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아는 어부와 연결되다…내 손안에 바다가 풍덩
농산물 하역반이 보내는 ‘더착한농산물’, 직거래 원조 ‘언니네텃밭’
스마트폰으로 이어진 소비자-생산자, 우리 사이에도 ‘연결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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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미용실에서 산 꿀, 아는 농부네가 식구들끼리 먹으려고 농사지은 고춧가루…. 냉동실에 검은 비닐봉지로 묶어둔 정체 모를 덩어리까지도 “아는 사람이”로 시작하는 것이 부모님 세대의 먹거리 유통 방식이었다. 이런 전통적인 커뮤니티에 발을 걸치지 못한 도시 1인 가구 7년차. 이제는 오프라인에서 엮인 ‘아는 사람’ 대신 에스엔에스(SNS)에서 느슨한 이웃으로 지내는 이들이 인맥이고, 스마트폰을 열면 아는 어부, 아는 농부와 연결된다.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하고 직원을 대량 해고한 지난 11월. 트위터가 이제 망하는구나 싶어 술렁이던 즈음이었다. 10년 세월을 타임라인으로 보아온 ‘박작가’님이 “종말의 트위터에서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싱싱한 수산물을 찾는 어른 트친(트위터 친구)들에게 생정(생활정보) 공익 트윗(트위트)을 올리겠다”며 소개한 곳이 수산물 조업 요청형 플랫폼 ‘파도상자’였다. 일반적인 수산물 유통 과정과 달리 어부가 ‘잡을’ 물고기를 거래한다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바다가 허락해줘야 생선을 받는다
“좀 무례하게 들리시겠지만 잡혀야 발송이 되니 받아봐야 받으시는 겁니다.” 전남 여수 거문도 어장 제2복성호의 삼치 조업 안내 페이지에서 미리 이르는 말이다. 파도상자 회원가입 뒤 받은 첫 메일에서도 ‘어업은 바다가 허락을 해줘야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기다리면 갓 잡은 수산물을 반드시 보내준다는 게 파도상자의 약속이다. 보통의 전자상거래에서 장바구니에 담아 결제로 이어지는 과정도 여기서는 ‘조업 요청하기’라고 한다. 어부에게 조업 요청이 전달되면 바다 상황과 조업 스케줄에 따라 조업 현황이 알림으로 도착한다. 때로 태풍이나 강풍으로 어부가 조업을 관망하거나 조업이 지연되기도 하면서 조업 성공을 기다리는 과정이 은근히 설렌다. 바다가 허락하고, 어부가 삼치를 잡아야 내가 먹을 수 있다. 그렇게 잡은 생선을 구매해 식탁에 올릴 때는 잊고 있었던, 바다와 어부의 안녕을 바라게 된다.
횟감으로 작업한 싱싱한 삼치 필릿을 받아 녹진하고 고소한 삼치회 파티를 벌였다. 이후 포항, 고흥, 무안의 어부들에게 연달아 조업 요청을 넣느라 한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트위터 앱보다 파도상자를 먼저 열었다. 이곳은 수산물을 사랑하는 이들의 커뮤니티이기도 해서 오늘은 어느 바다에서 어떤 어종이 잡히는지, 어떤 회원이 뭘 먹었는지 기웃거리며 수산물 덕질하는 재미도 있다. 조업이 지연되어 수산물 택배 수령 일정을 맞추기 어렵게 된 회원들은 주문을 취소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느긋하다. ‘용흥호 사모님이 손목 부상으로 회 손질이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에 ‘치료 잘하시고 천천히 보내달라’는 회원들의 훈훈한 댓글이 이어진다.
어부의 마음까지 전달
어촌 소식이 가깝게 느껴지고 바다와 연결되는 낭만을 즐기는 한편, 어부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궁금해졌다. 제주에 터를 잡은 파도상자 유병만(44) 공동대표를 지난 13일 서울에서 만났다. 세련된 스타트업 대표를 상상했는데, 유 대표는 대물을 잡고 넉넉하게 웃는 어부와 더 가까운 이다. 어촌에 어부로 귀어하고 싶어서 시작했고, 소형 어선을 조종하는 데 필요한 해기사 면허는 필기시험만 남았단다. “어부의 삶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다. 잡히는 양을 예측할 수도 없고, 가격도 상인이나 위판장에 의존하니까 유통 단계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선다. 어부가 소비자와 연결이 되어 있으면 수익도 늘어나고 할 만하겠다 싶었다. 최종 목표는 내가 어부가 되어 파도상자에 입점하는 것이다.”
