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타자의 자존심 이정후,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까
국내 최고 타자였던 박병호·김현수의 실패 거울삼아야
(시사저널=김형준 SPOTV MLB 해설위원)
2022 시즌 KBO리그 MVP 이정후가 메이저리그에 도전한다. 이정후는 2023 시즌이 끝나면 7시즌을 채워 포스팅(비공개 입찰)이 가능해진다. 2024 시즌이 끝나면 이정후는 8시즌을 채우고 FA 자격을 얻게 된다. FA 진출은 이적료가 없고, 국내로 돌아올 때도 타 구단과 계약이 가능해 선수에게 훨씬 유리하다. 그럼에도 이정후가 포스팅 진출을 선언한 것은 오타니처럼 최대한 빨리 도전하기 위해서다.
때마침 호황이 시작된 메이저리그가 나이에 민감한 점, 그리고 히어로즈 구단에 대한 배려도 조기 진출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강정호(500만 달러), 박병호(1285만 달러), 김하성(552만 달러)을 통해 이미 재미를 톡톡히 본 히어로즈는 이번에도 상당한 이적료 수입이 예상된다.
이정후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2013년 류현진에 이어 가장 주목받는 도전이다. 류현진이 KBO리그 최고의 투수였던 것처럼 이정후도 타자로서 KBO리그를 대표한다. 최고의 인기 선수라는 점도 같다. 이정후의 진출이 더 중요한 이유는 투수와 달리 타자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어서다. 부산고 졸업 후 시애틀에 입단한 추신수는 미국 시스템에서 성장한 선수다. 첫 번째 성공작이 될 수 있었던 강정호는 경기장 밖의 불미스러운 일로 기회를 잃었고, 김하성은 수비에서 쾌거를 이뤄냈지만 한국에서처럼 뛰어난 타격은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정후마저 실패하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는 타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미국 투수들은 죄다 구속 150km…강속구 적응력이 관건
메이저리그에서 고전했던 박병호와 김현수가 국내에 돌아와서는 대활약을 하고 있는 것처럼, 타자는 KBO리그와 메이저리그의 기량 차이가 투수보다 크다. 구속의 차이 때문이다. KBO리그 투수들의 포심 평균 구속은 시속 144km다. 반면 메이저리그는 150km다. KBO리그에서 꾸준히 등판하면서 평균 150km 이상을 던진 투수가 안우진·고우석·스탁·수아레스 등 4명인 반면 KBO리그에 오면 당장 구속 1위를 차지할 수 있는 다르빗슈는 메이저리그에서 순위가 고작 176위에 불과하다.
시속 144km 공보다 초당 1.67m를 더 날아가는 150km 공은 그만큼 빨리 도착한다. 더 빨리 도착하는 공을 때려내기 위해 타자는 더 빨리 판단해야 하며 더 빨리 방망이를 내야 한다. 그렇다고 타이밍을 무작정 앞당기면 변화구 대처가 또 어려워진다. 자국 리그에서 빠른 공에 맞서본 경험이 부족한 한국과 일본 타자로서는 미국에서 강속구 대처 능력이 성패를 좌우한다. 강정호가 첫 두 시즌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강속구를 가장 잘 치는 타자 중 한 명이었던 반면 일본에서 홈런왕이었던 쓰쓰고 요시토모는 막상 미국에선 강속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 번이나 방출됐다. 이정후의 성패 관건도 빠른 공이다.
2021 시즌 123경기에서 37개의 삼진을 당하고 "삼진을 더 줄이겠다"고 공언한 이정후는 2022 시즌 142경기 32개의 삼진으로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더 고무적인 부분은 삼진을 줄이면서도 홈런 수를 7개에서 23개로 늘려 홈런과 삼진의 교환 비율을 1대5에서 1대1.5로 떨어뜨린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타격 5관왕이 된 이정후는 미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최초의 부자 MVP가 됐다. 통산 타율 0.342가 3000타석 이상 출전한 KBO리그 타자 중 역대 1위에 해당하는 이정후는 류현진 못지않게 국내 리그를 폭격했다.
메이저리그도 이런 이정후를 주목하고 있다. 이정후의 도전 소식은 mlb.com 메인에 빠르게 보도됐다. 아버지의 별명이 '바람의 아들'이라서 '바람의 손자'가 된 사연을 전하며 오타니 쇼헤이, 라파엘 데버스, 매니 마차도와 함께 내년 겨울에 등장할 '가장 주목할 선수'로 소개했다.
3월 WBC에서 맞닥뜨릴 MLB 투수와의 승부가 시험대
이정후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이정후와 김하성은 성공의 척도가 다르다. 김하성은 수비가 더 중요한 내야수며 수준급 스피드를 보유한 반면 외야수인 이정후는 수비, 어깨, 주력이 먼저 도전했던 김현수에 비해선 앞서지만 그 정도로 메이저리그에서 강력한 무기가 되기는 어렵다. 내야수 김하성이 2할5푼만 쳐도 성공일 수 있다면, 외야수 이정후는 3할에 근접해야 성공할 수 있다.
이정후의 롤모델은 아버지 이종범(내야수)이 아닌 일본의 이치로(외야수)다. 데뷔 시즌부터 10년 연속 골드글러브 수상으로 신기록을 작성하고 통산 500개 도루를 기록했으며 외야수로서 어깨도 손에 꼽혔던 이치로는 타격 외 나머지 부문에서 모두 최고점을 받은 선수였다. 반면 평균적인 야수이자 평균적인 주자일 가능성이 높은 이정후는 방망이로 승부를 봐야 한다. 일본에서 7시즌 동안 117개의 홈런을 날렸던 이치로는 메이저리그에선 19시즌 동안 117개에 그쳤다. 메이저리그의 빠른 공과 더 강력한 변화구에 맞서기 위해 축소 지향을 택한 이치로는 대신 첫 10시즌 동안 타율 0.331과 출루율 0.376, 연평균 224안타를 기록하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최고의 1번 타자가 됐다. 이정후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 또한 이치로와 같은 정확성이다.
마침 메이저리그는 홈런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 타자들이 수비 시프트를 피하기 위해 죄다 홈런을 노리면서 한때 홈런을 못 치면 외면받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정확성의 시대가 오고 있다. 메이저리그는 2023년부터 수비 시프트를 제한한다. 그동안 좌타자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 시프트를 규제하는 부분은 좌타자인 이정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이정후에게 성공의 기준은 평균보다 20% 좋은 공격력을 의미하는 조정 OPS 120이 될 것이다.
KBO리그에서 건너간 타자가 메이저리그에서 100경기 이상 출전하며 OPS 120을 넘겼던 시즌은 강정호의 2015년(123)과 2016년(129)뿐이다. 올해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3위에 오른 스티븐 콴(클리블랜드)은 아버지가 중국계, 어머니가 일본계인 아시아 혈통의 선수다. 콴은 홈런이 6개에 그쳤지만 타율 0.298과 출루율 0.373, 조정 OPS 124를 기록했다. 조정 OPS 120은 정확한 타격만으로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는 목표다.
이정후에 대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의 평가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하지만 리그가 달라지는 선수에 대한 예측은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이치로는 시애틀에 입단하기 전 두 시즌 동안 미국에서 스프링캠프를 보내며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을 경험하고 철저한 준비를 했다. 이정후도 메이저리그의 수준 높은 투수들을 미리 만나보는 것이 중요하다. 오는 3월에 열리는 WBC는 이정후에게 소중한 기회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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