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주머니에 손 넣고 꼬집어라"…병역비리 어떻게 가능했나

박원경 기자 2022. 12. 3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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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건사고 소식 중 하나로 묻힐 수 있었던 병역비리 사건이 SBS 보도 이후 집중 관심을 받고 있다. 구속 기소된 병역 브로커 구 모 씨의 수법과 자진 신고한 배구선수 조재성 선수 외에 프로축구 등 다른 프로스포츠 선수 다수와 의사·변호사 등 유력층 자제들도 수사 선상에 올랐다는 보도 이후 사회적 파장이 커지고 있다.

사회적 관심이 증대되면서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는 길을 잃기 쉬운 법. 취재를 통해 확인된 내용 등을 근거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무엇인지,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번 수사가 단지 수사로만 끝나지 않고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좀 더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중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바지 주머니에 손 넣고 허벅지 꼬집어라"…갖가지 수법


현재 검찰이 수사 중인 병역 브로커는 2명이다. 한 명은 구속 기소된 구 모 씨, 또 다른 한 명은 불구속 수사 중인 김 모 씨로 두 사람 모두 전직 군 관계자들이다. 구 씨는 대표, 김 모 씨는 부대표라는 직함을 쓰며 때론 같이 일하기도 했지만, 검찰은 별도의 브로커로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병역 면제나 등급 감경을 위해 소위 '컨설팅'을 한 병명은 간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뇌전증'이다. 관련 내용은 뒤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고, 우선 뇌전증은 뇌파 검사와 평소 증상 유무가 진단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 씨 등 브로커들은 의뢰인들에게 '실제 먹지는 않더라도 뇌전증 치료약 혹은 예방약을 처방받아서 기록에 남겨라'거나 '발작 증세를 허위로 보인 뒤 119 구급차를 불러서, 119가 본인의 발작 때문에 출동했다는 기록을 확보하라'는 등의 조언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전통적인 수법' 외에 깨알 같은 조언도 있었다. MRI나 뇌파 영상을 찍을 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허벅지를 꼬집어라"라는 식의 '컨설팅'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식의 신체적 자극이 있으면 뇌파의 변화가 생기는 걸 노린 것이다. 때로는 보호자인양 병원에 함께 가서 이런 조언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중요한 건 4급이나 5급을 받아야겠다는 본인의 의지"


이런 황당한 조언이 실제로 이행됐을까, 그리고 이게 통했을까. 이 당연한 의문에 대한 답은 SBS가 보도한 브로커 구 씨의 상담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구 씨는 지난 5월, 한 병역 상담 통화에서 "중요한 건 본인이 4급(보충역), 5급(전시근로역)을 받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허위 뇌전증 진단을 위해서는 약 처방 기록과 증세의 반복적 발현 등 최소 6개월에서 2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니 자신들의 '컨설팅'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시키는 대로 하면 4급, 5급을 받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해서(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서) 4급, 5급 받고 싶지 않다고 하면 할 수 없다"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치기도 했다. "(5급이 안 되면) 전액 다 환불해 주겠다"는 양념도 덧붙였다.

현재 최소 70명 정도의 병역 면탈자가 검찰 수사 선상에 올랐다. 그만큼 구 씨 등의 브로커의 황당한 조언을 이행한 사람이 많고, 실제로 그런 조언이 통했다는 의미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허벅지를 꼬집어라" 이 황당한 조언을 받은 사람 중에 실제 뇌전증 진단을 받아 병역을 면탈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SBS 취재로 확인되기도 한다.
 

프로스포츠 선수, 대형 로펌 변호사 자제 등 수사 선상에


병역 비리 사건이 터지면 관심은 브로커보다는 면탈(의뢰)자에게 쏠린다. '병역은 신성한 의무'라고 오랫동안 들어왔지만,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런 욕망을 마음속에만 담아 두고 국가의 부름에 순순히 응한다. 병역 비리 사건에서 브로커 보다 면탈(의뢰)자에게 시선이 쏠리는 건,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어두운 욕망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는 이유에서 일 테다.

