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미군 위안부 승소 판결 뒤 3개월…할머니들의 특별한 연말

이병희 기자 2022. 12. 3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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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국가배상 청구 소송 승소…국가 책임 인정 판결
숨어 살던 세월 보상받은 한 해 "잊을 수 없는 해"
정부·지자체 지원까지 갈길 멀어…도 "방법 찾는 중"

[평택=뉴시스] 이병희 기자 = 기지촌 여성들을 돕는 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햇살사회복지회. 2022.12.31. iambh@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한다는 대법원판결이 나온 지 3개월,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올해를 하루 남긴 31일, 기지촌 여성들을 돕는 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햇살사회복지회에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입구에는 소복이 눈이 쌓여 있었고, 한쪽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하권의 매서운 한파가 이어지는 연말이지만 기지촌 할머니들의 이번 겨울은 여느 겨울과 사뭇 달랐다. 대법원판결로 국가 책임이 인정됐고, '죄인'처럼 숨어 살았던 세월을 보상받는 한 해를 보냈기 때문이다.

지난 9월29일 대법원은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한 판결을 확정했다.

지난 10월 말 할머니들은 법원 결정에 따른 판결금도 수령했다. 당초 평택 안정리 기지촌 여성 37명이 소송에 참여했지만, 8년 동안 14명이 세상을 떠나 23명만 판결금을 받을 수 있었다.

[평택=뉴시스] 이병희 기자 =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 2022. 12. 31. iambh@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오랜 시간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해 나선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는 올해를 '특별한 해'로 기억했다.

우 대표는 "올해는 안정리 기지촌 할머니들과 함께 걸어온 지 20년이 되는 해다. 또 8년 넘도록 끈질기게 이어온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서 할머니들의 손을 들어준 대법원판결도 나왔다. 그만큼 의미 있는 한 해"라고 말했다.

이어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았던 여성들의 마지막 종착지가 기지촌이다. 모진 삶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 함께 한 시간이 10년이 되고, 20년이 되면서 이제 자신들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낸 분들이 많다"라고도 했다.

또 "'나도 이제 떳떳하게 살겠다'며 좋아하시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뿌듯한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도 기지촌 여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더욱 노력하고, 기지촌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겠다"라고 말했다.

우 대표는 "할머니들이 자꾸 세상을 떠나고 계신데, 아직 정부나 지자체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라며 속상한 마음도 내비쳤다.

그러면서 "이제 국회의 시간이다. 2020년 12월 정춘숙 의원이 발의한 관련 법안이 하루속히 제정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또 2020년 5월 제정된 경기도 조례가 실질적으로 할머니들께 도움 되길 기대한다"라고 덧붙였다.

[평택=뉴시스] 햇살사회복지회 화요모임. (사진=햇살사회복지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8살부터 50년 넘게 안정리를 비롯한 기지촌을 돌아다니며 '미군 위안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김숙자(78) 할머니도 올해를 '잊을 수 없는 해'라고 말했다.

판결 직후 기자회견에서 "나도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외쳐 관심을 모았던 김 할머니는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대법원판결'을 꼽았다.

김 할머니는 "법원에서 우리가 이겼으니까, 나라가 잘못했다고 인정했으니까 행복한 해였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7~8년, 혹은 10년. 국회에서 어서 우리를 위한 법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경기도에서 조례 만들었다고 좋아했는데, 이젠 우리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소망을 드러냈다.

햇살사회복지회와 차로 10여 분 떨어진 곳에 사는 조은자(72) 할머니는 눈 쌓인 골목길 앞에서 취재진을 반갑게 맞았다. 빙판인 골목길을 지나자 오래된 빌라가 나왔다. 조 할머니의 보금자리다.

조 할머니는 어린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에 식모살이로 남의 집을 전전하다 "돈 벌러 가자"라는 친구를 따라 기지촌에 발을 들였다. 젊은 시절을 모두 바친 곳, 결국 남은 여생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정갈하게 정리된 집 안에는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줄 라디오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평택=뉴시스] 이병희 기자 = 조은자 할머니. 2022.12.31. iambh@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조 할머니는 따뜻한 믹스커피 한 잔을 내주면서 "한파에 여기저기 다 얼어서 지난주 햇살사회복지회 화요모임은 취소됐다. 노인네들이 거기까지 가기가 쉽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일주일에 한번 사람 만나는 날인데 빠지게 되면 아쉬운 마음이 크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 과거 생각은 잘 안 하려고 한다. 낙검자수용소에 갇혀 삼일 동안 약 먹고, 안 나으면 또 검진하고, 임신인 줄도 몰랐다가 페니실린 때문에 유산한 적도 있다. 좋은 기억이 없으니 생각해봤자 마음만 안 좋으니까 잊으려고 노력한다"라고도 했다.

이어 "그 시대가 그랬고,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과거는 마음 아프고, 너무 고생스러웠지만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과 함께하면 위로가 되고 마음이 편해진다"며 다른 할머니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대부분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라 사람이 그립다"면서 "내년에도 할머니들이 다 같이 대화도 하고 그렇게 지낼 수 있게 건강하기만 바랄 뿐"이라고도 했다.

대법원판결로 할머니들은 희망을 얻었지만,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까지는 갈 길이 먼 상황이다. 피해가 인정됐더라도 법적 근거가 없어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지원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경기도는 지난 2020년 5월 기지촌 여성의 복지 향상과 생활안정을 위한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국가 차원의 지원책이 없는 상황에서 지자체가 지원 근거를 마련한 최초의 시도였지만, 현재까지 지원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에 도는 국회에 예외규정을 담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한편, 대상자들의 기초생활수급·차상위계층 등 생활곤궁여부를 확인할 예정이다.

대상자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경우 지원금을 지급했을 때 기초생활급여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할머니들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경기도 관계자는 "예외조항이 포함된 특별법이 만들어져야 생활보호대상자도 수월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전에라도 개인별 상황을 파악해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기지촌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2014년 6월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8년 만인 지난 9월29일 원고 일부 승소로 확정됐다.

대법원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강제격리 경험이 있는 74명에게는 1인당 700만 원씩, 강제격리 경험이 없는 43명에게는 1인당 300만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iambh@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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