수산물은 선도가 떨어지면 가치가 크게 하락하기 때문에 유통 기간이 짧다. 소비자에게 팔리지 않은 나머지 물량은 손해를 보고 떨이로 넘기거나 폐기 처리된다. 이런 재고 부담 비용이 수산물 유통 비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유 대표는 잡을 물고기를 거래해 재고 비용이 필요 없는 모델을 만들어냈다. “기존 수산 유통 구조에서 유통 비용을 판매가의 60%로 본다. 이 중 20%는 어부에게 돌려주고, 20%는 소비자에게 할인가로 돌아가고 나머지 20%는 온라인 판매 비용으로 파도상자 수익이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주로 바다에 나가 있는 어부는 그때그때 잡히는 어종을 알리거나 고객 응대를 할 여력이 없고, 소비자 역시 어부와 커뮤니케이션하기 어렵다. 해서 어부와 소비자 간의 직거래는 귤 농장에 전화해 귤 한 상자 주문해 먹듯 간단치가 않다. 이 사이를 잇는 이들이 파도상자의 ‘어부 매니저’들이다. “현재 네분인데, 모두 어촌에서 자란, 입점 어부의 가족들이다. 어부와 함께 상품을 기획하고 어부가 팔 수 있도록 계속 도와드리는 일을 하는, 어부와 소비자 양쪽을 이해하는 핵심 멤버다.” 회사에선 어부 가족이 ‘성골’이란 유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물 옥돔 조업을 요청해 받기까지 한참 걸렸지만 맛있게 잘 먹었다는 어느 회원의 후기에 ‘추석 연휴 이후 연이은 태풍으로 어부들의 경제 사정이 힘든 시기를 같이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다’며 어촌의 사정과 어부의 마음까지 전달하던 어부 매니저의 답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문이 들어온 물량만 잡고 수산물의 생산량을 예측해 재고 폐기를 줄이는 방향은 지속 가능한 어업으로 이어지고, 어부의 생활 안정으로 새로운 세대가 어촌에서 어부를 꿈꿀 수 있게 한다. 어부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유 대표가 바라보는 그림이다.
프로 농산물 감별사들이 보내는 채소
대부분의 농산물은 산지에서 도매시장으로 운반된 뒤, 경매를 거쳐 소매상이나 대형 마트를 통해 유통된다. 여기서 중간 유통 단계를 생략해 생산자는 더 높은 가격에 팔고, 소비자는 시중보다 낮은 가격에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꾸러미나 구독 서비스들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경쟁하는 중이다. 여기에 뛰어든 독특한 곳이 있었다. 농산물 도매시장 하역반원들이 만든 예비 사회적기업 ‘더착한농산물’이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는 유통의 고리에 잘 보이지 않던 사람, 하역 노동자는 정해진 휴일도 없는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젊은이들의 유입이 없어 점점 고령화하는 추세다. 2018년 전북 정읍시 농수산물센터에서 하역 일을 시작한 최영식(42) 대표는 2020년 3월 회사를 꾸리면서 같이 일하는 하역원들의 삶의 질 개선부터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시장 내 도매법인 정일청과도 밤에 하역 물량이 들어오지 않게 유도하는 등, 하역원들의 새벽 노동 개선에 뜻을 같이한다. “당시 하역원들은 대기 시간 포함, 한주 72시간을 일하고 수입은 최저임금에 턱없이 못 미쳤다. 일용직이라 의료보험도 모두 자비로 가입해야 했다.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에 4대 보험을 보장하고 수입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하역 업무 외에 유통 쪽 일도 겸하기로 했다.” 전화기 너머 도매시장 지게차가 이동하는 알림음이 삐익삐익 울리는데도 유 대표의 목소리는 또렷하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60, 70대 고령자를 고용하는 부담이 있지 않았는가 물었더니 최 대표는 오히려 장점을 설명한다. “하역원들은 산지에서 온 농산물을 선별하는 일도 맡아왔다. 수십년 경험이 쌓인 분들은 척 봐도 최고 품질의 농산물을 알아보는 전문가다. 이분들이 농산물을 다루는 요령과 속도는 젊은 사람들이 못 따라온다.” 최 대표는 이들과 함께 코로나19로 일손이 부족해 사과를 딸 수 없는 고령 농민의 농가에서 사과를 수확해 직거래 판로를 열기도 했다. “농민들이 도매시장에 오면 제일 먼저 하역원들을 만난다. 서울 대형 도매시장 사정은 다르겠지만, 정읍은 규모가 크지 않아 하역원들과 농민은 오랜 시간 교류한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다. 농민에게 들은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보자고 하역원들이 나섰던 일이다.”
