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여성부 폐지' 숨은 뜻은 "내게 책임 묻지 말라"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것과 나란히 붙인 이휘호 여사의 문패를 보면서 부부간의 평등을, 또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매일 다짐했다고 합니다. 달라진 사물이 우리의 인식을 바꿉니다. 여성가족부의 폐지가 아닌 존속을 말해야 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우리의 인식을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 신경아 한림대학교 사회학 교수
성평등 과제를 상기시키는 한국 사회의 '문패'. 여전히 남아있는 "여성가족부의 역사적 소명"을 두고 여성들이 이렇게 말했다. 지난 27일 서울 합정동 인근 카페에서 열린 '여성가족부 폐지에 반대하는 시민살롱'에서다.
892개 시민단체의 연대체인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와 성평등 정책 강화를 위한 범시민사회 전국행동'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관한 이날 행사엔 여가부 폐지에 반대하는 1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서로의 의견을 나눴다.
"정부는 왜 여가부를 폐지하려 하는가?"
지난 1월 7일, 당시 대선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를 대선공약으로 내놓았다. 해당 공약이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등의 발언을 거치며 지난 10월의 정부조직법 개편안으로까지 이어졌다.
여성계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강조한 바 있는 '안티 페미니즘' 전략을 윤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해왔다. 내홍 사태를 겪었던 대선 후보 시절부터 지난 9월의 '외교참사' 국면까지, 윤 대통령이 위기의 순간마다 여가부 폐지 공약을 지지율 반등 카드로 꺼내왔다는 것이다.
이날 강연에 나선 예술사회학자 이라영 작가는 정부가 여가부를 폐지하려는 이유에 대해 좀 더 깊은 관점을 제시했다. 현 정부의 여가부 폐지 방침은 결국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는"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 기조와 연결돼 있다는 말이다.
이 작가는 특히 "정치적 책임, 윤리적 책임을 외면하고 오로지 법적 책임만을 이야기하는" 윤 대통령의 "무책임의 언어"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강조했다. '구조적 차별은 없으니 여가부를 폐지하겠다'는 정부 측 논리는, 결국 사회의 차별이나 소수자성에 대해 사회구조의 책임자인 정부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부가 책임의 범주를 '법적 책임'만으로 한정하면 사회적인 고통은 인식되지 않는다. 이 작가는 최근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을 그 예로 들었다.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책임이)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하는 것이라며 "막연하게 정부책임 묻지 말라"고 요구한 윤 대통령의 인식은 "(법적) 가해자와 피해자가 선명하게 나뉘지 않는" 구조의 피해자들을 고통 속에 방치되게 만든다.
이 작가는 아이리스 메리언 영의 표현을 빌려 이를 "구조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회피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시민은 "정부에 정의를 요구할 책임이 있으며 부정의를 시정할 책임은 국가에 있"지만, 현 정부는 그 의무를 다 하지 않고 "(책임에 대한) 사회적 의식을 흐릿하게 만드는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게 이 작가의 지적이다.
여성·성평등 단어 지워지고 있는 현실, '연대'로 극복하자
"차별은 개인의 문제"라는 윤 대통령 개인의 인식은 실제 정책에 실시간으로 반영되고 있다.
지난 1일 여가부가 공개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에선 '여성폭력', '젠더폭력' '성별에 기반한 폭력' 등 그간 여가부가 사용해온 정책용어들이 모두 '폭력'이라는 단어로 대채됐다. 중앙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시도 흐름에 따라 각 지자체의 정책, 조례, 예산에서도 여성, 성평등 용어가 삭제되거나 성평등과는 관련 없는 용어들로 수정되고 있다.
김주희 덕성여자대학교 여성학 교수는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정부의) 기조가 각 정책 분야에서 '여성'이라는 단어를 지우는 방식으로 출발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며 이는 "기존의 가치중립적 시선으로는 관찰될 수 없는 여성폭력의 특수성"을 간과하는 방침이라 강조했다. 여성폭력을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해 온 불평등한 권력 관계의 표지'라고 규정한 유엔(UN)의 관점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정책에 대한 젠더관점의 반영이 중요하다"는 게 김 교수의 지적이다.
신경아 한림대학교 사회학 교수는 최근 정부가 교육과정 개정을 통해 "도덕 과목 내 '성평등'이라는 표현은 '성에 대한 편견'으로, '성평등의 의미'라는 표현은 '성차별의 윤리적 문제'로 대체하고 '섹슈얼리티' 용어를 삭제했다"라며 "이는 성차별을 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협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적 반동을 극복하기 위해, 시민살롱 참여자들은 "시민 사이의 연대"를 다짐했다.김 교수는 "여성운동은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폭력을 계속해서 청취하며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낸 과정이었다"라며 정부의 여가부 폐지 방침에 대항해 "현장의 여성주의가 만들어낸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해야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2024년 총선을 한 해 앞둔 2023년은 성평등, 사회연대, 공공성 측면에서 가치와 정책을 지켜내기 위해 잘 싸워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며 "'내 삶이 바로 정책'이라는 관점을 견지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통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강화해 갈 것"이라고 앞의로의 활동 방향을 밝혔다.
지난 11월 8일 발족한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와 성평등 정책 강화를 위한 범시민사회 전국행동'은 현재 전국 16개 시·도 지역에서 지역행동을 구성하고 여가부 폐지 저지를 위한 시민행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전국행동은 지난 12월 20일 기준 국회의원 의원실 90여곳에 면담을 신청하고 의견서를 전달했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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