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언제까지 질 거야? ‘불머슴’ 12살 아이가 말했다
이기는 데 열광하는 이들이 모인
콜로세움 같은 주짓수 도장에서
절망 이겨내는 방법은 ‘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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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과 배트맨은 영화 한 편을 할애해가며 싸웠다. 토르는 헐크와 맹렬하게 싸웠고 에일리언과 프레데터도 싸웠다. ‘전투력이 비슷한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하는 문제는 인류의 오래된, 그리고 영원한 관심사다.
그러나 아무리 인생을 돌아봐도 나는 누군가를 속 시원히 이겨본 기억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속한 학급은 모의고사 점수나 체육대회 성적 따위의 경쟁에서 번번이 맥을 추지 못했다. 대학 때는 문학도들, 그러니까 인생에서 일찌감치 패하기로 작정한 것 같은 사람들과 함께했다. 게다가 21세기에도 여성은, 이기는 걸 너무 좋아하면 곤란한 존재로 인식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승자의 기쁨과 영광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급기야 이기는 게 왜 좋은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백만장자의 삶을 막연하게 상상하듯 먼발치에서 승자의 대관식을 바라보기만 했다. 승자의 옆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주저앉아 우는 패자가 있다면 그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함께 울었다.
“지지 않으면 이길 것이다”
이처럼 패자를 자처하던 내가 격투기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건 나조차도 놀랄 일이었다(아마도 주짓수가 아니었다면 격투기는 영원히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많은 격투기 종목 가운데 주짓수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우선 훈련 과정에서 타격을 배제하므로 얻어맞는다는 두려움이 덜했다. 또 다른 종목들과 비교하면 상대를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보였다.
이 믿음은 순전히 브라질 주짓수의 창시자 엘리우 그레이시가 남긴 영업 멘트에서 비롯됐다. “지지 않으면 이길 것이다.” 이 강렬한 한마디가 나약한 겁쟁이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아무리 지기를 밥 먹듯 하는 패자라도 지지 않는 것을 시도쯤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머지않아서 깨달았다. 철석같이 믿었던 잠언이 나 같은 순진한 초보를 유인하는, 이른바 낚시성 멘트라는 걸. 물론 엘리우 그레이시의 말을 거짓이라고 매도할 의도는 전혀 없다. 엘리우 그레이시야말로 주짓수에 입문하기도 전에 ‘너무 작고 약해서 주짓수를 수련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도장에서 쫓겨났다. 훗날 그는 오직 기술로써 신체적인 열세를 극복해낸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또 엘리우 그레이시의 철학처럼 주짓수의 본령이 방어인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주짓수계를 이끄는 경향은 전설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주짓수 도장은 이기는 데 열광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미니 콜로세움이다. 그들은 주짓수의 본령이 방어라는 말이 무색하게 ‘어떻게 하면 항복을 의미하는 탭(Tap)을 빠르게, 많이 받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 즉 이기는 데 집착한다. 또 에스엔에스(SNS)에서 묘기에 가까운 기술을 과시하고 유래도 알 수 없는 새로운 기술을 계속 만드는 게 주짓수를 쿨하고 재미있어 보이게 하는 마케팅의 전략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서브미션(Submission)이 있다. 서브미션이란 그래플링(Grappling, ‘얽혀서 싸운다’는 뜻으로 주짓수·레슬링·유도·이종격투기를 포함한다) 경기에서 관절을 꺾거나, 경동맥을 조르거나, 위에서 누르는 기술을 뜻한다. 상대에게 탭을 받을 수 있게끔 유도하는 공격 기술이며 액션 영화에서 보던 암바나 초크 등이 모두 서브미션에 속한다.
그러면 서브미션을 하나씩 익히면 될 일 아니냐고? 그러기에 서브미션의 종류가 너무 많고 기술도 난해하다. 특히 서브미션의 한 갈래인 모든 포지션에서 발목이나 무릎 관절을 자유자재로 꺾는 하체관절기에 이르면 슬며시 수련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이 방대한 서브미션에 방어법까지 세트로 따라붙으면 익혀야 할 기술의 가짓수가 두세 배로 급격하게 불어난다. 이게 주짓수 기술의 완성 단계인 블랙 벨트를 받으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년이 걸리는 이유이고 또 수련생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아무리 취미도 생업처럼 경쟁하는 한국인이라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은 막막함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지지 않으면 이길 것’이라는 잠언에 감화돼서 주짓수를 시작했던 나는 ‘주짓수의 꽃은 서브미션’이라는 장벽에 부딪혔다. 방어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서브미션부터 휘어잡아야 하지만 내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서, 자연히 내가 가고 싶은 목적지인 방어의 세계에 입장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절망만 하자니 그동안 쥐어짠 용기가 아까웠다(패배 의식에 찌든 겁쟁이가 여기까지 오는 건 절대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나는 플로우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기를 택했다.
플로우는 스파링 중에 아주 드물게 가끔 찾아오는 몰입의 순간이다. 다른 모든 일에 관심이 없어지면서 자아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몰두하는 순간. 어렵고 복잡한 기술을 몰라도, 제아무리 실력이 형편없는 초보라도 플로우에는 누구나 진입할 수 있다.
잃어버린 승자의 감각 찾아서
플로우에서 나는 까마득한 그 옛날의 여자아이와 만난다. 그 애는 열두 살에 키가 165㎝에 육박했고 여자아이를 괴롭힌 남자아이들을 힘이 약한 친구들을 대신해서 응징했던 여자아이들의 수호신이었다. 두 살 터울의 오빠까지 주먹과 발차기로 제압하고,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이름 대신 ‘불머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 애.
아직 세상이 그 애를 본격적으로 억압하기 전까지 그 애는 기세등등한 말괄량이였다. 그 애에게 남자는 두려움의 대상은커녕 경쟁 상대도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월등했으니까. 기억을 잃었던 슈퍼 히어로 캡틴 마블처럼 플로우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잃어버렸던 승자의 감각을 조금씩 되찾는다.
영화 <캡틴 마블>에서 캡틴 마블이 기억을 찾으러 웬디 박사가 기다리는 기록실에 갔을 때 너바나(Nirvana)의 ‘컴 애즈 유 아(Come as you are)’가 엘피 레코드로 재생되던 건 우연이 아니다. ‘다가와, 너의 모습 그대로, 너였던 모습 그대로.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가와. 친구로, 친구로, 오랜 적으로….’ 캡틴 마블은 누구와 싸워 이김으로써 영웅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잊었던 본래의 자신을 되찾고 진정으로 강한 영웅이 되었다.
글·사진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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