했다.

안성훈 서울대 기계공학부 학부장은 “4차 산업 시대가 되면서 ‘프로젝트 수업’이 확대되고 있는데, 그런 말이 유행하기도 전부터 4차 산업 시대에 맞는 수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며 “우리나라 공학계를 이끄는 인재 중에 창공 출신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수업이 배출한 공학인들의 면면을 보면 안성훈 교수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창공 수업을 거쳐 기업 현장과 학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리더들은 “학부 시절에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수업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수업” (허일규 SK 수펙스협의회 부사장), “내가 수업하는 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수업” (김성한 세종대 교수), “로봇 공학자의 길에 들어서게 한 수업” (서울대 김아영 교수) 등이 소감을 전했다. 30년 전 창공의 탄생을 함께 한 해리 웨스트 콜럼비아 대학 교수(당시 MIT 기계공학부 교수)와 현재 MIT에서 ‘설계와 제조’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김상배 교수도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서울대가 벤치마킹한 MIT 2.007 수업을 30년 전 진행했던 해리 웨스트 교수(왼쪽)과 현재 담당하고 있는 김상배 교수가 “대단한 수업을 30년간 해 온 것을 축하한다”며 서울대에 감사 메시지를 전한 모습. <사진제공=서울대>
30년 장수 수업의 교훈, 대학 수업도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 수업이 30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똑같은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운영진들은 설명한다. 주종남 교수는 생전 인터뷰에서 “매 학기 수업이 끝나고 나면, ‘이렇게 하면 더 잘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 다음 수업에서 바꿔보게 된다”고 설명했다. 기술이 변하고 세대가 변하는 동안 수업 방식 역시 끊임없이 변화했기 때문에 하나의 수업을 넘어 전통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수업은 2년간의 팬데믹을 거치면서 한 단계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학생들이 모일 수도 없고 실습실도 닫아 버린 상황에서 혼자서 만드는 로봇 키트를 나누어 주고 첨단 기기 없이 물리학 원리만으로 로봇을 만드는 수업으로 과감히 전환한 것이다. 수업을 담당한 조규진 교수는 “도구를 제한하니 학생들은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보였다”며 코로나를 통해 창공은 더 본질에 가깝게 진화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올해 창공 수업에서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술과 자재로 만들어진 로봇들이 나왔다. 2년 만에 다시 현장에서 열린 30주년 기념 로보콘에서는 기계공학부 22학번 학생 135명이 다양한 로봇을 만들어 ‘물난리가 난 캠퍼스에서 교수님을 구하라’는 미션을 수행하며 열띤 경쟁을 펼쳤다. 이날 로봇 설계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제로팀(‘제대로 만든 로봇’)이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팀 멤버인 이수빈 학생은 “대회를 위해 밤도 많이 새고 힘들었지만 이제 진짜 공학인이 됐다는 생각이 든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난 11월 서울대학교 해동아이디어팩토리에서 열린 창의공학설계 30주년 기념식. 우승팀이 담당교수 및 특별심사위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제공=서울대>
서울대 기계공학부 학부장이 창공 수업을 만든 고 주종남 교수 유족 대표에게 전달한 감사장 모습. <사진제공=서울대>
‘인생을 바꾼 수업’ 기부 선순환 모델로 정착
30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세대의 선순환이 이루어진 창공은 대학가 기부의 선순환 모델을 만들고 있다는 평가다. 담당 교수, 선배들의 릴레이 기부가 수년째 이어진 덕분이다.

올해는 수업을 담당하는 조규진 교수가 서울대 학술연구상 상금으로 받은 1000만원을 수업에 기부했다. 창공 첫 수업의 조교를 맡았던 허일규 졸업생은 후배들에게 태블릿 컴퓨터를 기부했다. 석상옥 네이버랩스 대표는 “1994년 당시 창공이 너무 인기가 많아 추첨에 붙어야 수강할 수 있었는데 그 추첨에 떨어진 것이 평생의 한 이었다”고 회상하며 기부에 동참했다. 현대자동차 로보틱스랩을 이끌고 있는 현동진 랩장은 “당시 로보콘에서 안타깝게 4등을 했었다”고 추억하며 기부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밖에도 이름을 알리길 원치 않는 익명의 동문들이 다수 기부에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2년째 창공을 담당하고 있는 이호원 교수는 “오늘 경기한 학생들 중에도 창공을 가르치는 학생, 창공을 지원해 주는 학생들이 꼭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는 2023년부터 창공 수업을 대대적으로 개편해 로봇공학을 위한 소프트웨어 교육과정을 추가하는 등 과목을 확대할 계획이다.

<황순민 기자의 ‘더테크웨이브’>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술(Tech)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리라 믿습니다. 혁신적인 서비스로 인류를 진보시키는 최신 기술 동향과 기업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네이버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다음 기사를 쉽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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