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아직도 마르크스를 떠받드는 이유는?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2. 12. 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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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60회>

<2018년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서 중국 국립 박물관에는 마르크스 특별 전시관이 마련되었다. 사진/https://www.globaltimes.cn/content/1210302.shtml>

헌법에 마르크스-레닌,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이념 열거

잘못된 철학이 국가 이념이 되면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 현대사는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 빚어낸 공산 전체주의의 잔혹사였다. 중국 현대사의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관을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청년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1)의 유물론적 독단이야말로 전 중국을 혁명의 광기로 몰아넣은 이념적 바이러스였기 때문이다.

중국 헌법 전문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실용주의, 장쩌민 “세 가지 대표 중요사상”,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에 이어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열거되어 있다. 14억 인민을 향해 7명의 사상을 절대 이념으로 받아들이라는 이념적 강압이다. 누군가 이 전제를 비판하거나 공개적으로 부정하면 중공 정부는 “사회주의 파괴 활동”의 죄목을 걸어서 처벌할 수가 있다.

만약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이승만 “독립 정신” 박정희 “새마을정신”, 전두환 “정의 사회 구현,” 노태우 “보통 사람의 시대,” 김영삼 “문민정부론,” 김대중 “국민 정부론,” 노무현 “참여 사상,” 이명박 “실용주의,” 박근혜 “애국애족론,” 문재인 “적폐 청산”에 윤석열 “법과 원칙”까지 다 명기한다면, 한국의 국민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도 전국에 들불처럼 시위가 일어나 즉각적인 헌법 개정으로 돌입할 듯하다.

자유민주주의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특정 개인의 사상이 국가의 이념이 될 수 없음을 명확히 알고 있다.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이념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민주적 평등의식과 개개인의 사상과 가치는 스스로 결정한다는 독립적 자유 의지를 갖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 인민은 개개인 모두가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 자기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집체주의와 위대한 수령의 교시를 따라야 한다는 영웅주의를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헌법 전문에 7인의 사상이 적혀 있어도 큰 반발이 없는 듯하다.

대학마다 마르크스주의 학원...“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하라!”

지난 10년 시진핑 정권은 이른바 “시진핑 사상”을 만들기 위해서 각 대학에 설치된 마르크스주의 학원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이념교육을 강조해 왔다. 그 밑바탕에는 전근대적인 목민(牧民)의 의도가 깔려 있다. 목동이 양 떼를 돌보듯이 정부가 인민의 생각을 감시하고 교도(矯導)해야 한다는 전근대적 온정주의(paternalism)다. 마오쩌둥 이래 중국공산당 정부는 늘 그렇게 중국 인민의 인격, 성격, 가치관 형성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왔다.

단적인 예로 시진핑 총서기는 2016년 즈음 강군(强軍) 건설을 강조하면서 “주혼육인(鑄魂育人)”이라는 신조어를 들고나왔다. 말 그대로 영혼을 주조(鑄造)하고 인민(혹은 인간)을 훈육한다”는 의미다. 2019년 이래 중국의 관영 매체나 정부 기관은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활용해서 (혹은 견지하여) 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한다”는 문구를 상투적으로 써 왔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철학의 제1 명제로 삼는 중국공산당이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철근을 뽑아내듯 인간의 영혼을 주조하겠다고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유물론자들의 집결소인 공산당이 영혼의 주조라는 표현을 쓰고 있음은 아무리 문학적 수사라 해도 모순되게 느껴진다.

<2021년 12월 28일 “중국 교육보”에는 “홍색 자원을 견지하여 주혼육인(鑄魂育人, 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하자)”는 제목의 시론이 게재되었다. 중국 전역의 관영 매체에는 “주혼육인”을 강조하는 기사가 자주 게재된다. 이미지/중국 광시성 장족 자치구 교육청 홈페이지>

마르크스는 영혼이란 기껏 물질적 현상이거나 종교적 환상이라 하지 않았나. 1843년 스물다섯 살의 마르크스는 “종교는 억압받는 존재의 한숨이며, 비정한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조건의 영혼이며, 인민의 아편”이라고 썼다. 비판 정신이 수갑을 가린 가상의 꽃장식을 걷어냈으니 이제 그 수갑을 벗어야 한다고 청년 마르크스는 호기롭게 말했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가장 큰 맹점은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과연 왜 목숨을 걸고 이타적인 혁명 투쟁에 나서야 하는지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인간의 도덕적 의무감이나 사명감은, 칸트의 표현을 빌자면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어도 이념으로서 요청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 존재나 형이상학적 가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 말기의 혼란 속에서 도스토옙스키(1821-1881)는 카라마조프가 이반의 입을 빌어 “신이 없으면 모든 게 허용된다”는 한 마디로 당시 서유럽에 널리 퍼져나가던 유물론적 인간관의 모순과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의 우려는 20세기 수천만의 인명을 앗아간 좌·우파 전체주의 정권의 정치범죄와 인권 유린으로 실현되었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라면서 왜 혁명적 자기 희생을 요구하나

