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한복차림 조선인은 ‘일본탕’ 출입금지
‘온양온천은 수백년이래 조선 반도강산에 일 명승지(名勝地)이라. 금일에 이르러 주식회사라는 명칭으로 일본인이 차(此)를 관리하는 중인데 기입욕장소(其入浴塲所)는 좌,우편 양쪽에 설치하였으며 전(全)조선각지로부터 춘추양절(春秋兩節)은 조선인 남녀노유를 물론하고 입욕차(入浴次)로 내왕(來往)하는 객(客)은 수만(數萬)으로 계산(計算)한다. 그런데 일본탕, 조선탕이라는 명칭(名稱)을 사용하는 중이며 소위 일본탕은 비록 조선인이라도 양복을 입었으면 입욕(入浴)케하는 중(中)인데, 양복은 걸레가 다 되었어도 상관없고 조선 의복으로는 상당한 신사복으로 금의(錦衣)를 입었을지라도 입욕을 불허하니, 소위 조선탕에도 일본의(日本衣)를 착(着)한 인(人)의 입욕(入浴)을 불허(不許)함이 상당(相當)치 아니한가. 여차한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 편의(便宜)하겠다고 사람들이 희망한다더라’(‘목욕도 부자유’, 조선일보 1923년5월30일)
◇걸레 같은 양복이라도 입어야 들여보내
충남 아산 발(發)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명승지로 소문난 온양 온천에서 ‘일본탕’ ‘조선탕’을 구분해 조선인을 차별대우한다는 내용이었다. 허름한 양복이나 일본옷이라도 걸치면 조선인도 ‘일본탕’에 출입할 수있지만, 최고급이라도 한복 차림으론 일본탕엔 들어갈 수없게했다는 지적이었다. 요금은 같은데, 일본탕에 비해 조선탕의 시설과 서비스가 떨어진다는 점도 지적했다. ‘같은 요금을 내어도 일본탕은 물이 좀 더 덥고, 정결하게 꾸미었음으로 조선사람으로도 중류 이상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그곳을 희망하는 터이나 조선옷만 입었으면 물론 표를 팔지 아니하고 아무리 추할지라도 일본 옷이나 또는 양복을 입었으면 조선 사람이라도 입욕시키는 기괴한 차별적 수단을 씀으로 내왕하는 손(님)들의 불평이 높아오던 중인데….’(‘온천시민대회’, 조선일보 1924년12월18일)
◇시민대회까지 열어 당국에 진정서 제출
온양온천은 조선시대 태조와 세종, 세조가 다녀간 ‘왕실온천’으로 유명했다. 경성에서 경부선(1905년 개통)을 타고 천안까지 가서 사설철도인 경남철도주식회사 열차로 갈아타면 온양까지 직행했다. 1934년 기준, 평일 왕복은 2원78전, 주말은 1원98전으로 30%정도 할인해줬다. 주말 여행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초창기 온양온천은 조선인의 성토대상이었다. 1910년대 일본인이 온천 소유권을 사들여 주식회사를 세우면서 사달이 났다.일본인 업주는 온천수를 뽑아올려 온천탕을 운영하고 호텔과 상점을 개발해 일본식 온천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복식에 따라 출입을 제한하는 ‘기발한’ 발상으로 조선인의 분개를 샀다. 차별대우에 분개한 주민 수백명은 시민대회까지 열어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호서기자단까지 공동 항의
1927년에도 온천 관리자들이 차별로 일관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번엔 호서(湖西)기자단이 공동으로 항의했다.’일본인들이 별별 야비한 계책으로 돈을 뺏아가며 조선동포를 차별하는 중, 제일 분한 일은 욕탕을 좌우로 분치하고 위로는 일인(日人)탕, 좌로는 조선탕으로 만들어 요금은 일반으로 받고 조선탕에는 위생도 무엇도 불구하고 아무나 들여보내고 소위 일본탕에는 걸레조각이라도 양복과 일본옷을 입었으면 입욕을 허가하고 아무리 신사라도 조선옷만 입었으면 절대로 입욕을 불허하는 기괴망측한 일이 있어 일반의 비난이 많은 바 분개한 일반 주민들은 온양온천욕탕을 경남철도가 매수할 희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온양온천 관리자 종시 차별로 일관’,조선일보 1927년4월5일)
이런 차별이 언제까지 계속됐는지는 알 수없다. 하지만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됐다.