현재 경매 호가 높이듯 수사 선상에 오른 사람이 50명, 70명, 100명이 넘는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검찰과 병무청 합동수사팀으로 제보가 이어지고 있고, 때로는 먼저 자수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현재' 기준 수사 대상자가 어느 규모인지는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다만, SBS 취재로는 '현재' 최소 70명 정도가 수사 선상에 오른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검찰은 브로커 구 씨가 병역 면탈 등에 성공했다고 밝힌 수 백 여 건 모두 확인은 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수사 대상은 대폭 늘어날 수 있다.

현재 수사 선상에 오른 사람 중에는 조재성 선수와 같은 프로스포츠 선수도 10명 안팎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대형 로펌 변호사 제자 등 소위 전문직 종사자의 자제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영화배우 등 연예계 종사자도 수사 대상에 포함됐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다.

프로축구 1부 리그의 주전급 공격수인 A 씨도 수사 대상 중 한 명이다. A 씨는 지난주 변호사와 함께 검찰 조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는데, 조재성 선수의 경우와 자신은 다르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브로커의 도움이 받은 건 맞지만, 실제 본인은 병이 있고 다만 업무 처리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을 뿐이라는 취지로 이해된다.

수사를 받고 있는 브로커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모두가 허위로 병을 꾸며 불법을 저질렀다고 볼 수는 물론 없다. 검찰 관계자는 "편견을 갖지 않고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중요한 건 불법이 통했던 시스템의 개선


'뇌전증'은 뇌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켜 과도한 흥분 상태를 유발해 의식을 잃게 하거나 발작 등의 증세를 일으키는 뇌 질환을 의미한다. 유병률은 인구 1천 명 당 약 3.88명. 군 입대 대상인 20대 남성 인구가 대략 350만 명쯤으로 보면, 군 복무와 관련이 있는 사람은 대략 1만 3,5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대한뇌전증학회, 2021년 6월 「뇌전증과 사회」)

흔치 않은 질병이다. 흔치 않다는 건 치료가 어렵다거나 증상이 심각하다는 말의 유의어다. 이번 사건이 보도된 이후 실제 뇌전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댓글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뇌전증이라는 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 것인지를 알리는 글이다. 그중에는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서 병역의 의무를 마쳤다는 글도 있다.

런데 흔치 않은 질병이라는 건,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규정이 허술하다는 말의 유의어가 되기도 한다. 건강 보험이 흔한 질병에 대해서는 보장 범위 등을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있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한 희귀성 질환은 보장 범위 밖에 있고 규정이라는 것이 사실상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위 표는 뇌전증 등 경련성 질환에 대한 평가 기준표이다. 뇌전증은 MRI 등 영상 판독을 통해 진단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평소 병력 등이 진단에 중요한 요소인 것을 알 수 있다. 평소 병력이 있으면 대부분이 4, 5, 6급인 현역 면제 판정 대상이 된다.

규정이 꼼꼼하지 않다는 건 재량의 여지가 크다는 의미다. 뇌전증으로 인한 병역 면제는 의료인의 진단서가 기본이다. 때문에 이번 사건에서 재량의 과도하게 또는 불법적으로 발휘한 의료인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게 당연한 의문이다.

이번 검찰 수사에서 이번 사건에 연루된 의료인은 아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SBS가 보도한 녹취록에서 브로커 구 씨는 의료계 종사자, 나아가 병무청 관계자들과의 친분을 과시한다. 자신을 포장하려는 구 씨의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내용은 꽤나 구체적이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의료인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이유다.

이번 검찰 수사가 의료인 관여 여부를 포함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즉 병역 검사 시스템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등을 확인해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결과를 도출하기를 기대한다. 단지, 면탈자가 누군지, 브로커 누구인지 등에 대한 조명에 그친다면 실제 뇌전증을 앓고 있지만 이번 사건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사람들, 정상적인 행정사 업무를 하고 있지만 브로커로 의심받게 된 사람들의 고충을 해소할 수 없다. 그리고 변화가 없는 시스템 속에서 우리 사회는 병역 비리를 또 마주하게 될 것이다. 병역 자원이 줄어 모병제가 다시 화두가 된 2022년에 지금과 같은 병역 비리가 발생할 것이라는 걸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박원경 기자seagu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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