영혼이 없는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과연 어떻게 혁명적 사명감과 숭고한 도덕심을 불어넣을 수 있나? 어떻게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폭탄을 끌어안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 “인민 만세!”를 외치며 기꺼이 자폭하는 혁명 전사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가?

인간이 기껏 육체적 존재이고 정신세계란 물질적 현상에 불과하다면, 알라의 영광을 위해, 내세의 심판이 무서워서, 인과응보의 카르마를 벗어나고자, 태양처럼 밝은 마음의 양지(良知)가 발동해서 영웅적으로 사리사욕을 극복하고 이타적 자기희생을 감내했던 사람들은 기껏 종교적 환상에 속거나 유심론적 오류에 빠져서 일신을 망친 우중(愚衆)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멸의 영혼도 없고, 초월적 존재도 없고, 현생 이상의 그 어떤 세계도 없고, 천당도 없고, 니르바나(nirvana)도 불가능하다면, 인간이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전제는 인간을 더 세속적이고, 더 이기적이고, 더 탐욕적으로, 더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언정 고매한 이타적 영혼으로 고양할 수는 없다. 마르크시즘의 최대 모순이자 맹점은 바로 인간을 물질적 존재라 단정하고선, 그러한 인간에게 물질적 본성에 반하는 혁명적 자기희생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

바로 그러한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부조리와 모순 때문에 현실의 공산정권은 두 가지 방법으로 “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할 수밖에 없다. 첫째는 영혼 속까지 파고드는 강력한 세뇌 교육이고, 둘째는 반대자를 색출해서 처벌하는 공포의 정치운동이다.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이어지는 70여 년에 걸친 중국의 현대사가 그 점을 웅변한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퇴조했지만, 시진핑 정권 들어 중공 중앙은 다시금 마르크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해 왔다. 사진/ https://www.arabnews.com/node/1295991/business-economy>

진리 독점한 국가가 인민에게 올바른 생각을 주입한다? 그게 전체주의

인류 역사에 출현한 모든 공산주의 정권은 예외 없이 국가가 절대 진리를 독점한 후 인민의 의식에 “올바른” 생각, “올바른” 가치, “올바른” 목적의식을 주입하고 세뇌하는 전체주의 체제였다. 물론 그러한 “올바름”을 올바르다고 믿는 사람은 그 정권의 시녀들과 용병들밖엔 없다. 1950-60년대 중국에 넘쳐나던 “올바른” 구호들은 인민을 혁명의 병정으로 조련해서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아간 전체주의 정권의 선전·선동일 뿐이었다.

유물론적 인간관으로 초월자를 살해하고, 영혼을 부정하고, 모든 종교와 전통을 죄악시한 공산주의자들은 무력으로 인민을 윽박질러서 혁명의 벼랑 끝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도, 이윤 동기도, 사유재산도, 입신출세(立身出世)의 열망도,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의무감도,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이상도 모조리 부정하고 죄악시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기본권을 박탈당한 개인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험한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실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물질적 존재라서가 아니라 범우주적 질서에 경탄하며 유한한 존재로서 두려움과 겸손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의 경구처럼, 하늘이 지극히 성실하기에 인간은 그 하늘을 본받아 성실하게 살려 한다. 미욱한 존재로서 돌연히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곳인지, 왜 태어나서 살고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도, 날마다 이른 새벽 동녘에 솟아오르는 해처럼 우리도 맡은 일을 해야만 한다는 실존적 자각을 얻는다. 초월적 절대자가 있는지는 확신할 순 없어도, 여러 종교의 가르침이 다 믿을 순 없어도, 이 세계는 너무나 크고도 두렵고, 우주의 법칙은 너무나 신비롭고도 엄격하고, 역사의 경험과 전통의 지혜는 심오하고도 광대하기에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통째로 무의미하다고 여길 순 없다. 그렇기에 대다수 인간은 겸허한 마음으로 금도(襟度)를 지키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유물론적 인간관은 수십만 년 인류가 이 땅에 살며 터득하고 깨달은 정신적 자각, 종교적 직관, 실존적 지혜를 송두리째 부정한 청년 마르크스의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에서 나왔다. 대학가에선 흔히 마르크스를 인간 해방의 혁명 이론을 제창한 위대한 천재라고 미화하지만, 역사 현실을 경험적으로 탐구해 보면 유물론적 인간관의 논리적 모순과 정신병적 파괴욕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억압적이고, 폐쇄적이고, 파괴적인 죽음의 이데올로기였음은 20세기 역사가 증명한다. 결국 20세기 공산정권의 인민은 국가의 농노로 전락한 채 경제적 보상도 없이 밤낮으로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마르크스에서 레닌, 스탈린에서 마오쩌둥까지 유물론적 인간관이 빚은 디스토피아의 현실이었다.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옳고 정확한 중국공산당 만세!” 사진작가 슈마커(Byron E. Schumaker, 1935- )가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 방중 때 촬영. 사진/wikipedia>