◇구보 박태원의 배천온천 기행
‘토성서 차를 바꾸어 타고 배천온천서 내린 것이 오후 1시반. 떠나기 전 이형에게서 배운대로 곧 천일각에 들렀다.’
1938년 어느 겨울 아침, 구보(仇甫) 박태원이 황해도 여행을 떠났다. 첫번째로 향한 곳이 배천온천이었다. 경성에서 가까워 주말 1박2일 여행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경의선을 타고 토성(土城)에서 내려 배천행 지선으로 갈아타면 두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구보는 천일각에 들러 온천욕부터 했다. 욕탕을 나와 ‘돈부리’로 점심을 먹었다. ‘해서기유’(海西記遊·조선일보 1938년2월15일~22일·총6회)를 배천온천으로 시작했다는 건 그만큼 온천 여행이 인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배천온천은 경성에서 가까운 만큼 교통비도 비교적 쌌다. 1935년 기준, 열차 3등칸 왕복에 1원83전인데다 반도여관 및 조선여관은 1박에 1원~1원50전 정도였다. 물론 구보가 들른 천일각 숙박은 최저3원, 배천온천(호텔)은 4원50전부터였으니, 고급 시설도 있었다.
◇겨울 여행의 꽃, 온천여행의 탄생
온천은 20세기 전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른 인기 여행지였다. 동래온천이나 온양온천처럼 유서깊은 곳도 있었지만 온천욕은 조선인에게 익숙치 않았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천 여행을 다녀오기도 쉽지 않았다.
경부선과 경의선, 경원선이 부설되면서 철로를 따라 전국에서 온천이 개발되고 인기 여행지로 급부상했다. 온천 개발에 나선 건 물론 일본인들이었다.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에 따르면, 1925년 전국의 주요 온천으로 동래 해운대 유성 온양 신천 용강 온정리 주을온천이 꼽혔다. 교통이 편리하고 관광객 숙소를 갖춘 온천이었다.
◇이광수의 온천예찬
춘원 이광수는 당시 ‘모던 문물’인 온천욕 예찬자였다. 일본 유학생 출신이니만큼 온천 문화에 친숙했을 것이다. 동래온천에 들른 춘원은 이렇게 썼다. ‘맑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에 신체를 잠그고 앉았는 맛은 참 비길 데가 없다. 얼른얼른하는 화강석 위에 앉아 말끔하니 전신을 씻고 나서 백설 같고 양모(羊毛) 같은 수건으로 몸을 씻고, 백사(白沙) 청송(靑松)으로 솔솔 불어오는 청풍(淸風)을 쐬면, 육신의 진구(塵垢·먼지와 때)뿐 아니라 정신의 진구까지 씻어지는 것같다.’(이광수, ‘반도강산’, 영창서관, 1939) 온천욕이 얼마나 상쾌했던지 몸의 때뿐 아니라 정신의 때까지 씻기는 것같다고 썼다. 1917년 7월31일의 편지다.
◇온양온천 ‘유한계급의 유원지’
극작가 남우훈은 1924년 처음으로 온천장을 구경했다. 부산에 들렀다가 동래온천에서 하룻밤 묵으며 온천욕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온천장을 소설에 등장하는 로맨스의 현장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산책할 만한 곳도 변변찮은데다 뜨거운 물밖에 없는 온천장을 둘러보고,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4년 뒤 온양온천에서 일주일을 보낸 뒤엔 생각이 달라졌다. 온천 욕장 근처는 일본인들의 주택, 여관, 상점이 줄지어 들어섰다. ‘우리네의 거리에서 볼 수 없는 활기를 그곳에서 보게 된다. 조선의 도시가 모두 그리한 것과 같이 조그마한 온천장까지도 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다.’