최 대표는 중도매인 자격을 얻은 뒤에는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이점을 이용해 지역 취약계층에 수박이며 고구마, 제철 채소 꾸러미를 철철이 전달한다. 수익이 남을까 걱정이 될 정도.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우리끼리 나누고 싶은 마음이 물론 있다. 그래도 팔고 남는 물량이 있으면 길게 생각 안 하고 주민센터로 간다. 가게에서 양파 한망만 사도 몇천원 하지 않나. 우리가 양파를 전하면 취약계층분들이 구매 부담이 덜어지니까 계속하게 된다.” 벌이는 아직 자랑할 만큼은 아니라지만, 처음 4명으로 시작해 10명을 고용할 만큼 성장했다. 모양이 들쭉날쭉해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시중에 유통되지 못하는 농산물에서 맛 좋은 것들을 선별한 더착한농산물의 꾸러미 구독을 신청했다.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에 발송되어 받아본 후기를 전하지 못해 아쉽지만, 연말은 풍성하리란 기대에 부풀었다.
13년 된 농산물 꾸러미계 ‘조상님’
‘언니 한번 믿어봐~.’ 언니네텃밭 여성농민생산자협동조합(이하 ‘언니네텃밭’) 누리집을 열면 만나는 문구다. 부모님이 믿는 인맥이 있듯, 내게도 든든하게 믿는 언니들이 있다. 참기름, 들기름을 사서 부모님 댁에 보내며 “내가 아는 언니들이 있어.” 의기양양 큰소리를 치기도 한다. 언니네텃밭은 소비자와 직거래하는 농산물 판매 시장에서 꽤 오랜 시간 자리잡아왔다. 2009년 여성 농민이 생산과 경제 주체로 대접받지 못하고 그저 보이지 않는 일손으로 가려져 있는 문제를 개선하고자 ‘제철 꾸러미’ 사업을 시작했다.
지역 꾸러미 공동체를 조직해 집 주위 텃밭에서 키운 농작물을 조금씩 모아 팔며 처음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을 만든 언니도 있었다. 그런데 13년을 이어오는 동안 농산물 꾸러미의 원조 격인 언니들도 60대, 70대로 나이가 들고 새로 참여하는 생산자도 드물어서 언제까지고 꾸러미가 이어질 거라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매 꾸러미가 귀하다.
나는 매일 밥을 해 먹지 못해서 비정기적으로 1인 가구용 꾸러미를 이용하는데 채소나 토종 씨앗을 받아 키운 곡식류에 한두 품목은 손수 담근 김치나 장류, 밑반찬이라 이 맛이 또 각별하다. 꾸러미를 받으면 매번 하는 의식이 있다. 우리 콩으로 바다 지하수만 넣어 만든 투박한 생두부 한 귀퉁이를 떼어 천천히 씹으며 같이 오는 꾸러미 편지를 읽는다. 품목과 생산자, 생산 방식이나 요리법을 곁들인 소식지인데 꾸러미 공동체마다 개성이 있다. 맨 처음 꾸러미를 시작한 강원도 횡성 공동체는 그동안 5천번이 넘는 꾸러미 편지를 보냈다. 12월 경남 함안 공동체 편지에는 가수 나훈아의 팬인 한 언니가 모처럼 콘서트 나들이를 다녀온 이야기가 실리기도 했다. 언니들과 이어지는 편지는 맞춤법이 틀려도 좋고, 자주 보내는 품목은 비슷한 내용이라도 새록새록 반갑다. 덕분에 아는 언니라고 불러도 멋쩍지 않다. 아는 어부, 하역원들과 함께하는 농산물, 아는 농부 언니와 함께 멀리 있던 삶을 가깝게 잇는 밥상으로 새해를 맞이한다.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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