1990년대 중국에 뿌려진 자유주의의 씨앗...백지혁명이 이어갈까

어리석은 공산당의 유물론자들은 스스로 세상의 정답을 찾았다고 확신하지만, 그들은 실상 가장 중요한 인간의 실존적 물음에 대해서 아무런 해답을 제시할 수가 없다. 무지의 자각조차 없기에 그들은 얄팍한 유물론의 국정 교과서로 “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하려 한다.

자유주의 국가에선 정부의 최우선 역할은 인간의 기본권과 개인의 자유 보장에 있다. 자유주의 이념에 따르면, 정상 국가는 개개인에게 표현의 자유, 사상·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후 물러나야만 한다. 국가는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없으며, 사유재산을 침탈할 수 없다. 국가가 물러나면, 개개인은 열린 공론장과 사상의 시장에서 다양한 생각과 이론을 펼치며 경쟁하고 길항(拮抗)한다.

자유주의 국가는 개개인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으로 대우한다. 반면 전체주의 국가의 권력자들은 인민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는 미성년으로 취급한다. 미성년자를 보호하듯 불온한 사상, 불순한 생각, 그릇된 이념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다수 인민이 그렇게 당이 원하는 인간형으로 주조되어야만 중국공산당은 권력을 영속할 수 있다. 만약 중국 인민의 다수가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면, 중국공산당은 지탱될 수 없다.

그렇기에 시진핑 정부는 중앙선전부의 역할을 더욱 확장하고 초·중·고 및 대학에서 사회주의 이념교육을 더욱 강화해 왔다. 문제는 중국공산당의 이념교육은 세상에서 가장 무미건조하고 지리멸렬한 판에 박힌 선전·선동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모두가 손에 핸드폰을 들고 세상의 온갖 재미난 얘기들을 빛의 속도로 주고받는 세상인데, 진부한 이념을 낡은 방식으로 설파해 봐야 잘 먹히지 않는다. “영혼을 주조하고 인민을 훈육”하려는 시진핑 정권의 시도는 실현 가능성이 없다.

시진핑 정권은 이념교육을 강화해서 2010년대 중국에는 “소분홍(小粉紅)”이라는 과격한 애국주의 청년집단이 탄생했다. 정부 편에 서서 과격한 언사로 반대자를 공격하는 “소분홍”의 행태를 보면서 시진핑 정권의 이념교육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분석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소분홍”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최근 중국의 청년 문화에 지각 변동이 생겨났다.

<2022년 11월 27일, 상하이의 “백지 혁명,” 1990년대부터 중국에 일어났던 자유주의 운동의 연장일 수 있다. 사진/Kyodo>

지난 11월 말 중국 전역 각지에서 20, 30대 청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항의의 표시로 백지를 들고서 “공산당 해산”과 “시진핑 하야”를 외치며 시위했다. 이들은 공민의 기본권과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표현의 수위와 방식, 시위의 의도와 연출이 모두 일관되게 자유주의적 운동임을 보여준다.

그 뿌리를 찾아보면 1990년대 중국의 자유주의 논쟁으로 소급된다. 비록 지금은 정치적 탄압에 밀려 주변으로 밀려난 듯하지만, 이미 1990년대 중국 지식계와 사상계에선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 포퍼(Karl Popper, 1902-1994), 벌린(Isaiah Berlin, 1909-1997)을 위시한 구미의 자유주의 고전 다수가 번역·소개되었고, 공산당 일당 독재의 근본 문제를 비판하면서 공민의 기본권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일군의 자유주의자들이 활약했다. 오늘의 중국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제 그들의 논의에 귀 기울여 보자. 지난 주 소개했던 쉬요우위(徐友漁, 1947- ) 교수의 안내를 따라서······.<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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