숙소 맞은편 방에 ‘양복쟁이’ 두 사람이 젊은 여성과 함께 들어와 밤새도록 청요리를 시켜먹으며 술마시고 화투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향락과 퇴폐의 냄새를 맡았다. 남우훈은 이렇게 썼다. ‘조선에 있어 온천장이 오락장화하게 된 것은 멀지 않은 과거에서부터이다. 약 10년 전만 하여도 온천이라면 환자가 갈 곳으로 밖에 생각지 아니하여서 병자의 요양지이던 것이 현금에는 요양보다 오락이 앞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겨울이면 유한계급의 유원지가 되는 것이다.’(‘온양온천삽화’ 별건곤 제24호, 1929년12월)
◇'후끈한 탕속에 들어앉아 바깥 햇빛을 내다보면…'
‘별건곤’ 같은 호에 동래온천 방문기를 쓴 시조시인 김남주는 온천 마니아였던 모양이다. ‘후끈후끈하는 온천의 탕 속에 들어앉아 남쪽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가냘픈 겨울의 햇빛을 내다보는 것도 겨울을 보내는 맛으로는 주사청루(酒肆靑樓·술집과 기생집)에 수백금을 허는 것보다는 상승일 것같습니다.’
김남주는 동래온천장이 예전과 달리 퇴폐, 향락의 장소로 변질됐다면서도 온천장을 찾는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이곳도 옛날은 약수로 병을 고치고자 순례의 나그네를 하는 보살네들이 부근의 산사를 찾고 치성을 하던 곳이라 그때는 정토이었고 동경의 뜻도 달랐섰거니와 지금은 음탕한 곳으로 여지없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기생, 자동차, 창녀, 여관, 요리집 등이 발달이 되었다면 상당 이상으로 그렸다고 하겠습니다만은 눈을 들어서 좌우의 벌판을 바라보고 뒤로 산을 쳐다보면 산이 아름답고 물이 깨끗하여서 속화되고 추회될 것을 가리우고도 남을 것이 있겠습니다.’ (‘동래온천 情話’, 별건곤 제24호, 1929년 12월)
◇새해 첫날은 온천에서
철도국은 단체 운임을 할인해주면서 온천 여행을 장려했다. 겨울이면 관광객이 온천으로 몰려들었다. 소설가 김남천의 신문 연재소설 ‘사랑의 수족관’(조선일보 1939년12월28일)엔 새해초 온천 여행을 다녀오는 걸 관례화한 중년 부부가 나온다.
‘이신국씨와 그의 부인 은주는 몇해째 계속해 오는 습관대로 정월 초하룻날을 온천에서 보내었다. 아침일찌기 원동(苑洞·일제시대 원서동 명칭) 저택에서 침실을 나온 이신국씨는 ‘푸록코-트’에 위의를 갖추고 봉축식에 정식으로 참례한 뒤 곧 여장을 꾸려가지고 부인과 함께 미리부터 예약해두었던 배천 온천으로 자리를 옮기었던 것이다.’ 기업체 사장 이신국 부부가 향한 곳은 경성에서 가까운 배천온천이었다. 부부는 3박4일간 호텔에 묵으며 온천욕을 즐기면서 ‘몸과 마음을 정양했다’
겨울 여행의 꽃, 근대 온천 여행은 100여년전 이렇게 시작됐다.
◇참고자료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 ‘조선지질조사요보’ 제3권, 1925
남우훈, ‘온양온천삽화’, 별건곤 제24호, 1929년12월
김남주, ‘동래온천 情話’, 별건곤 제24호, 1929년 12월
‘온천장안내’, 삼천리 제7권제1호, 1935년1월
이광수, ‘반도기행’, 춘원이광수걸작선집 제1권, 영창서관, 1939
국사편찬위원회 편,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두산동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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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행협회조선지부, 문화조선 제3권제2호, 1941년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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