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나 잡으러 와” 해질녘 찾아오는 횡설수설 병
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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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씨는 80살 남성으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평소 건강한 편으로 매일 자신의 공장으로 출퇴근을 합니다. 술을 좋아해서 식사 때는 어김없이 반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영석씨 집 거실 전등이 깜빡거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영석씨는 천장에 있는 전구를 갈아 끼우려고 의자에 올라가서 작업을 하다가 그만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닥에 넘어진 채로 잠깐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니 골반 쪽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119 구급차로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응급실에서 검사 결과 골반과 다리를 연결하는 관절인 고관절이 골절됐다고 진단받게 되었습니다.
영석씨는 정형외과 병실에 응급 입원해서 다음날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뒤 병실에서 영석씨의 아내가 영석씨를 간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영석씨에게 이상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경찰들이 나를 잡으러 문밖에 와 있어”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환자들을 가리키며 “여기가 우리 집인데 이상한 사람들이 침입해 있다”는 등 횡설수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간병하는 아내를 보고는 “선생님 저 좀 고쳐주세요”라며 엉뚱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팔에 있는 수액 줄을 제거하고 침대 밖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아내와 간호사가 이를 제지하자 영석씨는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라며 싹싹 빌기까지 했습니다.
수술 이후 횡설수설하고 환시·환각
다음날 아침이 되어 일어나자 영석씨는 멀쩡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어제 잠은 잘 잤어요? 나 간병해주느라 당신이 고생이 많네요”라고 했습니다. “어제 일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아내는 전날 저녁 영석씨가 난리를 쳤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자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일? 어제 내가 뭔 일이 있었나?” 자녀들이 연락을 받고 병원에 왔지만 자녀들 앞에서 영석씨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묻는 이야기에도 멀쩡하게 대답을 잘해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안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이 되자 어젯밤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석씨는 “경찰들이 나를 잡으러 온다”고 소리를 지르고 다시 침대를 나가려고 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도 도저히 저 환자 때문에 무서워서 이곳에 못 있겠다고 화를 내게 되었습니다.
담당 정형외과 주치의에 의해 정신건강의학과로 협진 의뢰가 되었습니다. 협진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직접 병실로 와서 영석씨의 상태를 보고 ‘섬망’으로 진단하였습니다. 섬망은 수술을 받았거나 신체 질환, 약물, 술 등으로 인해 뇌의 전반적인 기능이 떨어지고 의식의 혼란이 오면서 횡설수설하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환시, 환각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석씨는 고관절 골절 뒤에 섬망이 생겼는데, 노인에게서 일반 수술 뒤에는 15~25% 정도, 고관절이나 심장 수술 뒤에는 절반의 환자에게서 발생할 정도로 흔합니다. 해 질 무렵에 흔히 나타나서 일몰 증후군이라고도 하는데 빛에 의한 시각적 자극이 떨어지면서 사물 분간의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석씨가 섬망이 생긴 주된 원인은 고관절 골절이었지만 섬망을 유발하는 다른 원인은 매일같이 마시는 술에 있습니다. 애주가가 입원으로 인해서 술을 중단하면 약 3일 뒤부터 불안, 초조, 불면, 손 떨림 등의 ‘알코올 금단 증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알코올 금단이 발생하면 섬망이 동반되는 경우가 더 흔합니다. 영석씨는 입원 전날까지도 반주를 했고 입원 3일 뒤에 급성 섬망 증상이 발생했습니다. 영석씨와 같이 응급 수술인 경우에는 어렵겠지만 수술을 받아야 할 계획이 있다면 한달 정도는 금주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급성 알코올 금단 증상을 나타나지 않게 해서 섬망의 발생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섬망과 알코올 금단 증상을 도와줄 수 있는 치료를 진행했습니다. 치료 뒤에 섬망은 호전되었고 병실에도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놀랐던 가족들도 안심하게 되었지만 혹시 치매로 진행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섬망은 치매와는 다릅니다. 섬망은 갑자기 발생하고 일중 변동이 있어 저녁부터 밤까지 심해지는 경과를 보이며 수술 뒤에 잘 생긴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섬망 환자한테 뇌 자기공명영상(MRI)에서 문제가 없는 경우가 더 흔합니다. 섬망이 생겼다고 모두 치매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치매 환자에게 섬망이 더 잘 생깁니다. 앞으로 외래에서 치매가 발생하지 않는지 주기적인 평가를 하기로 했습니다.
영석씨는 퇴원 뒤 집에서 지내면서 약해진 다리 근력을 강화하는 물리치료를 주기적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또 넘어져서 골절이 생기면 섬망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의자 위에 올라가는 것은 균형이 떨어진 노인들에게는 위험한 일입니다. 이외에도 계단을 내려가거나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도 넘어지기 쉽습니다.
유사현상 있는 어르신 꼭 검진해봐야
하지만 섬망이 왔다고 해서 하던 일을 모두 못하게 되거나 은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섬망의 원인을 알고 이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섬망은 뇌에 급성으로 전반적인 기능 저하가 발생한 상태입니다. 골절과 수술 이외에도 항콜린성 약물 복용, 전해질 불균형, 감염질환, 뇌손상 등으로도 섬망이 올 수 있습니다. 섬망을 줄이는 약물을 복용하면 뇌의 도파민을 차단시켜 급성 뇌 기능 이상의 호전에 도움이 됩니다.
주로 노인에게 오지만 젊은 사람들한테도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섬망이 와서 치료 뒤 집으로 복귀한 분들은 자기 전에 화장실을 꼭 미리 가는 것이 좋습니다. 밤에 화장실을 가다가 넘어지면 골절이 발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방에 미등을 켜 놓는 것도 빛 자극을 제공해서 섬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밤에 잘 때 환한 불을 켜 놓는 것은 수면을 방해해서 섬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식사를 잘 하고 영양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노인이 낮에는 괜찮다가 해 질 무렵에 정신이 흐려지거나 횡설수설하면 섬망이 아닌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진찰이 필요합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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